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oha Hawaii - #2

2016.01.29 금요일, 여행 2일 차

by 손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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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니 10:30. 출국 전 세운 일정표 대로라면 10시 30분은 아침을 먹고 점심 도시락을 싸서 Lanikai Beach에 도착했어야 할 시간이다. 대학교 때 수업을 오후에 빼곡히 몰아넣을 정도로 아침잠이 많은 철저한 저녁형 인간으로 살아왔기에, 지난 30년간 아침에 눈을 뜨면 이 좋은 잠을 포기하고 학교에 가야 하고, 회사에 출근해야 하다 보니, 눈을 뜰 때 상쾌했던 날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특히 고등학교 3년간 나의 아침 알람 소리였던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은 지금도 ‘빰 빰빰빰빠바 빰’ 인트로 부분만 들으면, 뭔가를 집어던지거나 삐뚤어지고 싶어 진다.


이날도 그랬다. 눈을 떴을 때 귓가에서 ‘빰 빰빰빰빠바 빰’ 환청이 들리며, 잠에서 깨어나는 것에 대한 습관적인 반감이 있었고, 시계를 본 순간 늦잠에 대한 아쉬움까지 더해져 살짝 짜증이 밀려왔으나, 커튼을 여는 순간 - 이럴 때 쓰는 단어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으나 - “웬열!” 눈 앞에 펼쳐진 말도 안 되는 풍경과 날씨에 안구가 정화된다. 이런 상투적인 표현은 좋아하진 않지만, 정말 가슴이 뻥! 뚫린다. 이 장면이 하와이 12일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이었다.


여기가 하와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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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서 맞이한 첫 번째 하와이 아침 풍경]



어제 Target에서 장 봐온 빵, 잼, 햄, 요구르트, 오렌지주스, 오렌지로 푸짐한 아침을 먹었고, 전날 야심 차게 선택한 크램 챠우더 수프도 역시 실망을 시키지 않았다. 다만 전자레인지에 넣고 3분을 돌려야 하는데, 1분이 지난 시점부터 조개들이 과거 명절 때 던지고 놀던 폭음탄 소리를 내며 ‘펑, 펑, 펑’ 터지기 시작하여, 이런 소리에 매우 겁이 많은 와이프와 애들의 눈치가 보여 1분 30초만 돌리고 꺼내다 보니, 반쯤은 뜨겁고 반쯤은 차가운 하이브리드 수프 맛이었던 것이 조금 아쉬웠다.


와이프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난 애들을 데리고 잠시 숙소 앞 바닷가를 산책했다. 그런데 나가자마자 말을 타고 가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Horse? Are you kidding me?” 하와이에선 말도 타고 다니나? 나 역시 혼란스러운 장면이었다. 지우, 지아 모두 실제 말은 처음 본 순간이었다. 내가 대충 영어를 해도 애들은 아빠가 엄청나게 잘하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몇 마디 주고받았다. “우리 애들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실제 말을 봤다. 너무 좋아한다. 멋지다.” 딱 요 정도 영어.


성문 기본 영어 수준의 영어는 적당한 속도와 발음으로 제법 그럴듯하게 구사된다. 그 뒤로 몇 마디 말을 더 주고받았는데, 아주머니의 대답도 발음만 좋을 뿐, 역시 성문 기본 수준이었다. “애들이 귀엽다, 고맙다, 하와이에 여행 왔느냐, 어디서 왔느냐 등등” 이 아주머니와의 짧은 대화가 하와이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스로 만족스러운 수준의 영어 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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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이 실제 말을 처음 본 순간]



집 앞 바닷가는 모래사장이 깨끗한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여기가 무려 태평양 한가운데인데 눈살 찌푸릴 정도는 아니었고, 분명히 더 깨끗할 수 있는 모래사장이지만 태풍이 지나간 듯 나뭇가지 등이 널브러져 있어서, 화소 낮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여기가 하와이인지 부산 태종대 앞바다인지 크게 차이를 느끼기 힘들 것 같았다.


바다를 무지하게 좋아할 걸로 기대했던 둘째 지아는 의외로 모래가 신발 안으로 들어온다고 짜증을 내기 시작해서 나랑 지우가 번갈아 가며 지아를 안고 다녔고, 지우는 바지가 다 젖을 정도로 바닷가에 뛰어들어 결국 기상 몇 시간 만에 다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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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동생을 안을 만큼, 언니에게 안길 만큼, 많이 컸다]



오늘은 오후 4시에 돌도 안된 Baby를 데리고 이미 하와이에 와있는 설영이를 Ala Moana Center에 있는 Mariposa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해서, 그 전까지 시간이 애매하게 3~4시간 정도 남아있었다. 그래서 집에서 3분 거리에 있는 Waimanalo Park Beach로 공식적인 첫 번째 바다 출정에 나섰다. 역시 준비할 것들이 많다. 비치타월 4개, 어제 Target에서 산 워터슈즈 4개, 여벌의 옷, 간식거리 등등을 챙겨서 바닷가로 이동하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긴 했다.


오전에 집 앞바다를 보고 와서 그런지, 여기 Waimanalo 해변은 모래사장과 바다 빛깔 퀄리티가 예술이었다. 오히려 너무 깨끗하다 보니 부드러운 모래들이 조금은 거친 파도에 힘없이 부서지며 파도의 영향권 내의 바다는 온통 모래빛이다. 물론 조금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우리가 태평양 한가운데서 기대하는 발가락 끝까지 청명하게 보이는 에메랄드 빛 바다가 펼쳐지지만, 애 둘 데리고는 파도 근처에서 머물 수밖에 없었다. 결국 Waimanalo Park Beach는 애 둘 데리고 가기엔 아빠가 너무 힘든 곳이었다. 파도를 온몸으로 버티며 애 하나는 안고, 애 하나는 손을 꼬옥 잡고 노는 것은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했다. 만약 이곳에 혼자 온다면, 사람도 드물고 파도도 적당하여 서핑을 즐기거나 스노쿨링 하거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멍 때리고 둥둥 떠다니기를 하기에 제격일 것 같았지만, 애들과 함께하는 다음 바닷가는 무조건 파도가 없는 곳으로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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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manalo Park Beach]



모래사장에 구멍들이 엄청나게 많다. 이 구멍들이 뭔지 물어봐 주길 바랬으나, 역시 딸들은 관심도 없다. 그래서 질문 유도 밑밥들을 던졌다. “와, 여긴 정말 구멍이 많다. 이렇게 많은 곳은 본 적이 없는데…” 그제야 지우가 질문을 한다. “이 구멍들은 뭐야?” 그러면서 시선은 다음 파도를 향하고 있는 것이, 마치 네가 질문을 원하는 것 같아서 물어보는 것이니 대충 대답하라는 분위기다. “이 구멍들은 게들이 만들어 놓은 거야. 구멍을 계속해서 파면서 내려가면 게들이 많이 숨어 있는 집을 발견하게 돼. 아빠 어릴 때 부산에서 바닷가 갈 때마다 구멍을 파서 게들을 잡곤 했어”라고 하자, 그제야 호기심 어린 눈을 하며 관심을 가진다. “이 많은 구멍에 전부 게가 들어있다고? 이 작은 구멍에 어떻게 들어간 거야?” 그 순간, 나도 갑자기 헷갈렸다. 진짜 다 게가 만들었나? 예전에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거북이들도 이런 구멍에 알을 낳고, 새끼 거북이들이 구멍 밖으로 나오던 장면을 봤던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여긴 거북이들이 많은 하와이 아닌가. 그리고 대부도 갯벌을 팠을 때 조개들이 나온 기억도 났다. 자꾸 기억들이 되살아나며 이 구멍의 정체들이 혼란스러워졌다. 또 바닷가 갯벌 구멍을 팠을 때 문어가 펄떡거리며 나온 기억도 떠올랐으나, 그건 내 상상력이 너무 나갔다. 기억 왜곡의 끝판왕 문어까지 등장했으니,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아무튼 바닷가 출신이지만 의외로 바다 상식에 약하구나


적당히 두 시간의 물질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가장 쉬우면서도 애들의 취향을 안전하게 저격할 수 있는 계란밥과 김으로 점심을 먹이고, 설영이 만나러 Ala Moana Center로 향했다. Wainamalo나 Ko Olina와 같은 지명과는 달리 Ala Moana는 비교적 쉽게 이름을 외울 수 있었다. 중학교 때 즐겨 사용하다가 내가 생각해도 저렴하고 유치하여, 차라리 외우지 못할 망정 이런 식으로 외우진 말자고 다짐했던 발음 연상 암기법. 예를 들면 Aware(어, 외워 “알고 있는”), Beverage(“음료수”를 마시면 배부르지), Cater(케익 떠서“음식을 공급하다”) 이딴 것들이다. 나중에 이런 단어 암기 방법을 해마 학습법이라고 세련되게 포장해서, 특정한 이미지를 기억하는 해마라는 기관을 활용하여 단어와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결합시면 더 쉽고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다고 하는 공부법도 등장하긴 했었다. 하지만 정말 폼이 안 난다. 난 컴퓨터처럼 계산하고 사진기처럼 기억하고 싶었다.


그 당시에도 이렇게 외우곤 하는 내가 창피했는데, 지금도 이렇게 유치하게 외운 단어, 공식, 지명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해마 학습법이 효과는 있나 보다. 알라모아나(Ala Moana)도 스펠링을 보고 나도 모르게 이런 유치한 방법으로 외웠는데, (알라 모아나? –서울말로 번역하면 아기야, 뭐하고 있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런 저렴한 연상을 통해 종종 암기한다는 것을 커밍아웃하는데 많은 용기가 필요하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 후에도 이 쇼핑몰 이름은 확실히 까먹지 않을 자신은 있다. 알라 모아나?


집에서 Ala Moana가 위치한 와이키키 지역으로 61번 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가다 보면, 팔리전망대(Pali Lookout)로 향하는 도로가 나온다. 팔리전망대는 많은 블로거들이 오하우 섬에서 갈만한 곳으로 추천하는 곳으로, 일명 바람산으로 불릴 만큼 이 곳에 가면 안경도 날아갈 것 같은 세찬 바람이 분다고 한다. 나도 별생각 없이 일정표 상 시간이 비는 5일 차 오전에 팔리전망대 방문을 넣어두긴 했다. 하지만 Pali Dr. Exit 푯말을 보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미 일정표는 뒤죽박죽이 되어 버려서 의미가 없어졌고, 난 산도 싫어하고 바람도 싫어한다. 그리고 나랑 와이프는 옷은 남대문, 이태원, 오렌지팩토리 급을 입고 있지만, 그나마 선글라스는 명품 카테고리에 넣을 만한 것들을 착용하고 있기 때문에, 강풍으로 안경이 날아갈 수도 있다는 그곳에 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팔리전망대의 영어 표현 Pali Lookout에서 단어 띄어쓰기 하나만 바꿔서, Pali Look은 Out 하기로 결정했다. 당시는 참신한 언어 유희라 생각했지만 적고 나니, 이것도 ‘음료수를 마시면 배부르지’ 수준으로 퀄리티가 저렴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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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 Moana 가는 길]



말을 탄 사람이 지나가는 시골마을에 있다가 와이키키로 들어오니, 마치 왕십리 자취방에 있다가 압구정 로데오거리에 온 기분이다. 물론 로데오 거리가 예전의 명성만은 못 미치지만, 95년에 서울로 올라온 촌놈에게 로데오 거리는 ‘가장 서울말을 잘 쓰는 사람들이 옷을 빼입고 모여있는 곳’이었고, 난 당시 머리에 무스 한 통을 다 바르고 최강의 명품 브랜드 폴로 티셔츠를 흰색 바지 안에 가지런히 넣어 입고, 흰색 바지에는 포인트로 하늘색 삐삐를 주머니 밖으로 내고 3색 필라 허리띠로 패션을 마무리한 완벽한 자태로, 위풍당당하게 로데오 거리의 클럽에 갔다가 단칼에 뺀찌를 먹고 나오며, "이 정도도 안된단 말인가?"를 외쳤던 95년 여름의 인상이 강렬했기 때문에, 현재도 압구정 로데오는 나에겐 화려한 장소를 지칭하는 최상위 단어이다.


와이키키에는 명품 가게들이 즐비했고, 쇼핑 나온 여행객들도 많이 보이면서 동시에 거리에 노숙자들도 많이 보였다. 하와이 노숙자들은 그래도 따뜻한 곳에서 기거하며, 가끔 바다에 들어가서 씻을 수도 있을 테고, 참 여건이 좋다. 그런 와이키키에서도 쇼핑의 중심지인 Ala Moana Center. 생각보다 훨씬 큰 규모의 쇼핑센터에서 Mariposa라는 레스토랑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내비게이션에 ‘Ala Moana Center’만 찍고 찾아가는 건, 마치 명동 교자 만두집을 찾아가기 위해 내비게이션에 ‘명동’만 검색하고 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우린 도착해서 Mariposa 레스토랑을 30분간 찾아 헤맸고, 그것도 30분 가까이 된 시간까지 여전히 헤매다가 우연히 유모차를 끌고 가고 있던 설영이를 발견하고 따라가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Mariposa 레스토랑에 들어서자마자 나비 모양의 등이 인상적이었는데, 나중에 또 이름을 검색해보니, Mariposa is the Spanish word for Butterfly였다. 한국어 메뉴판도 있어서 음식 주문에 적극성을 보일 수도 있었지만, 안전하게 와이프가 골라주는 걸로 선택했다. 선셋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고급 식당이면서도 음식값은 크게 비싸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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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posa, 아직 해가 지기 전]



스테이크, 바비큐, 스파게티 등등을 시켰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은 식전 빵. 딸기가 들어간 듯한 버터에 발라먹는 식전 빵이 내겐 메인이었고, 나머지 음식들로는 그냥 배를 채웠다.


식사를 끝냈을 때가 대략 6시 30분 정도였는데, 매주 금요일 저녁 7시 45분에 와이키키에서 불꽃놀이를 하고, Mariposa가 그 불꽃놀이를 즐기기에 최적의 레스토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 때문에 와이프와 설영이가 Mariposa를 예약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마침 오늘이 금요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레스토랑 발코니 쪽 예약석 손님들이 이제야 들어오기 시작한다. 다들 금요일엔 석양과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7시 전후로 이 곳에 온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땐, 우린 너무 일찍 와서 이미 식사를 끝내 버린 시간이었다.


그래도 아직 와이프와 설영이의 대화가 무궁무진하게 남아 있었고, 조금 더 버텨서 불꽃놀이는 한 번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때부터 디저트와 쇼핑으로 시간 때우기에 들어갔다. 두 엄마가 디저트 케이크와 아이스크림을 모뎀급인 1 kbyte/sec 속도로 찔끔찔끔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난 로데오의 전사답게 쇼핑을 하러 나섰다. 쇼핑몰 속으로 당당히 걸어가는 나의 뒷모습을 보고 와이프가 자신 있게 한 마디 한다. 절대 하나도 못 사 올 거라고. 어허, 나를 뭘로 보고. 그 말을 후회하게 해주겠다며 양손에 신용카드 한 장씩 야무지게 쥐고 식당 문을 나섰다.


사실 난 구매 의사결정 장애가 있다. 무언가를 사는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에는 한없이 약해진다. 한 마디로 잘 못 산다. 비싼 것만 잘 못 사느냐, 꼭 그렇지도 않다. 이마트 장 볼 때 5천 원짜리에도 쉽게 손이 가질 않는다. 기껏해야 계산대 매대에서 Kicker 초콜릿이나 연양갱 하나 슬쩍 추가하는 수준이다.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초등학교 1~2학년 정도였던 것 같은데, 어린이날 어머니가 사주신 풍선을 창문 밖으로 꺼내서 하늘로 날리며 놀다가 위로부터 떨어진 무언가– 물방울이었던 것 같은데, 물방울에 풍선이 터지는지는 모르겠다– 를 맞고 풍선이 터졌다. 너무 상심한 난 하나 더 사달라고 어머니한테 말할까 말까를 고민하며 쭈뼛거리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어린이 날이라고 아파트 앞에 나가서 풍선 하나를 더 사주셨다. 이번에는 절대 창문 밖으로는 날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기분 좋게 풍선을 들고 집으로 들어오다가, 실에 매달려 날 뒤따라 들어오던 풍선이 미처 들어오기도 전에 문을 닫아 버려서, 결국 두 번째 풍선은 문틈에 끼여 터져버렸다. 울고 싶었으나, 그때는 더 이상 풍선을 사달라고 하지 않았다. 풍선 하나가 쭈쭈바 가격 50원 정도밖에 하지 않았을 텐데, 하나만 더 사달라는 말을 차마 못 하였다.


그리고 한 번은 서울에서 손님들이 왔는데, 해운대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묶으셨다. 우린 호텔에서 실컷 놀다가 형은 계속 남아서 놀고, 나만 집으로 돌아왔다. 호텔에 남겨진 형이 얼마나 부러운지 오는 내내 울었거나 칭얼거렸던 것 같다. 그래서 집에 돌아온 후, 어머니가 돈 오백 원을 주시면서 부산 문화아파트 지하 문방구에 내려가서 사고 싶은 것 아무거나 사라고 하셨다. 난 언제 울었냐는 듯 너무 기분 좋게 문방구에 내려가 한참을 이것저것 골랐다. 결국 사가지고 온 것은 문 앞에 걸어놓는 ‘공부중, 외출 중, 방해금지’ 푯말. 내가 그 많은 장난감과 과자들을 놔두고 왜 그걸 골랐는지 아직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하지만 그 푯말을 한동안 내 방 – 물론 내 방은 없었다. 형과 함께 쓰던 방 – 에 걸어놓고 밖에 나올 때마다 ‘외출 중’으로 바꿔 걸어놓던 기억이 난다.


비슷한 일로 또 오백 원을 들고 문방구에 간 적이 있다. 난 무얼 살까 한참을 구석구석 구경하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너무 기뻐 비명을 지를 뻔했다. 정말 사고 싶은 것이 내 눈앞에 있었다. 얼마 전 친구 집에서, 친구 아버지가 외국에서 사 왔다는 짜서 먹는 껌을 씹은 적이 있다. 치약 튜브처럼 생겨서 치약 짜듯이 짜서 씹으면 그게 껌이었는데, 심지어 딸기맛 풍선껌이었다. 문화 충격이었다. 지금까진 외할아버지는 인삼 껌을 좋아하셨고, 어머니는 이브 껌이나 아카시아 껌을 항상 반을 잘라서 씹으시곤 했고, 난 만화가 들어있던 만화 풍선껌을 좋아했었는데, 외국에서는 껌을 치약처럼 짜서 씹다니. 멋있고 맛있었다.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난 문방구에서 그 껌으로 추정되는 제품을 발견한 것이다. 심지어 생긴 것도 더 세련됐다. 아래 뚜껑을 돌리면 껌이 위로 올라온다. 그래서 난 떨리는 손으로 오백 원을 아저씨한테 건네고, 너무 기분 좋은 득템이라 집까지 뛰어와서 어머니한테 이거 샀다며 자랑부터 할 인내심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난 문방구를 빠져나오자마자 구석에 서서, 뚜껑을 열고 아래 뚜껑을 돌려 먹음직하게 올라온 껌을 흐뭇하게 바라본 후, 힘차게 씹었다.


엇. 엇. 너무 기대가 컸던 것일까. 친구 집에서 씹던 맛은 아니었다. 딸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언가 향이 나길 바랬는데, 무색무취다. 그런데 씹다 보니 입 안이 찐득찐득해진다. 혓바닥이 윗 천정에 붙었다가 아래에 붙었다가 이빨에 붙었다가 난리 부르스다. 초등학생의 짧은 판단력으로도 이건 뭔가 잘못됐다. 껌일 이럴 순 없다. 부시맨도 이건 못 씹어먹지 싶다.


그래서 그제야 제품 겉표지를 봤더니, 충격적인 두 자가 적혀 있다. ‘딱풀’


난 지금도 딱풀을 보면 입안에 침이 찐득찐득하게 고이고 혀가 윗 천정에 들러붙는 기분이 든다.


문방구의 추억은 몇 개 더 있지만, 다시 구매 의사결정 장애 파트로 돌아와서, 어린 시절 우리 집은 궁핍하지도 않았고,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아끼시던 분들도 아니었고, 특히 아버지께선 “은행돈이 전부 아빠 돈이다”라고 이야기하시며 – 어릴 땐 진짜 그런 줄 알았다 - 자식들에게는 항상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셨던 분이라, 내가 왜 무언가를 살 때 주저하는지 그 원인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지우한테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이 보인다. 뭐 하나 사준다고 해도, 수십 번은 더 망설이다가 고르고, 심지어 계산하러 가다가 너무 비쌀 것 같다며 안사도 된다고 물건을 다시 제자리 두고 올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조금 짠하기도 하면서, 풍선에 고민하고 딱풀을 씹어먹던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이 보여서 귀엽기도 하다.


난 알라모아나 쇼핑몰로 내려가면서, 내심 몇 백 달러를 긁어서 와이프를 한 번 놀래게 하고 싶었으나, 그동안 누적된 나의 구매 행동 패턴을 빅데이터 분석해 봤을 때 그러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까지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맨 손으로 돌아가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사고 싶은 게 몇 개 있었는데 특히 나시, 영어로 sleeveless shirt가 하와이 도착할 때부터 땡겼다. 한국에서는 나시를 입고 다닐 일이 없지만, 하와이 패션의 완성은 단연 나시지. 팔뚝에 문신이 없어 아쉽긴 하지만.


그래서 나시를 사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렸는데, 변명부터 하자면 일단 나시가 별로 없을뿐더러, 누가 보더라도 내가 관광객임을 널리 알려주는 전면에 Hawaii 글자가 크게 박혀 있는 촌스러운 디자인의 옷이거나, 갈비뼈가 거의 다 드러날 만큼 옆구리 쪽이 심하게 파진 옷들이다. 그나마 맘에 드는 디자인을 발견하면 XL 사이즈뿐이다. 옷 하나는 나름 괜찮았는데 전면에 Tokyo, New York, Paris, Italy라고 큼직하게 쓰여있다. 순간 Italy가 어느 나라 수도인지 헷갈릴 뻔했다. 형용사 4개와 부사 1개를 써놓고 성질이 다른 것 하나를 고르는 5지선다 영어문제를 많이 풀어본 사람으로서, 이렇게 급이 맞지 않는 단어가 나열되어 있는 옷은 살 수가 없었다.


물론 이런 사지 못할 핑계들을 하나씩 대는 것이 나의 구매 결정 장애 탓일 수도 있다. 앞에 Hawaii 뒤에 Waikiki 글자가 있으면 어떻고, 갈비뼈가 아닌 치골까지 드러나도 어떠랴, 한국 돌아가서 걸레로 써버리면 될 것을. 그렇게 난 다시 와이프의 예상대로 빈 손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발코니 쪽으로 몰리는 것을 보니, It’s time! 7시 45분이다. 그리고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빠빠빠방! 빠바바빵! 적당히 아담한 크기의 불꽃으로 시작한다. 자, 제대로 한 번 터뜨려 보자~ 하는 찰나에 어라, 끝나버렸다. 이게 다야? 5분 정도? 이 정도는 광안리 모래사장에서 돈 많은 고삐리가 여자친구한테 사귀자고 고백할 때 터트리는 폭죽 수준이 아닌가. 이거 보려고 여기 세 시간 앉아 있었던 건가?


근데 사람들의 표정은 꽤 밝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게 글로벌 스탠더드 불꽃놀이구나. 그동안 터무니없이 휘황찬란한 여의도 불꽃놀이만 보다 보니, 우리의 눈높이가 너무 높아졌구나. 이 정도면 박수치고 만족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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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는 불꽃놀이 소리에 귀를 막고 있다]



훌륭했던 식전 빵, 무난했던 음식들, 시간 때우기 용으로 시켜만 놨던 디저트에 불꽃놀이까지 감상하고 계산을 할 시간. 담당 웨이터에게 tip 15%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듣는 웨이터의 얼굴이 너무 밝아지는 것이 아닌가. 15%는 기본일 텐데 왜 저렇게 환한 표정을 짓지? 내가 혹시 fifteen을 fifty로 발음한 건 아닐까? 괜히 내 발음까지 의심해 보며 살짝 긴장이 되었으나, 역시 합리적으로 팁 15%가 추가되어 있었다. 그냥 환한 미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구나.


잠시 주차장 가는 길에 막간 쇼핑을 했는데, 와이프는 나랑 애 둘을 디즈니 샵에 던져두고 Victoria’s Secret에 들어가서 나오질 않는다. 저 공간엔 과연 무슨 Secret이 있길래 여자들이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질 않는단 말인가. 난 애 둘을 데리고 디즈니 샵을 몇 바퀴 돌았고, 결정 장애의 정반대 대척점에 있는 둘째 지아는 보는 것마다 “아빠, 나 이거 살래”를 외친다. 사달라는 거 다 사면 약 3천만 원쯤 나올 듯. 결국 지우는 녹색 구두, 지아는 핑크색 미니마우스 옷을 샀다. 지아는 역시 나오자마자 입혀달라고 난리다. 우리 집안에 이런 성격 없는데, 양가 통틀어 처음 나온 급한 성격의 소유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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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ney에서 산 미니마우스 분홍 드레스]



결국 난 주차장 바로 앞의 ABC 마트에 나시를 사러 마지막으로 들렀다가, 와이프가 SPF 100짜리 선크림을 사는 것만 구경하며 빈 손으로 나왔다. 나시는 없지만 SPF 100을 샀으니, 내일은 태양과 싸우며 조금 더 적극적으로 놀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 Mariposa의 팁 15%짜리 훌륭한 식사와는 별개로, 집에 와서 또 밥을 찾는 아이들. 평소 식욕이 많은 편이 아니라, 먹는걸 달라고 하면 너무 반가워 뭐든 꺼내 주게 된다. 그래서 설영이 주려고 사 왔다가 깜빡하고 전해주지 못한 떡볶이 한 봉지를 뜯어 먹이고, 10시부터 온 집의 불을 껐다. 내일은 스노쿨링을 위해 Hanauma Bay로 아침 일찍 움직일 계획이라 10시 정도의 취침이 필요했다.


하지만 애들은 새벽 1시까지 계속 Hyper 상태로 침대를 탈출하여 “아빠~” 하고 씨익 웃으며 거실로 나온다. 결국 내일 이른 아침 기상은 포기하고, 맘 편히 여행 2일 차 Good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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