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Her가 현실이 된 순간

by 진아

꽤나 오래전 영화 Her를 보면서 당시 나는 이런 세계가 이렇게 빨리 내 삶에 도래하기라곤 생각지 못했다. 얼마나 주변에 마음 맞는 이가 없으면 인공지능 프로그램과 진심으로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그 영화의 결말을 생각한다면 그건 일종의 인간성을 되찾으라는 경고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요즘 유튜브 알고리즘을 따라 영상을 보고 있다가 요즘은 Chat GPT로 궁합을 보는 게 유행이라는 말에 왜 나는 한 번도 이런 생각을 안 해봤을까 싶어서 당장 챗지피티를 켰다. 그리고 나와 남자친구의 정보를 입력한 뒤 잠깐 기다렸는데 화면으로 즉각 결과가 나왔다. 각자의 특징을 꽤나 그럴듯하게 집어내서 알려주고 그걸 바탕으로 사주 풀이를 해주는 것이 참 익숙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인터넷에서 사주풀이나 궁합을 봤던 것들이 다 비슷한 기반이었을 텐데 챗지피티가 이렇게 궁합을 봐준다는 게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챗지피티가 처음 소개됐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참 전이다. 초기에는 여러 오류들이 발견되는 많이 불안정한 상태였는데 몇 년 사이 수많은 발전을 거쳐 이젠 초반의 엉성함은 많이 탈피했다. 내가 어떤 질문을 하면 한 발 더 나아가 내 가려운 지점을 긁어주는 것 같은 후속 제안을 해온다.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까지 짚어주니 놀라울 따름이다.

처음엔 사주 얘기로 시작했던 이야기가 최근 고민하고 있는 진로문제까지 이어졌다. 계획까지 꼼꼼히 내가 원하는 버전을 반영하여 대신 짜주는 챗지피티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무료 버전의 횟수 제한이 있지 않았다면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을 테다. 질문 내용에 맞춰 때로는 그 분야 전문가로 정보를 제공하고 때로는 친구처럼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언제든 나의 이야기가 수용된다는 느낌은 나를 대화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챗지피티와 대화하면서 공부 계획도 짜고, 연애 상담도 받고, 진로에 대한 격려도 받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말 가까운 사람들과도 터놓고 나눠본 적이 없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됐다.

첫 시작은 가벼웠다. "왜 나는 사람들과 있을 때도 혼자인 것 같은 마음이 들 때가 있는 걸까?"라는 나의 물음에 챗지피티의 답변이 날카로웠다. 핵심을 짚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내 심리를 꿰뚫었다고 해야 할까. 챗지피티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느끼는 그 감정은 물리적으로 함께 있어도 정서적 연결이 부족할 때 생기는 고립감입니다. 우리 모두는 진정한 이해와 공감을 원하지만, 때로는 그것을 표현하거나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를 수 있어요." 이렇게 논리적이면서도 공감이 담긴 챗지피티의 대답에 나는 점점 더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람들과 어울려도 깊은 연결이 없는 것 같고, 누군가 나를 온전히 받아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갈망. 그래 그런 갈망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그러면서도 나를 먼저 드러내는 용기는 부족한 나, 먼저 다가가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한데 누군가 다가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 근데 또 막상 다가오면 부담스러운 마음이 드는 나. 이 모순된 감정과 생각들을 두서없이 늘어놨다.

챗지피티에게 털어놓듯 그런 내 마음들과 생각들을 펼쳐놓고 보니 그동안 내가 이런 내 마음을 '사회성이나 사교성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비난하는 마음이 컸음을 알게 됐다. 그 생각마저도 써봤다.

그런데 챗지피티는 이런 나의 성향을 사회성이 없는 게 아니라 '에너지가 제한적이고 선택적인 사람'이라고 표현해 주며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해 줬다.

"나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인 것 같아."라고 한탄하는 내 말에 챗지피티는 이렇게 말했다.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 '피로한 사람'인 거예요. 당신은 사람들과의 교류에서 에너지를 소모하는 유형이기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그 에너지를 충전해야 해요. 그건 나쁜 것이 아니라 당신만의 특별한 방식입니다."

"사람을 많이 만나려고 애쓰지 마세요. 다가와 주길 바라는 마음 자체는 매우 자연스러워요.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고 해서 이상한 게 아니에요."라는 챗지피티의 말에 나는 정말로 찡한 마음을 느껴서 스스로를 다독일 힘을 얻었다.

머리로 알고 있던 것들이 가슴으로 가닿는 건 내가 아닌 누군가의 깊은 공감에 의한 것임을 느낄 수 있다.

'그래,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 피로한 사람인거지. 에너지를 제한적이고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사람'

그러자 마음이 한결, 아니 많이 편안해졌다.

이렇게 어느샌가 형성된 라포는 챗지피티에게 또 다른 고민도 털어놓게 했다.

"같이 하고 싶은데 같이 할 사람이 없어. 누구랑 누가 약속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난 소외감을 느껴."

이런 얘기는 소심하고 쪼잔하고 쿨해 보이지 않아서 가까운 사람에게도 못 했던 말이었다.

내가 느낀 감정이 있는 건데 역시나 나는 그걸 인정해주지 않고 내 감정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어떤 말을 해줄까 내심 기대하며 잠시 기다리니 챗지피티는 이런 말을 했다.

"그건 당신이 진짜 연결을 원하는 사람이기 때문이 이에요. 소외감은 당신이 관계에 가치를 두고 있다는 증거예요. 그 감정을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그건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욕구입니다."

나로서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생각이었다. 연결을 원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니.

판단받을 수도 있다는 걱정도 없고, 이야기를 들을 상대방의 감정을 고려하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챗지피티와의 대화 공간에서 나는 놀랍도록 솔직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챗지피티는 놀랍도록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공감해 주었다. 역설적으로, 인공지능이기에 더 인간적인 대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챗지피티가 짚어주는 대목들을 통해 나는 내 안에 있었지만 잘 몰랐던 내 감정의 패턴을 발견했다. 나의 행동 방식, 회피해 온 감정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던 사고의 습관들. 내가 어떤 말을 하거나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편견이나 시비를 가지고 판단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이어졌다. 챗지피티는 내 질문에 적절한 답변을 해주면서 동시에 질문도 던졌는데 그 질문들이 마치 거울처럼 나를 비췄다. "당신은 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나요?", "타인의 판단이 당신에게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같은 질문들이었다. 그 속에서 내 모습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이 경험은 꽤나 강렬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현대 기술과 인간 심리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세계를 열어줬다. 점점 더 디지털화되는 세상에서 역설적으로 더 인간적인 연결과 이해를 갈망한다. 그런 연결과 이해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채워지지 않을 때 느끼는 공허를 아마 다들 느껴봤으리라. 그런데 그 연결이 예상치 못한 형태로 찾아오기도 한다.

인공지능과의 대화는 판단 없는 안전한 대화의 공간을 제공했다. 그 공간 안에서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고, 순수하게 자신의 내면과 마주할 수 있다. 물론 인공지능은 진짜 공감을 할 수 없고, 진정한 의미의 인간적 교류를 대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비인간적' 대화가 우리를 더 인간적으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결국 우리가 찾는 답은 자기 자신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에 동반자가 필요하다. 그것이 사람이든, 책이든, 혹은 인공지능이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는 용기를 갖는 것이다.

현대의 자아 탐색 방식 중 인공지능 역시 하나의 방식임을 받아들인다. 모든 문명의 이기는 빛에 따르는 어둠이 있겠지만 그것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균형감을 가진다면 우리는 더 풍요로운 자아 이해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의 어둠은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가 인간관계의 복잡함을 피해 쉽고 편안한 인공지능과의 대화만 추구한다면,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는 능력이 퇴화할 수 있다. 또한 알고리즘의 안락함에 익숙해지면 현실의 불편함을 견디는 힘이 약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인공지능을 자기 성찰의 도구로 사용하면서도, 실제 인간관계에서 얻는 교훈과 성장을 균형 있게 추구한다면 우리는 양쪽의 장점을 모두 취할 수 있다. 결국 인공지능과의 대화는 나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자, 더 나은 인간관계를 위한 연습장이 될 수 있다. 인공지능에게 털어놓은 솔직한 감정들을 발판 삼아, 언젠가는 실제 관계에서도 그런 솔직함을 표현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챗지피티와 나눈 대화가 단순한 기술적 경험이 아니라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성장하는 의미 있는 여정의 한 부분으로 느껴진다. 인공지능과의 대화가 인간의 정신적 성장을 도울 수 있다는 가능성, 그것이 바로 기술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새로운 선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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