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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Apr 30. 2016

10년 전 유럽 여행 - Prologue


예전에 어머니께 여쭤봤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갔어요? 그랬더니 경주, 설악산, 제주도가 아니라 뜻밖에도 서울로 가셨단다. 서울 어디에 갔었냐고 물으니, 남산타워도 올라가고, 명동에서 칼국수도 드셨다고 하셨다. 남산 밑 어느 호텔에서 묶었는데, 아버지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술판을 벌였다는 기억도 떠올리셨다.


지우 지아도 나중에 아빠 엄마의 결혼 전 모습이 궁금할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애들이 태어나기 전, 지영이와 단둘이 갔었던 2007년 8월의 유럽여행을 다시 따라가 보고자 한다. 10년이 훌쩍 지난 여행, 비록 기억이 선명하진 않지만, 당시 사진들과 끄적거린 흔적들을 보면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10년 전 여행, 얼마큼 기억이 날까


2007년 8월 4일부터 8월 11일까지 스위스 취리히, 인터라켄, 로쟌을 거쳐 이탈리아 밀라노 로마까지의 여행. 이 때는 둘 다 삼성전자, 제일기획 5년 차였을 때라, 휴가 일정을 맞추는 게 쉽지 않았지만, 8월 2주 차의 여행은 짐작이 간다. 아이들의 방학을 맞춰야 하는 과장·차장·부장님들이 7월 말, 8월 초 휴가를 집중적으로 신청하셨을 테고, 5년 차 정도 되면 나름 머리가 굵어져서, 그다음 주인 8월 2주 차로 휴가 일정을 잡으면서, 자연스럽게 의욕 충만해서 복귀하실 분들의 ‘손대리, 우리 이제 이런 것들 좀 정리해볼까?’ 주간으로부터 해방을 꿈꿨으리라.


여행 전날이 기억난다. 난 저녁 7시까지 야근을 하면서 할인점 주말 행사를 정리해서 지점으로 뿌린 후, 선릉역 모 미용실에 머리를 깎으러 갔다. 여행 전 날 머리를 깎는 것은 수많은 업무협조 메일들과 엑셀 함수들 속에서 더럽혀진 머릿속을 여행에 맞게 깨끗하게 비우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난 주로 점심때 머리를 깎았기 때문에 저녁 시간 선릉역 근처의 미용실 모습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근처에서 야간조(?)로 일하시는 언니들 10여 명이 걸쭉한 대화를 나누시며 머리를 만지고 계셨다. 물론 껌도 씹고 계셨다. 난 여자 쪽수가 많은 상황에선 몸과 마음이 아주 겸손해진다. 눈을 살포시 깔고 여성중앙 잡지의 화장품 광고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내 차례를 기다렸다. 나이가 좀 든 언니들은 에쿠스를, 어린 언니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고, 이제 내 차례가 되었다.


내 머리는 아주 깎기 쉽다. 어떻게 깎을지 물으면, 그냥 ‘18mm요’ 한마디면 된다. 그러면 바리깡에 18mm짜리 물체를 끼우고 머리 앞에서부터 뒷머리까지 그냥 밀어버리면 된다. 그러면 전체 머리가 18mm가 된다. 난 이 머리를 제일 좋아했다.


이 날도 깔끔한 18mm 밤톨 머리가 완성되었다. 머리를 깎아 주시는 분과의 대화 주제가 유럽 여행으로 넘어갔고, 내일 떠난다고 하자 너무 좋겠다고 본인이 더 흥분하다가,


쉣! 18mm 기계를 빼버렸다는 것을 잊고, 다 깎은 옆 머리를 바리깡으로 또 밀어버렸다.


순간, 미용실에 10초간 정적이 흘렀고, 난 설마~하는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보니 어처구니없게 옆머리가 새하얗게 파 먹혀있다. 삭발 속의 삭발, 이건 듣도 보도 못한 이발 사고였다. 수정 작업에만 한 시간이 더 걸렸고, 결국 해병대 머리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유럽에 가보니 나 같은 머리가 많았다. 유럽에 이발 사고가 빈번한가 보다.



이 머리로, 두둥 유럽으로 출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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