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자가 교회에 나가게 된 사연

믿음이 아니라 태도를 갱신하다

by 김지영


예정된 시나리오, 아니 정말 그랬을까

“이거 왠지, 이러다가 곧 교회 다니겠는데…”


아내는 과거 교회를 열심히 다니지는 않았지만, 늘 하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두 아이와 함께 교회에 가자는 이야기가 나올 법한 시점이었습니다. 너무 교과서적인 전개라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문제는 나였습니다.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사상, 신념, 가치 체계를 바꿔야 가능한 제안을 할 때 본능적으로 한 발 물러서는 사람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제안은 가급적 피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가정의 평화와도 연결돼 있었고, 아이들 교육이라는 명분도 있었습니다. “일요일에 교회 가면 아내도 좋아하고, 아이들도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주말 일정도 단순해지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스스로에게 묻게 됐습니다.


정말 그렇게 싫을 일인가?


무엇보다 나는 이미 내 안에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존의 믿음과 관념을 그대로 유지한 채 살아가는 데서 오는 불편함을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말을 꺼냈을 때, 고민하는 척하다가 “에이, 한번 가볼까” 하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미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바빠서…”라는 말로 몇 년쯤은 충분히 미뤘을 겁니다.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나는 왜 갑자기 과학을 들여다봤을까

나는 스스로를 꽤 인문학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창 시절 물리, 화학, 생물은 늘 이해의 바깥에 있었습니다. 대신 나는 “나는 누구인가” 같은 질문만 붙잡고 살았습니다.


그런 내가 교회를 다니기 위해 과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웃기죠? 종교와 과학은 늘 대척점에 서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빅뱅 이론부터 살펴봤습니다. 물리학자들과 각 분야 전문가들이 등장하는 콘텐츠를 찾아봤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들 역시 우주의 탄생을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빅뱅은 여전히 ‘이론’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아주 작은 하나의 점이 폭발해서 우주가 됐대요.”


이 설명을 들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이 말이 정말 “신이 만들었다”는 설명보다 더 과학적인가?


진화론은 꽤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생명이 어떻게 변화하고 적응해 왔는지는 이해가 됐습니다. 그런데 질문은 거기서 멈췄습니다.


그래서, 생명은 왜 생겼을까요.


태양이 생명의 근원이라면, 태양은 왜 존재합니까.
우주가 태양을 만들었다면, 우주는 왜 생겼습니까.
빅뱅이 원인이라면, 그 빅뱅은 왜 일어났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과학도 조용해집니다.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이렇게 말해보게 됐습니다.


신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 정도는, 생각보다 비합리적인 선택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나는 무엇을 믿게 된 걸까

여기서 중요한 건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먼저 정리해야 했던 건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교회를 다니는 것’ 사이의 거리였습니다.


과학 콘텐츠를 몇 달간 접하면서 내 생각에는 미묘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신은 없다”라고 단정하던 태도가
“모르는 게 있을 수도 있겠다”로 바뀌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과거의 나는 신이 없다는 확신을 가진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모른다는 상태를 견디지 못했던 것에 더 가까웠습니다.


나는 이 과정을 ‘상대화’라고 부릅니다.
절대적이라고 믿어왔던 생각이 흔들리고, 그 자리에 여백이 생기는 과정입니다.


삶의 상당 부분이 우연과 비의도성 위에 놓여 있다면, 사고 역시 그렇게 단단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요. 멈춰 있고 단절된 절대성 대신, 움직이고 이어지는 쪽으로 한 발 물러서는 것. 그렇게 생각하니 교회를 다니는 선택이 생각보다 가벼워졌습니다.


그래서 다녔는데, 이게 끝일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다녔습니다.
교회에서 권하는 활동도 해봤고, 사람들과 교제도 했고, 믿어보려고 노력도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설교 시간에 졸고 있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말씀은 잘 들어오지 않았고, 어느새 교회 출석은 관성적인 주말 일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됐습니다.
“잠깐, 이게 내가 선택한 삶의 태도였나?”


교회를 다니기로 결정한 일 자체는 나에게 꽤 큰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정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있었습니다. “다니는 게 어디냐”라는 말로 나 자신을 달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잡았습니다.
성경을 챕터별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였습니다.


교회에서 발견한 뜻밖의 장면들

교회를 다니며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모든 교인이 늘 단단한 신앙 상태에 있을 거라고 나는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다녀보니, 나처럼 흔들리고 질문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가면 신앙을 더 강하게 권유받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각자의 속도를 존중하는 분위기에 가까웠습니다.

그 점이 생각보다 편안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목사님들이 가장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삶과 실제 삶을 일치시키며 산다는 것. 나는 솔직히 그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성경은 수천 년 전의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금을 사는 인간의 삶과 연결됩니다. 나는 이 책을 ‘믿어야 할 책’이라기보다 ‘대화를 시도해 볼 수 있는 텍스트’로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깨달았습니다.
신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라는 질문 자체가 어쩌면 가장 단순한 질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입니다.


남는 것은 태도입니다.
'기능적'으로 말씀을 수행하는 인간이 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체'로서의 나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회든, 절이든, 성당이든 ‘내 마음을 점검할 수 있는 시간’만 제공된다면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종교에는 절대적 진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개개인이 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믿지 않습니다. 다만 삶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사건과 감정, 깨달음이 찾아올 때, 그것을 전부 우연으로만 밀어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순간 느껴지는 경외심과 겸손함.
나는 그것을 '우연'이라는 가면을 쓴 무언가의 개입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현재 가지고 있는 지식과 고정관념, 진실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다시 질문해 보는 일. 신념과 가치 체계를 상대화하는 시도. 그것만으로도 삶은 조금 더 가벼워진다고 느낍니다.


물질적인 갱신은 오래가지 않지만, 정신적인 갱신은 사고의 시선을 높여 줍니다.
그 시선 위에서 나는 지금도 묻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너무 쉽게 확신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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