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월 전, 2015.08.24
해일이 덮치는 꿈을 꾸었다.
난 특이한 꿈을 자주 꾸는 편이다. 덩크슛을 하거나, 이불속으로 들어온 뱀한테 물리거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개를 받거나, 조직폭력배들과 싸움을 하거나, 용의자로 경찰에 쫓기는 꿈을 꾸는 등, 자는 동안 다양한 레퍼토리의 이야기들이 다음 날 생생하게 기억날 만큼 실감 나게 전개된다. 그러다 보니, 네이버 지식인 검색에서 한복 입은 역술인들이나 초딩들이 맞춤법 틀리게 달아놓은 꿈 해몽 따위는 읽지 않아도, 이제 웬만한 꿈은 스스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중 특히 해일 꿈은 여러 번 경험했다. 해일 때문에 건물 꼭대기로 대피하기도 하고, 물이 차오르는 차에서 극적으로 탈출하기도 해봤다. 지난번 해일 꿈을 꿨을 땐, 꿈 해몽에 적힌 것처럼 재물이 찾아오지도 않았고 힘든 일도 없었다. 심지어 물과 관련된 것까지 범위를 넓히더라도, 화장실을 청소했던 기억밖에 없다. 그런데 오늘 해일 꿈은 뭔가 특별했다. 그리고 바로 물과 관련된 결과물을 던져 주었다.
와이프가 내년 2월 말에 하와이 여행을 질러버렸다. 지난여름, 베트남 다낭으로 가족 여행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촌스럽게 “바쁘다”는 핑계로 내가 펑크를 냈다. 직장생활 14년 차가 바빠서 휴가를 반납하다니, 쯧쯧. 그랬더니 진짜가 나타났다. 4박 5일 다낭도 못가는 어이없는 남편을 위하여, 반년 후 11박 12일짜리 하와이 여행이 등장한 것이다. 얼리버드 예약을 통하여, 성수기 절반도 안 되는 가격으로 숙소와 항공권을 결제해버렸다. 이제 퇴로는 없다. 무조건 가야 한다. 이런 시추에이션 아주 바람직하다.
하와이는 2001년 나의 인생 영화인 ‘친구’에서 장동건이 ‘니가 가라, 하와이’라고 할 때, 너무 영화를 몰입해서 보던 나머지 진짜 나보고 가라는 줄 알았다. 그래서 곧바로 하와이 가족여행을 예약했고, 첫 해외 가족여행에 들뜬 우리는 ‘내가 가자, 하와이’를 외치며 출국일 2001년 9월 12일에 맞춰 짐을 싸고 있었는데…
출국 하루 전인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로 비행기가 돌진하는 어처구니없는 장면이 뉴스 속보로 나오고 있었고, 그 밑에 모든 미국행 항공편이 취소됐다는 자막을 보면서, 쌌던 짐을 다시 고스란히 푼 이후 15년 만의 재도전이다.
첫째 지우야 괌 여행으로 미국령 섬에 대한 사전 답사도 다녀왔고, 현재 수영도 배우고 있는 등 조금씩 하와이를 즐길 소양을 갖춰가고 있지만, 요즘 ‘제멋대로’ 레벨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둘째 지아가 문제다. 그나마 지아를 밤에 재울 때, ‘호랑이와 곶감’과 더불어 가장 많이 들려준 이야기가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였다. 토끼는 깡충깡충 잘 뛰지만 게을러서 낮잠이나 자는데, 거북이는 엉금엉금 느리지만 부지런해서 결국 경주에도 이겼다며 그동안 엄청나게 칭찬해줬으니, 이제 하와이 거북이들이 나에게 보답을 해줘야 한다. 지아가 하와이 거북이들과 놀다가 토끼처럼 낮잠을 자주길.
D-18일, 2015.12.31
2015년 한 해가 끝나간다. 올해는 책을 백 권 정도 읽어볼까 생각했다. 사실 몇 권을 읽겠다는 구체적인 숫자를 목표로 삼은 적은 없어서, 읽은 책 숫자를 세는 게 어색했지만 연초에는 거북이처럼 꾸역꾸역 읽어 나갔다. 2월까지 20여 권의 책을 읽는 좋은 페이스를 유지하며 산술적으로 100권의 목표는 달성 가능하겠다고 자신했지만, 현재 시각 12월 31일 저녁 8시. 올해 남은 4시간 동안 72권을 더 읽어야 백 권을 채우게 된다.
연말엔 항상 모히또에서 몰디브 한 잔을 꿈꾸지만, 올해도 현실은 마지막 날까지 맥심 커피에서 사무실 한 잔 중이다. 열심히 집중하고 있는데 코 안에서 맑은 시냇물 느낌! 아~ 코피! 역시 마지막 날까지 꽉 채워 일할 땐, 코피 정도 나줘야 격에 맞지. 빠른 속도로 고개를 뒤로 젖히고 모나리자 티슈를 한 장 빼서 나름 뿌듯한 마음으로 코를 스윽~ 닦았더니,
맑다.
그냥 끈적끈적하지 않고 밀양 계곡물처럼 맑은 콧물이었다. 올해 나름 열심히 살았지만, 코피 날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내년에는 백 권까지는 모르겠고, 올해보다는 더 많은 책을 읽어보자. 그렇게 회사 지하 영풍문고로 향했고, 내년 첫 번째 읽을 책을 샀다. “Enjoy Hawaii”
2016년을 열기에 이 보다 더 적합한 책은 없다.
20160218, 출발 당일
저녁 비행시간에 맞춰 퇴근하기 전까지, 바쁘고 정신없을 하루가 예상되던 날.
이런 날엔 새벽 출근을 한다. 얼핏 보면 해외 유학파, 좀 더 자세히 보면 잔꾀 부리며 일 별로 안 할 것 같은 외모와는 달리, 난 근면 성실한 편이다. 농경시대나 산업화 초기 시대에 태어났으면 대성했을 스타일이다. 일 있는 날은 항상 새벽 출근을 한다. 이런 것이 부모님의 가르침 탓인지, 성격 탓인지, 삼성에서의 기본교육 5년 탓인지, 아니면 남들보다 뛰어난 머리와 순발력을 갖추지 못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로 인해 누군가가 편해지진 않더라도, 적어도 나로 인해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는 만들지 말자는 성격 탓이 가장 유력한 원인인 듯하다.
그래도 아직 내 안에, 초등학교 시절 소풍 가기 전날 가방 안에 꿀과배기, 홈런볼, 사이다를 넣어두고 다음 날 아침 엄마가 싸줄 김밥이 들어갈 공간을 쳐다보며 밤 잠 못 이루던 꼬마 아이가 여전히 남아 있는지, 여행 전의 설렘은 다음 날 새벽 출근을 해야 하더라도 정상적인 취침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것저것 챙기느라 새벽 2시쯤 퇴근했지만, 여행 워밍업으로 영화 한 편을 봐야 한다. 무슨 영화를 볼까 고민하다가 이런 날은 역시 학원폭력물이 제격이다. ‘폭력서클’이란 영화를 네이버에서 다운받아서 보기 시작하는데, 배우 ‘연제욱’의 양아치 연기는 이 분야 레전드 오브 레전드 ‘류승범’을 떠올릴 만큼 압도적이었고, ‘정경호’라는 배우의 탄탄한 연기력과 카리스마가 돋보였다. 그리고 최고의 반전은 시그널로 주가를 날리고 있는 조진웅이 무려 고교생으로 등장하는 대목이었고, 화들짝 놀라며 영화 주요 정보를 다시 확인해보니, 2006년 개봉작이구나.
새벽의 하드 보일드 리얼 액션 영화는 역시 나의 피를 끓게 만들어 숙면을 방해하였고, 잠시 눈을 붙였는지 깨있었는지 헷갈리는 상태의 수면만 취한 채 새벽 출근길에 올랐다. 오늘 밤 10시 비행기 타야 하니, 4시 퇴근을 데드라인으로 삼고 하나씩 일을 정리해나갔다. 가급적 휴가지에서 불필요한 업무에 연루되기 싫은 마음은 평소보다 더 업무 디테일을 챙기게 만들었고, 프로들은 매 순간 이렇게 일을 처리하겠구나 느끼며, 평소의 ‘내일도 있쟈나’ 업무 스타일을 반성하게 됐다.
오늘 계획한 일들은 다 챙긴 것 같다. 그리고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5분. 이 정도면 오차범위 안이다. 가자, 집으로. 회사 문을 나서는 순간 여행 1일 차가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