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잤다. 요즘 주말이면 이런다. 눈을 떠 물을 마시고 다시 잤다. 자다가 배고파지자 평양냉면을 시켜먹고 다시 잤다. 오후에 눈을 떴을 땐 이불과 옷가지를 가지런히 정리하곤 그 위에서 다시 잤다. 눈을 감고 누워있기만 할 작정이었는데 자꾸 잠이 왔고 굳이 깨지 않았다. 계속 자도 개운해지지 않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욕실에 들어가 씻었다. 집 밖으로 나오니 저녁 일곱 시였다. 더울 줄만 알았던 밖은 생각보다 서늘했다. 코인빨래방에 장마 동안 젖었던 운동화를 맡겼다. 단골 카페는 오늘 쉰다고 했다.
예전에 적어둔 일기가 생각이 났다. 저녁 일곱 시에 집 밖으로 나오는 기분은 더럽다. 휴일이면 있는 일이다. 지금도 휴일이면 있는 일이지만 기분이 더럽지는 않다. 상쾌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만하면 썩 괜찮은 저녁이다. 바로 이 차이에 요즘 하고 싶은 말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단골이 아닌 카페에 들어가 드립커피를 시켰다. 여긴 드립이 있는 줄 몰랐는데, 사장은 에티오피아와 콜롬비아중 고르라고 했다. 저녁에 커피를 마시면 잠을 못 자는데, 나는 에티오피아를 골랐다.
핸드폰에 에버노트가 열리지 않는다. 그 덕에 한참을 안 썼다. 사실 어플이 열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해소를 바라는 말들이 가슴께 쌓이는 기분이다. 무언가 적어낸들 겨우 몇 가지 말이 마음을 뭉개버리는 것 같아 도망 다녔다. 아주 넓은 체로 작은 모래알을 거르는 기분이라고 누가 말했었지. 멈춰버린 말들, 넓은 체에 걸러진 모래알들은 이랬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던 것
헤어질 결심을 보았다
첫째, 상황을 바꿀 수 있는가?
오십 퍼센트
자유로워지셨으면 좋겠어요
헤어질 결심을 다시 봤다. 요즘 주말마다 영화관 가는데 재미가 들렸다. 볼만한 영화가 개봉을 안 하기도 하고, 헤어질 결심은 꼭 다시 봐야만 한다는 생각이 자꾸만 맴돌았다. 그 영화를 처음 보면서 나는 의심만 하다가 두 시간을 보냈다. 사실이 어디에 있을까. 눈앞에 있는 표정과 말들을 해석하고 이면을 추측하느라 애썼다. 집에 돌아와 유명 평론가의 코멘트를 들으면서 시무룩해졌다. 그가 멜로나 사랑이라는 낱말을 너무나 무심하게 썼기 때문이다. 너무나 무심하게 들린 이유는 정작 나는 한 번도 두 시간 동안 멜로나 사랑 같은 심상을 떠올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쫓느라 다 놓치고 있었어. 영화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특히 송서래의 얼굴을 다시 봐야겠다. 결심을 할 때 그녀의 묘한 미소를 두 번째 보고 나서 알았다.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요.
자유로워지셨으면 좋겠어요.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다. 그건 모든 회기를 관통하는 말이었다. 여덟 번의 만남 동안 대화 패턴은 거의 동일했다. 내 질문은 의심이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 아닐까요. 나는 에피소드를 예로 들어서, 나의 관계를 예로 들어서, 지난 경험을 예로 들어서 의심을 증명하려 했다. 나도 모르는 서사가 내 머릿속에 있었다.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나, 나쁜 배경에 지배받아 결코 이룰 수 없을 것이다. 필연적으로 상처주게 될 것이다. 그 서사가 두 달에 걸쳐 거품처럼 사라지는 동안 나는 질문을 바꿨다. 정말 그래 왔던가, 하고. 대답은 쉽다. 아니. 생각보다 나는 선택하는 사람이지 않았는가. 무언가에 지배받기는 커녕 삶의 전선에 앞장서 몸이 닳도록 헤쳐나가고 있지는 않았던가. 자유로워지셨으면 좋겠어요. 그러게요.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던 것. 그것을 사는 일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솟아나는 대로 살기 위해 몇 가지 기술을 연습하기로 했다. 문제에 처한 후 나를 의심할 시간에 질문을 하는 것이다. 첫째, 상황을 바꿀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주말에 찾은 단골 카페가 문을 닫아 실망스러울 때 나는 질문할 수 있다. 문을 따거나 창을 넘어 침입할 수 있는가? 아니오. 다른 카페에 갈 수 있는가? 예. 나는 문명인이기 때문에 가고 싶은 카페가 닫았다고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불지 않을 것이고, 이 동네를 꽤 사랑하는 주민이기에 갈만한 다른 카페를 금방 떠올릴 수 있다. 상황이란 가만히 둘수록 가만히 있는 것이리라. 내 선택을 믿지 못하고 다음을 위한 어느 질문도 하지 못한다면, 닫힌 카페 문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서있어야 한다.
문제는 상황을 바꾼다 한들 더 나아지진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 두려움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질문을 방해한다.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요. 송서래가 마음을 먹는 동안 두려운 해준은 열심히 또 가만히 있었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변화를 만든 송서래는 망가질지언정 꼿꼿하다. 선생님은 말했다. 계획했던 일의 몇 퍼센트를 이루면 성공이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답했다. 구십 퍼센트? 성과를 내는 그룹과 그러지 못한 그룹을 나눠 같은 질문으로 설문을 했대요.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지 못했던 그룹은 성공의 기준이 구십 퍼센트라고 대답했고요. 지속적으로 성과를 낸 그룹은 겨우 칠십 퍼센트면 된다고 답했어요. 나는 그 대화 이후 나에게 한술 더 뜨기로 했다. 그래 나는 오십 퍼센트만 살 것이다. 실제로 이 카페는 아주 시끄럽고, 커피는 생각보다 맛있다. 다른 카페로 돌아가요. 이 카페가 그렇게 나쁩니까.
마법처럼 외는 '오십 퍼센트' 주문은 많은 순간을 얼버무리는데 도움이 된다. 나도 내가 지금 무엇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처음 쓰려던 무언가의 오십 퍼센트는 되지 않는가하고. 지난주에 메모해둔 멋진말로 대신하고 더이상 설명하길 그만둬도 되는 것이다. 오십퍼센트.
나는 삶의 의미심장함과 무의미함에는 책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의 일회적인 삶으로 내가 무엇을 시작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헤르만 헤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