확신을 버리고 질문하자
마흔 살이 되어서야 깨달았습니다.
학창 시절 내내 나를 지탱했던 '확신'이 사실은 통제 가능한 환경이 만들어낸 착각이었다는 것을.
인생을 돌이켜보면 큰 시련을 겪거나 생활고에 시달린 적은 없었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대학 졸업까지 내가 생각하고 계획한 대로 순탄하게 흘러갔습니다.
군 생활마저도 그랬습니다. 이등병이었던 나는 생활관에 앉아 한자 2급 공부를 했습니다.
대학에 와서 눈을 떠 열심히 했고 3학기 연속 1등을 했습니다. 심지어 군 전역 후 복학한 2학년 1학기 때는 전 과목 A+를 받기도 했습니다. 제대 후 미국 교환학생 파견도 계획대로 진행됐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순탄하지? 사회에 나가면서 이제 나에게도 인생의 큰 좌절감과 시련이 닥칠까?"
학창 시절은 변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수업과 출석, 시험과 성적. '나만 잘하면' 충분히 '통제 범위'에 둘 수 있는 조건이었습니다. 이 사회는 공부하는 학생에게 "적당히 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격려를 더 많이 합니다.
무엇보다 부모의 재정 지원이 뒷받침됐습니다. 학자금을 대출받고 갚아 나가야 했다면, 학업과 학교 활동에 매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나는 부모의 도움과 '학업'이라는 시스템 내에서 격려받으며 자라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고, 계획하고, 실행했던 모든 것이 제법 나의 예상과 기대에 미치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런 삶을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 생각과 나 자신에 대해 확신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흔이 갓 넘은 지금,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나만 잘해서 인생이 풀리려면, 이 사회 전체가 너무 이상적인 조건을 만족해야 합니다.
올해 초 신규 사업 총괄 책임을 맡고 있을 때, 협력사와의 관계에서 일정 조율 문제로 예상과 다르게 오해와 갈등이 생겼을 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세상은 내 의지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 내 의지만으로는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없습니다.
변동성, 불확실성, 복잡성, 모호성이 혼재하는 세상에서 나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확실하지 않은 것을 매우 싫어하는 인간 습성을 나 역시 그대로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득 깨달았습니다.
불확실성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확신은 '정답'을 찾으려는 시도입니다.
하지만 정답은 없거나, 있다 해도 계속 변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답 찾기를 멈추는 것입니다.
대신 질문하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질문은 정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궁금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건 왜 이럴까?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나에게 이런 일은 왜 발생할까? 삶은 왜 고통스러운 것일까?"
이렇게 계속해서 묻고 답하고, 묻고 답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질문'은 오로지 내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각자의 궁금증이 고유하기 때문에 대답도 고유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이 다양성의 원천입니다.
질문은 가치중립적이라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질문은 설득이 아니라, 사유의 시작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적 충동과 호기심에서 출발하는 것이 질문이며, 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문제'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 문제는 '불편함'을 느끼는 것에서 시작됐습니다.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인류 문명은 인간의 생각에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불편함을 해소하는 과정이 문명인 셈입니다.
나는 오로지 나만의 문명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문명은 생각에서 비롯되며, 그 생각이 결국 질문하게 만듭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끊임없이 질문하며 살아왔습니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정말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회사가 원하는 것, 부모가 기대하는 것,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알았지만 정작 '나'는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질문을 통해 비로소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지식이 나를 더 창의적이게 만들었는가?"
많이 배웠다고, 정말 나는 지적으로 창의적인 사람이 되었을까요? 좋은 지식은 나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기본적으로 공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식을 쌓는 것만으로는 창의적이 되지 않습니다.
창의성은 서로 다른 지식을 '연결'할 때 비로소 생겨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탁월한 인간은 은유하는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은유란 결국 서로 다른 것을 연결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식을 연결하려는 시도를 계속합니다. Obsidian이라는 노트 도구가 그 연결을 돕지만, 중요한 것은 도구가 아니라 연결하려는 태도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 여전히 호기심과 궁금증이 많다는 것은 나 스스로를 백지상태로 두어 다양한 색깔로 나를 그려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라는 한계를 뛰어넘는 방법인 셈입니다.
안다는 것은 외부 의존성이 낮다는 것이며, 스스로 사유하고 결정하는 힘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일 것입니다.
많이 아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 앎은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마흔을 넘긴 지금, 나는 더 이상 확신을 찾지 않습니다.
대신 질문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들이 나를 더 자유롭게 만듭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확신을 붙잡고 있나요?
그리고 그것을 질문으로 바꿔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