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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Jan 31. 2023

월간 손창우 2023년 1월

무용담을 듣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진실, 과장, 거짓 사이를 살랑살랑 넘나 들며 듣는 사람들을 어질어질하게 만들고, 특히 무용담을 늘어놓는 사람은 듣는 사람의 반응과 상관없이 언제나 즐겁다. 무용담은 화려할수록 임팩트가 있다. 그래서 남자들 소싯적 싸움 기억은 언제나 17대 1이고, 그 싸움에서 살아남은 나도 기적이고 상대방이 살아 있는 건 더 기적이다.


난 어린 시절부터 슈퍼 히어로였던 아버지의 숱한 무용담과 기억의 파편들을 달달 외울 정도로 들으며 자랐다. 나름 느와르 캐릭터가 잠깐 다녀갔던 춘기 시절부터는 '아버지, 영화도 그렇게 만들면 욕먹어요' 심리가 발동하여, 아버지의 무용담을 한 귀로 흘리기 시작했지만, 그 무용담들은 수많은 위인전의 스토리들보다 나에게 더 큰 뿌리가 되고 자존감이 되어 줬다는 것을 커서야 알게 되었다.


집을 떠난 이후론 한 동안 아버지의 무용담들을 듣지 못했다. 그렇게 잊혀져갔다.


오랜 시간이 흐르며, 손 끝에 머물러 주는 피아노 레퍼토리가 하나씩 사라지는 것처럼, 아버지의 화려했던 기억들은 하나씩 사라져 갔고, 이제 대부분 내 머릿속에만 머문 채, 아버지에겐 가장 빛났던 삶의 기억들이 몇 개 남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에피소드들은 매번 손녀들 만날 때마다 하신다. 지난번에 그 이야기를 하셨다는 것을 까먹으셨는지, 언제나 신이 나서 말씀을 하신다. 아버지의 남은 기억들은 점점 더 살이 찌고 부풀어 올라 하늘로 두둥실 날아갈 것만 같다. 다행히 손녀딸들이 벌써 사회생활이란 걸 아는지, 속이 깊은지, 매번 처음 듣는 것처럼 “우와!” “진짜요?”하며 추임새를 넣어줘서, 아버지는 더 신나서 기억들을 꺼내 놓으신다. 우리 딸들, 참 착하네.


아버지의 이야기엔 영화 ‘빅 피쉬’에서의 거인, 마녀, 유령마을, 늑대인간, 샴쌍둥이들 이야기처럼 한평생 기억 속에서 부풀려져 진실, 과장, 거짓 사이의 경계마저 없어져버린 내용들이 많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안다.


아버지의 기억들, 오랜 시간 흐르며 판타지들이 여기저기 가미되었지만, 그 양념과 토핑들을 걷어내고 보면, 그래도 진실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덧붙임들은 아버지의 꿈이자 삶을 지탱시켜 준 자부심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아버지의 레퍼토리 중 하나가, 내가 연세대학교 수석을 해봤다는 것이다. “느그 아버지, 공부 진짜 잘했다. 고 3 때 시험에서 연세대, 고려대 다 수석 했고, 서울대도 너끈히 합격했는데, 서울대 안 가고 연고전보러 연세대 간다고 해서 얼마나 서운했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이건 뭐, 17대 1 싸움급이다.


이건 와이프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건 좀…’ 표정들이다. 당사자인 나조차 ‘그 이야기는 이제 하지 마시지… 그건 진짜 좀…’ 표정을 하고 있으니…


몇 주 전, 부산 집에 갔다. 침대에 누워계신 아버지가 손녀딸들에기 또 그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난 슬그머니 도망치 듯 방을 나왔다. 그런데 진짜 궁금했다. 저 기억의 흔적이 어딘가 남아 있지 않을까.


고등학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창고방을 뒤졌다. 박스들이 나왔다. 다 버린 줄 알았는데, 나도 이런 게 있었네. 캬. 어린 시절 일기장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국민학교 2~3학년 때 일기를 한 권씩 꺼내 읽었다. 글을 또박또박 잘 썼네. 형이 과자를 줘서 기분이 좋았고, 유나백화점에서 선물도 샀고, 야구를 하다가 유리창도 깨뜨렸고, 은영이 누나도 만나고, 엄마가 고기를 구워 줬는데 맛있었고…


아… 일부러 허공을 보며 딴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눈물 한 방울 또로록 떨어질 뻔했다.


85년, 막 3학년 된 아이가 반성할 게 뭐 있다고...



그리고 박스들을 더 뒤지다가, 드디어 내 중고등학교 때 성적표 뭉치를 발견했다. 어머니가 보물처럼 간직하고 계셨구나. 얇은 성적표들이 찢어 질라 한 장 한 장 소중하게 펴 보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아버지의 기억.



당시 고3들은 전국 모의고사를 볼 땐, 지망 대학 지망 학과를 쓸 수가 있었다. 난 학창 시절 내내 신문방송학과를 가고 싶어 했다. 학교에선 수학을 잘하니 무조건 이과를 가라고 했지만, 오직 신문방송학과를 가고 싶어서 문과로 진학을 했을 정도였다. PD가 되고 싶었다. 혹시 아나, 쭈욱 갔으면, 신원호 PD급이 되었을지. 막판에 왜 한 번도 생각조차 안 해봤던 경영학과를 썼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긴 한데, 모의고사 땐 항상 신문방송학과로 지원을 했다. 서울대는 가장 이름이 비슷했던 신문학과로.


- 서울대 모집정원 28명 / 지원 198명 / 석차 19등

- 연세대 모집정원 60명 / 지원 655명 / 석차 1등

- 고려대 모집정원 60명 / 지원 76명 / 석차 1등


아버지의 기억은, 이때 밤늦은 시간에 담임선생님이 집으로 전화가 와서 다짜고짜 엄마를 바꿔달라고 해서, 당신 누군데 이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남의 마누라를 찾냐고 화를 냈는데, 알고 보니 연고대 수석을 한 성적표를 미리 받아본 선생님이 어머니에게 이 소식을 미리 알려주고 싶어서 야밤전화한 거였다, 이런 내용이다.


갑자기 그 날 기억이 되살아났다. 또렷하게. 그랬었지.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


할아버지가 매번 이야기하시는 내용이 여기 있네. 성적표에 적혀 있는 당시 집 전화번호를 보니, 선생님이 흥분해서 집으로 전화를 한 것도 사실이었다. 남의 성적표에 맘대로 빨간색 표시도 해놓고.


나조차 가물가물하던 기억들이 계속해서 박스더미에서 나와, 또 허공을 보며 딴생각을 해야만 했다. 아이들도 이제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무용담과 기억들이 밑도 끝도 없는 거짓 판타지만은 아니란 것을. 할아버지가 강철부대에서 가장 멋졌던 정보사(HID) 출신이란 것도 확인할 수 있었고.


본인의 아시안게임 금메달보다 아들의 모의고사 1등 기억을 인생 최고의 기억 중 하나로 기억하고 있다니, 운동선수로서 치열하게 1등만 해야 했던 삶을 살아오면서도 자식만큼은 제발 운동이 아닌 공부를 하길 바랐던 한 명의 아버지로서의 삶이 어떻게 작동되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짠하면서도, 작은 기억에서 시작된 허구와 판타지들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롭게 하는지 알게 되었기에, 아버지로부터 이 기억들을 마지막까지 다치지 않고 지켜드리고 싶어 졌다.


잎으로 몇 번을 더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수술 후 고통 속에서 지내고 계신 아버지의 마지막 무용담을 들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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