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는 우리 삶에서 가장 복잡하고 때로는 가장 큰 고민거리를 안겨주는 영역이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원하는 것, 기대하는 것, 그리고 상처받는 지점이 모두 다르다. 그 복잡한 방정식 속에서 나는 의외의 장소, 의외의 사람을 통해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지금 일하고 있는 부서 상사 S는 소위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그에 대해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얘기들이 있었다.
"무서워. 혼나는 것 같아."
"자기 얘기만 다 맞고 남들은 다 틀렸어."
"폭언이 너무 심해."
"자기 혼자 잘났어."
"사람 귀한 줄 모르지."
부서를 옮기며 나는 각오를 다졌다. S와 오며 가며 인사하거나 협조가 필요한 프로젝트에서 스쳐가듯 함께 한 적도 있었지만 내가 받은 느낌은 좀 달랐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힘들다고 말하는 것처럼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진 않았다. 그래도 직접적으로 업무 지시를 받으면서 일해야 하는 부서원이 된다는 것은 상황이 달라도 한참 다른 상황이니 걱정되고 긴장하는 마음이 있었다.
부서원으로 S를 처음 대면한 날, 편하게 생각하려 해도 어깨는 자꾸 딱딱해지는 것 같고 괜히 각이 잡혔다. 그렇지만 긴장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는 인간적인 나에 대해 궁금해하고 초반 업무 갈래를 잡아주어 어떤 것부터 익히면 될지 잘 안내해 주었다. 그 후로도 그와 호흡을 맞춰 일을 해나가면서 나는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물론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면이 분명히 있긴 했다. 회의에서 종종 혹은 자주 언성을 높이는 경우도 있었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장황하게 말하고선 누군가의 얘기가 조금이라도 길어지는가 싶으면 왜 이렇게 말을 길게 하냐고 주의를 줬다. "자기 얘기만 다 맞고 남들은 다 틀렸다"는 평가처럼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폭언이 심하다"는 평가대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에 대해 직설적이고 공격적인 말을 뱉어내기도 했다.
나 역시 회의에서 업무 처리에 대해서 지적당하는 일을 피해 갈 순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에게 어떤 말을 들어도 나는 거의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마음에 상처를 입곤 했는데 나는 지적을 당해도 심지어 욕을 먹어도 오히려 씩씩하게 대답을 잘하고 내 의견을 낼 수 있었다. 동료들이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신기해했는데, 나조차 신기했다.
'왜 괜찮지?' 하루는 내가 어떻게 이렇게 담담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됐다. 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제일 큰 이유는 나는 S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 적절한 내 페이스대로 일을 할 수 있었고, 그가 나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높게 평가하든 낮게 평가하든 영향받지 않을 수 있었다.
두 번째는 그에 대한 기대가 처음부터 없었단 것이다. 워낙에 나쁜(?) 얘기들을 많이 들어서 그런지 애당초 각오를 단단히 했고, 각오를 하고서 막상 그를 만나보니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좋은 사람이었다. 기대하는 마음이 없는 상대에게는 오히려 좋은 점들만 부각되어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실제로 S에게서 발견한 장점들은 의외로 많았다. 그는 자신의 성질에 못 이겨 그 자리에는 필터 없는 말을 쏟아낼지언정, 그 시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시간만 잘 지나가면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반대되는 의견을 내더라도 깊이 경청해 주고 거기에 대해서 아예 뒤끝이 없었다. 이 뒤끝이 없다는 부분이 굉장한 장점이었는데, 심지어 누군가 본인의 험담을 했다는 걸 알고 있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을 똑같이 미워하거나 배척하지 않았다. 난 이 부분이 정말 굉장한 내공이라고 느껴졌다.
"사람 귀한 줄 모른다"는 평가와 달리, 다른 사람들보다 파르르 하는 다혈질은 있을지언정 사람을 두고 꽁해있지 않은 그 쿨함이 좋았다. 그건 그가 앞과 뒤가 같은 사람이라는 방증이라 묘한 심리적 안정감을 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솔직히 업무 능력 측면에서 배울 점이 참 많았다. 뒤에서 수군수군 욕을 하는 사람들도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는 건 실무력은 최고라는 점이었다. 본인이 10가지의 일을 해낼 수 있으니 모두가 그런 줄 알고 요구한다는 게 문제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막상 함께 일해보니 10가지를 해볼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지 모든 것을 해내라고 압박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 말을 했던 사람들은 S에게 잘 보이고 싶었는데 주어진 미션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스스로 받았던 압박감을 그가 자신을 압박했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됐다. S는 마음만 먹으면 작정하고 배워볼 수 있는 능력들이 참 많았다.
남들은 입을 모아 상대하기 어렵다는 대상과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게 관계를 맺어가니 인간관계의 어떤 해답을 찾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키는 간단했다.
첫째, 관계에서 독립된 존재로 있을 것. 누군가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다. 둘째, 기대하지 않을 것. 상대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도 않지만 되지 않더라도 꼭 나쁠 것이 없다.
이 두 가지만 쥐고 있어도 인간관계가 괴로울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원래 인생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원칙에 대한 깨달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잘 적용되지 않는 관계도 있을 수밖에 없다.
내게는 숙제처럼 가지고 있는 관계가 있는데 회사 동료 H와의 관계가 그렇다. 얼마 전 H와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었다. 회의 전부터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이전에도 H와 일할 때마다 책임 소재를 놓고 미묘한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회의가 시작되고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검토하던 중, H가 지연된 일정에 대해 언급했다. "이 부분은 당신이 먼저 처리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데, 아직 완료가 안 된 것 같네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그 업무는 원래 공동 책임이었고, H도 자신의 부분을 완료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부분은 우리 둘 다 책임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신도 A와 B 부분을 마무리하지 않았잖아요"라고 말하며 내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언성을 높였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자 H도 "내 파트는 90%가 완료됐고, 남은 10%는 당신의 작업이 끝나야 할 수 있어요. 이건 기본적인 업무 순서 아닌가요?"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식의 대화는 10분 넘게 이어졌고, 나는 점점 더 감정적으로 변했다.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말을 왜 저렇게 하지?' '자기는 똑바로 하지도 않으면서 나한테만 뭐라고 하네. 너나 잘하세요.' '내가 왜 저 얘기를 들어줘야 하지?' '저 징징거림을 왜 들어줘야 하는 거지?'
결국 그 회의는 누구도 만족스럽지 않은 채로 끝났고, 냉랭한 분위기가 팀 전체로 퍼져나갔다. 회의 후에도 내 마음은 한참 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잘못된 것은 H라고 생각했고, 나는 정당한 분노를 표현했을 뿐이라고 자위했다.
오히려 걱정했던 S에게는 되는 일이 H에게는 되지 않았다. 누군가 내 상황을 놓고 본다면 오히려 H와의 관계가 더 원만하기 쉬운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모순된 현상을 생각해 보니 그 원인이 명확해졌다. 나는 S에게는 아무 기대가 없었지만, H에게는 '공정하게 일을 분담하고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기대가 있었다. 또한 동료 관계에서는 동등한 입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바로 이 기대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나의 감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 주변의 다른 인간관계들 중 잘 풀리지 않는 것들이 있다. 친한 친구와 자주 작은 오해로 다투는 경우, 가족과의 갈등 등이 그렇다. 이런 관계들을 분석해 보면 대부분 나는 그들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친구에게는 내 마음을 알아주길 기대했고, 가족에게는 나의 선택을 지지해 주길 바랐다. 또한 그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결국 인간관계의 많은 스트레스는 상대가 아닌 내 마음가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에게 잘 보이려는 욕구를 내려놓고, 지나친 기대를 하지 않을 때 오히려 관계가 편안해지고 상대의 다양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이 깨달음을 실제로 적용하기 위해 몇 가지 구체적인 방법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1.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잠시 거리를 두는 연습을 한다.
2. 상대에게 기대하는 것들을 노트에 적어보고, 그것이 정말 필요한지 혹은 내가 일방적으로 원하는 것인지 분석해 본다.
3.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한다. 단점만 보거나 장점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복합적인 모습을 받아들인다.
4. 나의 가치는 타인의 평가에 달려있지 않다는 점을 생각한다. 나의 행복과 자존감이 누군가에게 잘 보이는 것에 의존한다면, 그 관계는 이미 불균형한 상태이다.
5.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 연습을 한다. 상대방의 생각, 감정, 행동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6. 갈등이 생겼을 때 '내가 무엇을 기대했기에 실망했는지' 자문해 본다. 이를 통해 자신의 기대치를 파악하고 조정할 수 있다.
이런 방법들을 통해 나는 조금씩 어떤 관계에서 불편한 감정과 괴로운 마음을 느낄 때 내가 집착과 기대가 있었구나 하는 걸 알 수 있게 됐다. 지금도 그렇다는 걸 알게 됐다는 것이지 마음은 마음대로 일어날 때가 많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S와의 관계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상기하며 다시 시도한다.
진정한 인간관계의 자유는 상대방을 바꾸려는 시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기대와 욕구를 인식하고 조절하는 데서 온다. 이것이야말로 관계에서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타인과 진정으로 연결될 수 있는 출발점이다. 가장 힘들 것이라 예상했던 관계에서 오히려 가장 큰 통찰을 얻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이제 나는 이 깨달음을 내 삶의 모든 관계에 적용해보려 한다.
인간관계는 결국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시작된다는 진리를 S라는 의외의 스승을 통해 배웠다. 그리고 그 깨달음으로 인해, 나는 매일 조금씩 더 자유로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