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순간에서
드라마 '중증외상센터'를 봤다. 사실 의학 드라마를 좋아한다. 게다가 요즘 한창 인기가 많다고 해서 보기 시작했는데 중간에 끊을 수 없을 정도로 몰입하며 봤다. 아마도 거기 나오는 의사들이 '진심'으로 환자를 대하는 모습 때문이 아니었을까.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극 중 주인공인 백강혁 교수와 양재원 의사가 교통사고 환자 수술을 하는 장면.
양재원이 말했다. "이대로 닫는 게 맞지 않습니까, 교수님? 그래 봐야 몇 시간입니다."
백강혁은 이렇게 대답한다. "의학은 확률 싸움이야. 100프로 죽으라는 법은 없어."
그 말에서 생명을 대하는 진정한 존중이 느껴졌다. 그건 한 사람의 생명과 그의 삶에 대한 진심 어린 태도였다. 그때 문득 나에게 묻게 됐다. 나는 내 삶의 순간들을 진심으로 살고 있을까? 삶의 매 순간을 밀도 있게 살아가고 있을까?
아침에 눈을 뜬다. 손은 자동으로 휴대폰을 찾는다. 습관이다. 특별히 확인할 메시지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몇 가지 앱들을 열었다 닫는다. 이게 내 하루의 시작이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정말 오랜만에 본 친구였는데 별로 기억에 남는 대화가 없다. 왜일까. 생각해 보니 친구의 얘기를 들으면서도 내 머릿속은 늘 다른 생각이 둥둥 떠다녔다. 친구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듣고 있지 않았던 거다. 귀만 열려 있었지 마음은 다른 데 가 있었다.
집에 돌아와 생각했다. 나는 진짜 친구를 만난 걸까? 아니면 그저 같은 공간에 몸만 있었던 걸까?
진심으로 산다는 건 '지금 여기'에 온전히 있는 것 같다. 몸과 마음이 한 곳에 있을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요즘 내가 얼마나 자주 몸과 마음이 다른 곳에 있는지 느껴진다. 회의를 하면서 다른 업무를 본다. 밥을 먹으면서 영상을 본다. 친구와 대화하면서 남자친구 생각을 한다. 남자친구와 있으면서 회사 일을 생각한다.
찰나의 순간에도 지금 현재에 살고 있는 게 아니다. 과거와 미래를 왔다 갔다 한다.
동시에 여러 일을 처리하는 '멀티태스킹'은 현대인의 미덕으로 자리 잡은 지 한참 됐다. 그게 능력 있는 사람의 표식인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진심을 담을 수 있겠는가. 그건 사실 '분열된 의식'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우리 뇌는 한 번에 한 가지 일에만 충분한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고 한다. 분산된 주의력은 결국 모든 일에 대한 집중력 저하로 이어진다. 끊임없이 다음 일정, 다음 목표, 다음 성취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언제나 다음 단계를 위한 징검다리가 된다. 그렇게 매 순간이 미래를 위한 수단이 된다.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현재의 경험은 희미해져 그 의미가 퇴색된다.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고래를 들었다. 하늘이 너무 예뻤다. 해가 지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사라진 후, 밝음과 어둠이 균형을 이루는 그 짧은 시간. 하늘은 회색, 남색, 보라 그리고 희미한 붉은빛이 층층이 쌓인 그림이 됐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그때 그 순간 우연히 하늘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그 장면을 놓치고 말았을 거다. 그 순간 나는 온전히 거기 있었다. 스마트폰도, 일에 대한 생각도, 걱정도 없이. 오직 지금 이 순간과 하늘만이 있었다. 1분 정도 됐을까. 그 시간이 하루 중에 가장 선명히 내 마음에 남았다. 진심이 함께 했던 그 1분이 그냥 몸만 존재했던 몇 시간보다 더 의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늘을 바라보던 1분은 내게 '지금 여기'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몸과 마음, 시각과 감정,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일치되는 그 충만함. 다른 어떤 성취감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놀라운 건 그런 경험을 위해 특별한 장소나 상황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일상의 작은 순간에도 우리가 충분히 깨어있다면 그런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다.
진심으로 산다는 건 어떤 모습일까.
진심은 솔직함이다.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과 내면의 생각을 인정하고, 때로는 그것을 표현하는 것. 나 자신에게 정직한 것이 첫걸음이다.
진심은 몰입이다. 하고 있는 일에 완전히 집중하는 것. 요리를 할 때는 요리에, 대화를 할 때는 대화에, 일을 할 때는 일에, 잠을 잘 때는 잠에, 샤워를 할 때는 샤워하는 것에 집중한다.
진심은 관심이다.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감정에 공감하며, 진정한 소통과 연결을 추구하는 것. 이건 단순한 예의와 사교를 넘어선 깊은 교류다.
진심은 일치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실제 행동이 일치할 때, 우리는 내적 갈등 없이 더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
내 일과 중에 일기 쓰는 시간이 추가 됐다. 오늘 내 하루에 얼마나 진심을 담아 살았는지 돌아본다. 무겁지 않게 가볍게 살펴본다. 흘러가는 대로 지낸 하루는 막상 뭔가 쓰려고 하면 기억나는 게 없다. 아침에 무얼 먹었는지, 지하철에서 무엇을 봤는지, 동료와 어떤 대화를 했는지, 그날의 공기는 어땠는지, 길가의 색감이나 느낌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곳에 있었지만 진짜 존재하지는 않았던 시간들. 그런 시간이 참 많다.
드라마 속 백강혁은 아마 자신이 살린 환자의 얼굴을 기억할 것이다. 매 순간 수술에 최선을 다하는 그는, 순간을 진심으로 살아냈기 때문이다.
일기를 쓰며 내 하루를 살펴보는 것 말고도 진심으로 사는 삶을 위해 작은 실천들을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몸의 감각을 느낀다. 하루가 한결 여유롭고 다르게 시작된다.
밥을 먹을 때는 밥 먹는 것에 집중하는 연습을 한다. 음식의 맛과 향, 식감을 느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풍요로운 기분이다.
대화할 때는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고, 그의 말에 집중하며 정말로 듣는다.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내 말을 준비하느라 그의 말을 놓치지 않는다. 흘러가는 대로 할 말이 있으면 하고 대화의 맥락이 이미 지나갔다면 그걸로 그만이다.
실천해 볼 수 있는 것들이 여러 가지다. 마음과 몸이 함께 있는 순간들을 그렇게 차츰 늘려가볼 예정이다.
오늘보다는 내일, 내일보다는 모레. 그렇게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내 삶의 매 순간에 진심을 담을 수 있겠지. 지금보다 조금씩 더 깨어있기를, 조금 더 현재에 머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