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것을 이루려면, 필요한 것을 견뎌야 한다
“자, 올해 매출 15% 늘려봅시다!”
사장님의 목소리엔 확신이 가득했습니다.
회의실 공기가 순간 팽팽해졌죠.
저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사장님, 팔고 싶어도… 팔 수가 없습니다.”
잠깐의 침묵.
사장님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봤고, 저는 더 이상 둘러댈 수 없었습니다.
열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게 제가 서 있는 자리의 현실이니까요.
이 말을 듣는 순간,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영업은 정말 열정의 문제일까요?
저는 다국적 기업의 한국 공장에서 일합니다.
전 세계에 생산 거점을 둔 전형적인 글로벌 Tier 1 자동차 부품 회사입니다.
일은 아주 명확합니다.
부품 입찰, 수주, 가격 결정, 해외 공장과의 협업, 수익성 관리, 그리고 각종 상업적 협상.
전형적인 B2B 세일즈죠.
저의 고객은 자동차 제조사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객은 자동차를 사는 소비자들이죠.
저는 소비자와 직접 거래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만든 부품 하나가 차량 안전과 직결되기 때문에
결국 같은 생태계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하나 더 남습니다.
고객은 과연 무엇을 사고 있을까요?
영업인은 제품을 팝니다.
동시에 ‘나’라는 사람도 함께 팝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라는 브랜드는 메인 요리가 아니라 조미료에 가깝습니다.
있으면 좋지만, 없다고 식사가 안 되는 건 아니죠.
백화점 지하 1층 선물용 고급 과일 바구니를 떠올려 보세요.
“무엇을 좋아하실지 몰라 좋은 것만 넣었습니다.”
고객이 듣고 싶은 말은 사실 이겁니다.
품질에 문제없고,
가격은 경쟁력 있고,
납기는 정확하고,
기술과 설계는 신뢰할 수 있는 것.
제조업 B2B에서 고객은
‘물건’이 아니라 ‘안심’을 구매합니다.
이쯤에서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잘 만들면 팔면 되지 않나?”
문제는, 팔 게 없는 게 아니라
팔 수 있는 권한이 제한돼 있다는 점입니다.
기술과 제품 개발은 대부분 북미와 유럽이 주도합니다.
그들이 설계하고, 먼저 생산 경험을 쌓은 뒤에야
다른 국가로의 판매가 허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딘가 모르게 ‘Korea Discount’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한국 공장의 권한은 생각보다 제한적입니다.
본사 승인 없이 독자적인 제품 개발은 어렵고,
투자가 필요한 순간마다 높은 허들을 넘어야 합니다.
영업에도 국경이 있습니다.
한국 공장은 한국 고객만 상대합니다.
다른 국가에 팔고 싶어도,
그 공장에서 이미 생산 중인 품목이라면 기회는 거의 없습니다.
본사는 KPI를 아주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하지만 정작 팔 수 있는 카드는 많지 않습니다.
영업인에게 가장 잔인한 상황은,
팔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점 아닐까요?
열정만으로는 안 됩니다.
본사의 공감을 호소한다고 상황이 바뀌지도 않습니다.
결국 남는 선택지는 하나입니다.
왜 한국에서 해야 하는지를 증명하는 것.
한국 공장의 역량,
고객 수요,
시장 성장성,
경쟁 구도,
투자 규모와 수익성 예측.
감정이 아니라 숫자와 구조로 설명하지 못하면
기회는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공장은,
솔직히 말해 ‘시키는 대로 잘 안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본사에서 만들어 놓은 제품을 그대로 팔기보다,
국내 고객과 협업해 변형하고, 고도화하고,
새로운 개발 어젠다로 다시 제안합니다.
기술 승인 권한은 본사에 있지만,
도전하지 않으면 존재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독일 공장의 48V HEV 부품을 800V EREV로 확장시키며
한국 공장이 개발을 주도하는 사례를 만들어냈습니다.
다른 공장들이 포기한 부품을 고도화해
지금은 우리 공장이 전 세계 유일한 제조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팔지 말라는 말이 나올 때,
오히려 회사와 개인이 함께 성장할 기회가 생깁니다.
저는 다국적 기업의 한국 공장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항상 부족하고,
항상 증명해야 하고,
항상 배워야 하는 곳.
말 그대로 멘탈 훈련소입니다.
하지만 그 제약 덕분에
본사 어젠다를 그대로 따르는 직장인이 아니라,
스스로 해석하고 책임지는 직업인으로 일하게 됩니다.
회사 이름이나 명함 뒤에 숨기엔
이곳은 너무 거칠고,
그래서 더 매력적입니다.
제약 속에서 돌파구를 찾는 힘.
그 힘이 아직도 저를 이 자리에 붙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