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B급의 미술관
뭐가 그리 진지한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턱을 아래로 바싹 끌어당기며 눈앞에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이 있다. 범죄 현장을 추적하는 프로파일러처럼, 하나의 단서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심산이다.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하게 미술품을 바라보는 이들은 예술을 즐기기보다 분석하고 해부하고 해체하려 든다. '이 작품의 숨은 의도는 이것이고, 사조는 저것이고, 주제는 그것이다.'말하며, 주변의 사람들을 잔뜩 주눅 들게 만든다. 미술은 원래부터 이렇게 엄.근.진(염격, 근엄, 진지)한 것이었을까?
평생 경박하기 짝이 없는 광고인으로 살아온 나에게, 이건 아주 진짜 근본적인 물음이다. 대체 미술이 뭐라고 이렇게 진지해야 하는 걸까? 광고 한편을 보듯 가볍고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안 되는 걸까?
광고인의 시선으로 보면, 태초이래 모든 예술은 콘텐츠였다. 사실이다. 인류가 라스코 동굴에 벽화를 끄적거리고, 피라미드 내부에 파라오를 그려 넣고, 대리석을 쪼아대며 고대의 올림픽 영웅을 조각하고, 중세 대성당에 벽화를 남길 때 대중은 놀라고, 감탄하고, 찬양했다. 그렇다. 자고로 콘텐츠는 즐거워야 한다.
예술에 고귀함과 숭고함만 있다면 얼마나 맹숭할 것인가? 그런 이유로 예술은 언제나 경박함과 천박함이라는 아주 진.지.한 진보적 가치에 의해 대체되고 발전되어 왔다. 그러니 바라보는 이 역시 가벼운 마음으로 이를 즐기고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미술 美術이란 문자 그대로 아름다운 기술, 아름다움을 만드는 재주다. 영어 art 역시 라틴어 ars에서, 그리스어 techne에서 유래된 것으로 '기술', '솜씨', '장인의 손재주' 정도의 뜻이다. 그렇다. 그 단어 어디에도 엄.근.진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론? 사조? 담론? 개나 줘 버려!
인간은 난자와 정자의 결합에서 태어난다. 잠시 상상해 보자. ‘준비하시고! 출발!’ 수억 마리의 정자가 출발신호와 함께 치열한 경쟁을 하며 난자를 향해 달려 나간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산성비를 맞으며 도중 포기하는 녀석도, 지쳐 쓰러지는 녀석도 있을 것이다. 그뿐인가? 흉악한 대식세포에 잡아먹히는 녀석도 있을 것이다. 온갖 시련과 고초를 이겨낸 맨 앞 선두는 당연히 수억 마리 정자 중 가장 힘센 녀석일 테다. 그렇다. 1인자다. 최소한 우리는 이미 수억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지금의 나로 태어난 거다.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진정한 1등이란 착각은 하지 말자!
실상은 이렇다. 죽을 둥 살 둥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로 앞만 보고 달린 당신은 고개를 들어보고 화들짝 놀란다. 저 앞에 당신보다 강한 경쟁자가 이미 먼저 도착해 난자를 감싼 막을 뚫고 들어가려 안간힘이다. '아! 여기가 끝인가 보오.'하며 포기하려는 순간,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막을 뚫기 위해 온 힘을 쏟아버린 그가 그만 탈진해 쓰러져버린 게 아닌가? 때는 이때다. 비록 2등으로 도착했지만, 약삭빠르고 눈치 빠른 당신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난자에게 쓱 얼굴을 들이밀었다.
맞다. 우리는 생명이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이미 2인자인 셈이다. B급이다. 우리가 그토록 강자보다는 약자의 편에 서려하고, 비극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언더독을 응원하는 이유다. 우리 안의 B급 본능은, 애초에 그렇게 시작된다.
광고를 만드는 일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다. A컷을 찾기 위한 지난한 과정의 연속, 수많은 B컷 중에 가장 뛰어난 A컷을 찾는 과정이 바로 광고를 만드는 작업이다. 그렇지만 완벽한 A컷 뒤에는 잘려나간 고민과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그게 바로 B컷이다. 거칠고 어설프지만, 진실되고 생생하다. 초점을 벗어난 풍경, 예상치 못한 미소, 실패한 시도가 담겨 있다. 그 안에는 우리가 놓치기 쉬운 사람다움과 이야기의 본질이 숨어 있다. 광고뿐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도, 인류의 역사, 문화와 예술도 그렇다. 2인자가 써 내려간 시덥잖은 B컷의 연속이다.
이제 2인자의 B급 시선으로 세상을 보자. 함께 하다 보면 미술 속에 숨겨져 있는 수많은 역사, 문화, 경제, 문학, 브랜드의 이야기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1등이 되지 못했기에 더 날카로운 통찰로 세상을 바라봤다. A급의 그림자 속에서 발견한 새로운 길, 그것이야말로 B급이 우리에게 남긴 진정한 유산이다. 그들의 실패와 도전, 그리고 그 과정에서 피어난 창의성은 오히려 세상을 더 다채롭게 만들었다. B급 시선을 통해 세상을 보면, 우리 역시 세상을 보는 방식을 조금은 다르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B급이었기에 가능했던 진정한 예술의 의미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광고인은 연구가가 아니다. 철저한 실용가다. 그래서 B급의 시선으로 쉽고 거칠고 이해하기 쉬운 편안한 언어로 이야기할 것이다. 너그러운 독자 여러분께서는 새로운 시각의 이야기임을 염두에 두고, 슬그머니 넘어가 주시기 바란다.
이 책은 지금까지 우리가 막연히 엄.근.진하다고 믿었던 미술을 B급의 시선으로 즐겁고 유쾌하게 풀어나간다. 겁낼 것 없다.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극장에서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감상하듯, 이 B급의 미술관이라는 스낵인문 속으로 미술 여행을 떠나보자.
다시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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