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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교달 Oct 20. 2021

멀고 먼 여정-승진

국제학교 교사에게 승진이란

1. 교사의 직장인 학교


20대 막 대학을 졸업하고 바닷가 앞 시골 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를 시작했다. 그저 존재함 자체가 풋풋하고 싱그러웠던 그 나이, 무엇을 하든지 새롭고 신났었다. 미술교사에게 중3학생의 가정 과목을 가르치라니..  '남자의 몸'을 가르치는 순간에 얼굴이 벌게지지 않으려 식은땀을 흘렸던 기억이 새롭다. 시골 남학교에 처녀 선생님이 부임해 왔으니 얼굴이 외계인이어도 관심을 받는 법. 학교에서 힘 꽤나 쓰는 아이들은 쉬는 시간이면 미술실로 모였다. 어쭙잖은 농담과 쓸데없는 도움을 주고받으며 관심을 받는 것이 행복했다.


한 달쯤 지나 어느 정도 학교의 분위기에 적응하던 나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내 옆 옆 자리에 있는 국사 선생님은 종종 지각을 하고 반차를 내거나 조퇴를 하셨다. 별명이 핑크 판다인 교감선생님, 어떤 캐릭터인지 알 것만 같은 그 별명. 그 깐깐한 교감선생님이 유일하게 잔소리 없이 조퇴를 허락하는 국사 선생님.

점심을 먹으며 다른 선생님들께 이유를 물었는데, 간단하게 대답하신다. "남편이 검사야."


워낙 좁은 지역사회라 누구네 밭에 소가 똥을 싸도 소문이 난다. 승진을 위해서 교감 선생님은 특별히 그 선생님을 아끼셨다. 어쩌면 나는 그때 내가 알던 교사의 직장 생활의 숨은 모습을 보게 되었다. 승진을 꿈꾸면 가랑비에 젖은 나뭇잎처럼 승진을 좌지우지할 사람에게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일개 기간제 교사였는데도, 아빠가 경찰서장이라는 이유만으로 교장선생님의 사랑을 받았었다는 것을.


2. 외국인도 다를 게 없다. 직장은 직장.


 기간제 교사를 하면서 그들만의 세상에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을 여러 번 느낀 후 나는 내가 그 리그에 들어가고 싶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외국에서 살다 와서 그런지, 나는 그 위계질서가 너무나도 적응되지 않았다. 아이들을 진정으로 생각하고 실력 있는 교사로서의 길을 가는 교사와 승진을 위해 기꺼이 가랑잎이 되어 가는 부장교사들의 괴리. 능력 있는 기간제 교사는 딱 그것일 뿐 똑같이 일해도 방학을 갖는 것을 황송해해야 하거나 재계약을 걱정해야 하는 불안정한 고용을 늘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러던 차에, 제주도에 국제학교가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이거다! 내 능력을 인정받을만한 곳!" 외국 학교는 뭔가 다르겠지. 아무래도 국제학교니 영어로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는 것은 힘들겠구나 싶어 나는 행정직원으로 지원했다. 기간제 교사였을 때 했던 문서 작업이 도움이 될 줄이야. 뭐든 배우면 쓸 일이 있는 법. 국제학교 교사의 인사를 담당하는 직원이 되어서 나는 교사들의 직장생활을 가까이서 관찰할 기회가 생겼다. 그들이 어떤 자격이 있고 어떤 경력이 있으며 어떻게 교사가 되었는지 나는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SLT( Senior leader teacher) 미팅에 참여해 회의를 하고 교장선생님과 함께 교사 채용 박람회에 출장을 가면서 나는 아주 가까이서 국제학교의 생태를 학습했다. 이곳도 한국의 학교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정치가 존재한다. 국제학교의 교사는 대부분 2년 혹은 3년의 계약을 반복한다. 때에 따라 1년 계약을 허가해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2년이 기본이다. 새로 생긴 학교가 있다면 그 학교에 교장이 먼저 채용되고 함께 재직할 교사를 채용하는 것에 관여하는데, 일단 안면이 있으면 안전한 출발을 하게 된다. " 너 이 학교에 와서 함께 근무할래?"가 가능하다. 교사의 기본적인 자격을 갖추고 있다면 교장의 추천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헤드 티처가 되거나 SLT가 되면 SLR ( Senior learder responsibility)을 받는데, 학교에 따라 다르지만 타이틀을 달고 책임을 갖게 된다는 의미로 일 년에 만 달러의 수당을 더 받게 된다. 능력이 뛰어나거나 정치가 뛰어나거나. 어느 직장이든 존재하는 국 룰이 국제학교 교사의 직장인 국제학교에도 존재한다.


나는 제주 국제학교의 경력을 더해 베트남의 국제학교 교사가 되었다. 행정직원은 자녀 무상 교육이나 거주지 무상 제공, 항공편 제공 등의 특혜가 없다. 여기서 또 다른 차별을 느낀 나는 내가 교사가 되어야겠다 생각했고 각고의 노력 끝에 자녀 무상교육을 제공 받을 수 있는 교사가 되었다. 국제학교에서 한국인으로서 교사가 되는 길은 그리 많지 않다. 국어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 통역과 번역을 담당하는 리에종 교사, 혹은 운이 좋은 경우 EAL( 영어 보조 교사) 및 도서관 사서로 채용되는 경우도 있다. 훌륭한 영어는 기본이고 학교의 환경에 fit 한 사람이 채용된다.


직접 교사가 되어 보니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교사도 직장인이며, 직장인은 지킬과 하이드 두 얼굴은 기본, 빙그레 00이 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직장 상사에 대한 예의를 중시하는 한국인으로 외국인과 근무를 해보면 때로는 저렇게 이야기해도 돼?라고 생각되는 위기의 불꽃이 튀는 상황을 종종 목격한다. 그러나 앤드 오브 더 데이, 그들은 다시 하하호호할 수 있는 사이가 된다. 한국 같으면 어림없는 소리. 어디 감히 교장한테 그렇게 말을 하고도 저렇게 다시 사이좋은 동료가 될 수 있나 싶은데 그들의 처세술은 나는 모르는 비법이 있는 듯했다.


3. 국제학교 교사가 본 승진의 의미


국제학교에서의 승진은 열심히 일하고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각 디파트먼트의 헤드가 되던가, 초중등 코디네이터가 되는 것, 아니면 디퓨티 헤드( 교감급)가 되는 것이다. 코디네이터란 이름이 정수기 관리자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각 학교의 커리큘럼 계획, 운영, 학교의 전반적인 운영을 담당하는 최고 부장교사급이다. 이 교사는 헤드급 경력이 꽤 오래 있어야 하고 커리큘럼에 대한 지식이 뛰어나야 한다.


각 디파트먼트마다 헤드 교사가 있다. 랭귀지 디파트먼트, 수학 디파트먼트, 과학 디파트먼트 등 각 분과의 장을 맡는 수석 교사가 바로 일반 교사가 할 수 있는 승진이다. 학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헤드가 되는 경우 약간의 수당이 지급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다음 직장에 지원할 때 레주메에 한 줄을 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국제학교의 채용은 레퍼런스가 반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레주메와 레퍼런스는 채용과 직결되는 중요한 서류이다. 헤드 경력이 있는 경우 다른 학교에 채용이 우선시될 수 있고 급여 협상 시 유리할 수 있다. 이러한 경력이 쌓이면 코디네이터가 될 수 있고 디퓨티 헤드 더 나아가 헤드가 될 수 있다.


작년 코디네이터 선생님이 갑자기 그만두게 되면서 나는 랭귀지 코디 서포트 자리를 제안받았다. 랭귀지 디파트먼트에는 베트남어, 프랑스어 선생님과 국어 선생인 내가 있는데,  분과의 헤드가  것이다. 누군가의 부재가 나에게 기회로 오는 것을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20  핑크 판다 교감선생님이 떠올랐다. 불합리한 일을 말하지 않고 참아내는 인내로 얻은 자리를 아등바등 지키려는 모습으로 보였던  교감 선생님이, 내가 생각했던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열심히 일하고 능력을 인정받아 교감이 되어  문제없이 학교를 운영해 나가려 애쓰는 모습을 내가 쉽게 판단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국제학교도 교사의 직장이다.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것이 다인 교사의 승진은 멀고 먼 일일 수도 있다. 아니 관심 밖의 일일 수도 있다. 승진한 교사들이 모두 비에 젖은 가랑잎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승진해 보고 깨닫게 되었다. 나는 다만 내 할 일을 열심히 하고 누군가의 편에 서지 않았으며 빙그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였다. 운이 좋았다는 말은 성공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 했던가, 나는 성공 아닌 성공의 자리에 서서 운이 내게 왔다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승진은 모든 이에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지만, 열심히 일한 뛰어난 자가 받아야 할 인정(recognition)이라고 생각한다. 국제학교 교사도 승진 앞에 가랑잎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어디든 그렇듯이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다기보다, 인정받도록 뛰어나게 일을 하는 사람들이 조직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멀고 먼 일일 지언정 나는 오늘도 내 할 일을 하고 공부를 한다. 끝없는 배움의 여정 중 잠깐 얻은 물병으로 목을 축이고 그저 묵묵히 교사의 길을 간다. 그저 물병인 승진에 목메지 않는다. 내 마른 목을 적셔줄 물병은 다른 곳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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