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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May 01. 2016

10년 전 유럽 여행 - #취리히

예전에 어머니께 여쭤봤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갔어요? 그랬더니 경주, 설악산, 제주도가 아니라 뜻밖에도 서울로 가셨단다. 서울 어디에 갔었냐고 물으니, 남산타워도 올라가고, 명동에서 칼국수도 드셨다고 하셨다. 남산 밑 어느 호텔에서 묶었는데, 아버지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술판을 벌였다는 기억도 떠올리셨다.


지우 지아도 나중에 아빠 엄마의 결혼 전 모습이 궁금할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애들이 태어나기 전, 지영이와 단둘이 갔었던 2007년 8월의 유럽여행을 다시 따라가 보고자 한다. 10년이 훌쩍 지난 여행, 비록 기억이 선명하진 않지만, 당시 사진들과 끄적거린 흔적들을 보면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10년 전 사진들의 디테일을 끄집어내다보면, 잃어버린 기억들과 감정들이 살아나길 희망하며...   






항상 여행의 시작은 공항이다. 


결혼한지 4개월 차 부부답게 결혼반지를 둘 다 하고 있었고, 난 지영이가 결혼할 때 사줬던 몽블랑 시계를 찼고, 지영이는 내가 시계를 안 사줘서 동네 문방구 뽑기 기계에서 운 좋게 뽑았을 법한 장난감 같은 시계를 차고 있었네. 몽블랑 시계는 몇 번의 분실 위기를 넘기며 내 손목이 아닌 서랍 속으로 들어갔지만, 어쨌든 아직까지 함께 하고 있고, 지영이 시계는 아직 사주지 못했구나. 그래, 조만간 시계 하나 사자.




사진의 배경은 모닝캄 라운지. 당시 입가심으로 제공되던 음식들을 공짜라는 이유만으로 세 접시 가득 담아 먹었다. 심지어 콜라랑 주스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두 캔 다 깠구나. 부끄럽다. 간지 나던 모토롤라 스타텍 전화기 오랜만에 보니 반갑고, 나의 저 하늘색 폴로 옷은 얼마 전까지 나의 주력 옷이었는데 최근 갑자기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보면, 지영이가 이제 좀 그만 입으라고 갖다 버린 듯하다. 진정한 빈티지 멋을 모른다.


비행기의 장면들도 몇 개가 떠오른다. 바로 옆 자리에서 중간 팔걸이 두 개를 모두 다 올리고, 혼자 세 자리 나 차지하고 비행 내내 누워서 자던 사람, 난 그가 너무 안 움직이길래 죽었나 했는데, 기내식 수레가 오는 소리에는 추레한 몰골로 벌떡벌떡 일어나곤 했다. 


가장 싼 좌석으로 예약했더니, 비행기 엔진 바로 옆 자리였다. 당시 신내동 아파트 2층에서 새벽 4시부터 창문도 깨뜨릴만한 미친 데시벨로 울어대는 매미들에게 귀가 단련되어 있던 터라, 웅웅 거리는 비행기 엔진 소리 정도야 자장가처럼 은은하게 들렸다.


난 공항 서점에서 산 Rich Dad Poor Dad 책을 읽기 시작했고, 지영이는 스위스 지도 및 정보들을 공부했다. 당시 제일기획에서 삼성전자를 클라이언트로 모시고 ‘슈퍼을’ 생활을 하던 지영이는, 여행에서도 클라이언트 회사에 다니던 남편 대신해서 모든 여행 준비, 스케쥴링, 통역 및 실행을 담당했었다.




지영이가 나름 영어와 독일어 모두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터라, 이 두 언어가 모두 통용되는 취리히에 도착한 이후엔, 마치 내가 3개 국어를 하는 것처럼 상당히 편안한 마음으로 지영이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나도 나름 고등학교 3년 동안 독일어를 배웠는데, 게슈타포라는 별명을 가졌던 독일어 선생님한테 자습 시간에 떠들다가 귀싸대기 몇 대 맞은 기억만 있을 뿐, 독일어는 Ich habe kein geld. “난 돈이 없다” 이 한 문장밖에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지영이의 독일어 하는 모습을 좀 보고 싶었는데, 여행 내내 영어만 썼던 것 같다.


당시 호텔업계에 종사하던 처제 덕분에, 여행 내내 좋은 호텔에서 Special 가격으로 묶었다. 취리히에서의 첫 번째 호텔은 Four Points by Sheraton. 당시에 이것저것 가지고 오고 싶은 물건들이 많을수록 좋은 호텔이라 평가를 하곤 했었는데, 이 곳에서도 린스, 슬리퍼, 세탁물 봉지 등 가지고 가고 싶은 것들이 많았던 기억이다. 




우린 짐을 풀고 주위를 산책하기 시작했고,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엠씨스퀘어급 집중력을 발휘해봐도 이런 디테일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10년은 긴 시간이구나.




이 정도가 첫째 날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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