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oha Hawaii - #3

2016.01.30 토요일, 여행 3일 차

by 손창우


역시나 늦은 기상. 눈 뜨니 10시다. 계획대로라면 백탁 현상을 막는 성분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SPF 100짜리 선크림을 온몸에 휘감고 백인이 되어 Hanauma Bay에서 거북이들과 수영을 하고 있을 시간이다. 그래도 알람 소리 없이 눈 떠질 때까지 늦잠 자는 것도 나름 휴가의 취지에 부합한다. 이런 잠을 전문용어로 ‘꿀잠’이라고 한다.


눈을 뜨고 집 앞에 나가서 따사로운 햇살을 느끼며 깨끗한 공기를 한 움큼 크게 들이마시면, 이곳엔 눈에 보이지 않는 옥시크린 입자들이 날아다니는 듯 내 머릿속은 삶아 빤 것처럼 하얗게 변한다. 이게 영어로 GoodMorning이구나.


아침은 새우덮밥이다. 난 음식을 크게 가리는 것은 없으나, 삼계탕이나 새우는 별로 즐기지 않는다. 그래서 새우덮밥은 내 할당량 정도만 채우고, 빵, 버터, 딸기잼, 오렌지주스가 나의 아침으로 추가되었다.


아침을 먹고 우리 집 마당에 있는 수영장으로 갔다. 지우 지아 번갈아 가면서 최선을 다해 놀아줬는데, 아이패드가 나보다 더 잘 놀아준다. 원래 수영장에 갈 때마다 더 놀자는 애들 어르고 달래서 데리고 나오는 게 일이었는데, 아이패드가 만화 하나 틀어놓고 애들을 부르면, 아빠 엄마는 뒷전이다. 그냥 뛰쳐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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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수영장. 지아는 노란 튜브를 택시라 부르며 계속 태워달라고 했다]



지우가 놀기엔 수영장이 너무 작긴 했다. 오히려 지아가 잘 논다. 지아랑 한참을 놀아주고, 이제 나가자고 아이패드로 꼬셨는데도 수영장에서 계속 더 놀자고 한다. 그래서 아직은 만능키인 호랑이의 힘을 다시 빌렸다. 수영장에 호랑이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하니, 그제야 그럼 빨리 들어가자고 한다. 호랑이, 참 고마운 동물이다.


수영을 했으니, 점심은 짜왕이다. 난 걸쭉하고 뻑뻑한 자장을 좋아하고, 와이프는 묽고 오일오일한 자장을 좋아한다. 그래서 항상 그 중간 레벨로 만든다고 노력하는데, 그래도 만들고 나면 너무 뻑뻑하다고 한 소리 듣는다. 거실에 있는 tv를 처음 켜봤는데, 채널 1번에서 런닝맨이 나온다. 한국 예능을 보며 짜왕을 먹으니 이 곳이 고향 땅이 아니겠는가? 그런 익숙함 때문인가, 음식 투정 지수가 다소 높았던 애들이 이번 한 끼는 화끈하게 잘 먹는다.


오후에는 North Shore로 향했다.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데, 같은 한 시간 운전이라도 선릉에서 신촌까지 운전해서 가는 것과 비교해 보면, 운전의 피로도가 거의 없었다. 옥시크린 입자에 이어 우루사 입자들도 둥둥 떠다니는구나.


H2 Highway와 Kamehameha Highway를 쭈욱 타고 북쪽으로 한 시간쯤 올라가다가 처음 만난 바다에서 무작정 주차를 하고 해변으로 나갔다. 사실 내비게이션에 Sunset Beach를 찍고 가고 있었으나, North Shore에 접어든 순간 잠에서 깬 지아가 존재감을 뽐내며 큰 소리로 엉엉 울기 시작했고, 때마침 차들이 제법 주차되어 있는 해변이 보이길래 일단 차부터 세우고 봤다. 그리고 바다로 내려가 보니, 바위들이 많고 파도가 거칠어 수영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인데 왜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 궁금했다. 알고 보니 그곳이 바다거북이들이 자주 출몰해서 Turtle Beach로 알려져 있는 Laniakea Beach였다.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는 훨씬 좁고 열악한 바닷가였는데, 그래도 거북이만 나와주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노력하지 않은 뜻밖의 행운’ 카테고리에서는 운빨이 재앙에 가까운 우리 가족 앞에 거북이가 저 성난 파도를 뚫고 나타나 줄 리가 없다. 조금 전에 저 멀리 바다에서 고래를 봤다는 사람만 봤을 뿐.


이곳에서는 사진도 거의 안 찍었는데, 사실 이 곳이 나름 유명한 Laniakea Beach란 것도 몰랐고, 또한 Sunset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어 Sunset Beach로 빨리 이동해야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아가 ‘엄마 쉬! 엄마 쉬!’를 외쳤다. 애들 데리고 다니면 활발한 신진대사 활동으로 여행의 흐름이 끊어지는 경우가 많다. 뭔가 클라이맥스다 싶으면 광고가 나와버리는 케이블 방송을 보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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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iakea Beach에 거북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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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쉬!' 이후의 장면]



Laniakea Beach에서 Sunset Beach까지는 약 8km 정도의 거리인데, 가는 길이 1차선 도로인데다, 이동하는 차들이 많고 눈을 뗄 수 없는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어, 차들이 거북이 걸음으로 간다. 나에겐 그 이유로 이 곳이 Turtle Beach로 기억된다. 30분 정도 걸려서 Sunset Beach에 도착했다.


이 곳도 별도의 주차 공간은 보이질 않아 그냥 다른 차들처럼 갓길에 주차를 했다. 바다 자체는 특별해 보이지는 않았다. 모래사장이나 주위 풍경이 Wainamalo Beach만큼 화려하지도 않았고, 파도도 만만해 보여 파도가 올 때마다 살포시 뒤로 물러서며 ‘나잡아 봐라’ 놀이를 세네 번 하고 나면, 그 뒤로 성난 파도가 ‘장난치냐’고 비웃으며 몰려와 몸이 휘청거릴 만큼 세게 때리며 옷을 다 적셔버린다. 나처럼 ‘강 약 중간 약’의 4분의 4박자 리듬으로 치는 파도의 패턴을 읽지 못해서, 젖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저 멀리 파도가 높은 곳에서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폰트 7 사이즈 정도 크기로 작게 보였다. 해변으로부터 약 200~300m 이상은 나간 걸로 보이던데, 저 먼 곳까지 서핑하러 나간 것도 신기하고, 밑에 고래나 상어들도 충분히 다닐 법 한데, 난 수영을 펠프스만큼 해도 저렇게 멀리는 못 나갈 것 같다. 역시 세상은 넓고 용감한 사람들은 많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이 괜히 Sunset Beach겠는가. 어느새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고, 눈 앞에 역대급 석양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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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set Beach의 Sunset]



이제 저녁 시간이다. Kamehameha Highway를 타고 동쪽 해안도로를 따라 쭈욱 내려갈 계획이니, 가는 길에 새우 트럭인 Giovanni’s Shrimp가 나온다. 하지만 유명한 곳에서는 별 매력을 못 느끼는 터라, Giovanni’s Shrimp 가기 직전에 위치하고 현지인들에게 더 인기가 있다는 Romy’s Shrimp에 갈 계획이었다. 다음 생에서도 사투리를 못 고칠 것 같은 송희선의 소스라 그다지 신뢰는 가지 않았지만 어쨋든 한 번 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저녁 7시도 안된 시간이었는데, 도착하니 이미 Romy’s는 문을 닫았다. 아쉽네. 시청 앞 오향족발 가게처럼 재료 떨어지면 문 닫아버리는 진짜 맛집이었나 보다.


그리고 서둘러 Giovanni’s Shrimp로 향했다. 다행히 트럭이 아직 열려있다. 그런데 여기도 아슬아슬하게 우리가 마지막 손님이었다. 우리까지만 주문받고 트럭 셔터를 내려버린다. 그것도 밥은 다 떨어져서 새우만 나왔다. 우린 일반 Shrimp Scampi와 Hot & Spicy 한 접시씩 주문했고, 애들 먹일 밥이 필요하여 바로 옆에 있는 ‘한국 맛집 새우 갈비’ 가게에 가서 Kalbi(갈비) 한 접시를 사 왔다. 이미 집에서 밥을 해먹이고 있는데다, 이곳까지 와서 한글 간판의 가게에서 Kalbi를 사는 것은 우리 여행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애들 먹이려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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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vanni's shrimp & Kalbi]



난 원래 자극적인 음식을 매우 좋아하여 Hot & Spicy부터 손이 갔다. 내 미각은 상대 음식의 장점만을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성격을 보유하고 있어서 웬만하면 맛있게 잘 먹는 편인데, Hot & Spicy Shrimp 이건 좀 심했다. 물론, 우리가 마지막 손님이고 밥이 떨어져서 프라이팬에 들러붙어있던 남은 재료까지 싹싹 긁어 부어줘서 평소의 맛이 아닐 수는 있다. 맵고 짜고 시큼한 맛은 각각의 매력이 있어서 이들의 조합이 실패하기는 쉽지 않은데, 이번 메뉴는 정말 어이없이 맵고, 기분 나쁘게 시큼하였다.


대신 일반 Shrimp Scampi 맛은 아주 훌륭했다. 지우 지아도 입을 쩍쩍 벌려 잘 받아먹었다. 이 맛에 여길 오는구나. 하지만 난 두 접시 사이의 밸런스를 맞추어야 했다. 맛있는 일반 Shrimp Scampi는 애들이 잘 먹으니, 난 두 개만 맛보고 다시 Hot & Spicy Shrimp의 재고 소진을 위하여 숙제 하 듯 하나씩 해결해나갔고, 결국 새우 10개 중 7개 정도는 최선을 다해 먹어치웠다.


Shrimp Scampi의 맛도 물론 훌륭했지만 옆집 ‘한국 맛집 새우 갈비’에서 사 온 Kalbi가 단연 우리 입맛을 사로잡았다. 타지에서 보는 한글 간판, 유명집 옆에 기생하는 듯한 입지조건 때문에, 이 집 음식이 제일 맛있었다고 커밍아웃하는 것은 내 취향과 입맛이 너무 촌스럽게 보일 수도 있어서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지만, 나의 포크가 자꾸 그 접시로만 향하는 것을 어쩌랴.


세 접시를 모두 해치우는 동안 해는 완전히 넘어가 주변이 어두컴컴해졌고, 다시 해안도로를 타고 쭈욱 내려오는 동안, 길가에 펼쳐진 해변과 동네들이 낮에 오면 예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가로등마저 거의 없고 졸음까지 나를 엄습해와 스스로 뺨을 때리며 정신 차리고 앞만 보고 달렸다. 그리고 이틀 전에 들렀던 Kailua 지역의 Target에서 다시 장을 봤다. 맥주, 마카다미아 땅콩, 시리얼, 포도, 비타민, 애들 타월 옷, 크램 챠우더 수프, 치킨 수프를 샀고, 난 야심 차게 옷 코너로 이동하여, 고르고 골라 캡틴 아메리카 방패 모양이 그려진 티를 샀다. 드디어 샀다.


그리고 Target 가다가 우연히 발견한 Ross Dress for Less에 들러 난 6~7불짜리 면티 세장, 와이프는 핑크색 뽀송뽀송한 Tommy Hilfiger 목욕가운을 10불에 득템 하여 기분 좋은 첫 번째 쇼핑을 마쳤다. 역시 Ross Dress for Less는 매장 내 상품 찾기가 조금 힘든 것 빼곤, 뜻밖의 득템을 만나기엔 최고의 쇼핑 공간이다.


긴 하루를 끝내고 집에 돌아오니 10시. 어차피 Jet lag으로 애들 취침시간이 12시 전후일 것을 감안하면 적당한 귀가 시간이다. 역시 밤 10시의 시골마을은 칠흑 같은 어둠이다. 문 앞에 오늘 수영장에서 가지고 논 튜브가 놓여 있다. 지아는 반가워서 노란색 튜브를 번쩍 들었다가 깜짝 놀라며 ‘개미! 개미!’하면서 튜브를 던진다. 우리 애들은 개미를 왜 이렇게 무서워하는 걸까.


사실 집 안에도 개미가 많다. 사실 눈에 잘 안 띄는 작은 개미들이지만 독수리의 눈으로 바닥이나 식탁 위를 자세히 보면 개미들이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한다. 베짱이들이 기타 치고 놀 때 열심히 일하는 개미는 착한 애들이라고 수십 번을 말했건만 소용없다. 특히 지아는 개미만 보면 호랑이를 본 듯 겁에 질려 나에게 달려온다. 이번에도 난 지아를 여유 있게 쳐다보며 말했다. “개미는 무서운 게 아니야.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그리고 난 그 개미들을 찾아서 쓰다듬어라도 줄 것 같은 인자한 얼굴로 지아가 던진 노란색 튜브 쪽을 쳐다봤다.


그 순간,

난 기절할 뻔했다.

(케이블 tv였으면 이 대목에서 60초 광고가 나갈 법하다.)


튜브에서 후다닥 내려오는 건 개미가 아니라, 엄지 손가락만한 바퀴벌레 두 마리였다. 그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 것은 나뿐이었다. 난 애써 놀란 가슴을 들키지 않으려고 태연하게 신발로 바닥을 쾅쾅 내리치면서, 정신 나간 바퀴벌레들이 도망 루트를 우리 쪽으로 잡으려는 것을 막았고, 반대쪽 수풀 쪽으로 두 마리 모두 달아는 것을 확인하고, 마치 살인마에 쫓기 듯 집에 급하게 들어와서 문을 세차게 닫고 잠금장치를 잠근 후에야 비로소 진정이 되었다. 휴지를 몇 장 뽑아서 내 눈에 띄는 불쌍한 개미들만 백여 마리 죽였다.


그렇다. 난 바퀴벌레를 무서워한다. 호랑이도 안 무섭고, 곶감도 안 무섭고, 조폭도 안 무서운데, 바퀴벌레는 무섭다. 내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서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몇 개 남지 않은 또렷한 기억 중의 하나가 바퀴벌레에 관한 것이다. 부산 대신동 문화아파트 301호 시절, 가끔 집에 바퀴벌레가 나왔다. 작은놈들부터 날아다니는 큰 놈들까지. 처음부터 무서워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바퀴벌레 백 마리가 나와서 온 몸을 감싸고 기어오른다 하더라도, 심적 동요 없이 한 놈씩 차분하게 때려죽이실 분이고, 어머니도 바퀴벌레가 나오면 그냥 싫어하셨지 무서워하시진 않았다. 그런 환경에서 나만 바퀴벌레를 무서워했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 날은 분명히 기억이 난다. 장소는 안방이었고, 바퀴벌레 한 마리가 벽에 붙어 있었는데, 사이즈가 특대형이라 아버지가 해결사로 나서셨고, 형과 나는 재미있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스포츠서울을 돌돌 말아서 벽을 향해 힘차게 내리치시려는 순간, 난 믿기지 않는 광경을 목격했다. 바퀴벌레가 끔찍한 날개를 펴고 날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바퀴벌레가 날다니!!!


난 바퀴벌레가 날개가 있는지도, 날 수 있는지도 몰랐다. 나에겐 오직 새 만이 날 수 있는 생명체였는데, 저 끔찍하게 생긴 놈이 스포츠서울을 피해 날아오르다니. 처음에는 충격이었는데, 이 녀석이 차츰 저공비행을 하면서 파다다닥 소름 끼치는 소리까지 내는 것을 들으니 이내 충격이 공포가 되었고, 그 순간 벌어진 10여 초간은 내 인생 가장 공포스러운 장면 중 하나였고,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최면술사가 최면법으로 날 재운 다음 그 순간을 떠올리게 만든다면, 난 아마 몸을 부르르 떨고 울면서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바퀴벌레가 파다다닥 소리로 날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충격이었는데 나중에는 무서웠어요. 그런데 그놈과 갑자기 눈이 마주쳤는데, 방향을 급변경하여 날 향해 달려들었어요. 그리고… 그리고… 그 끔찍한 놈이 내 잠옷 안으로 기어들어왔고, 내 안에서 미친 듯이 움직였어요. 아버지가 옷 밖으로 쳐내기 전까지. 그리고 스포츠서울로 마지막 일격을 받기 전에 저와 마지막 눈이 마주쳤는데, 날 보고 ‘쫄았냐?’ 웃고 있는 듯했어요. 아무도 저에게 바퀴벌레가 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았어요. 그렇게 더럽게 생긴 놈이 날기까지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파다다닥 소리까지 내면 안 되는 거잖아요.


이게 내가 생각나는 그 날의 모습이다. 물론 마지막 10여 초는 저 기억이 맞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어쩌면 날다가 우연히 내 쪽으로 날아와서 나랑 부딪쳤거나, 1986년 헬리혜성이 지구를 근척 거리에서 돌고 지나갔듯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난 내 잠옷 속으로 그 녀석이 들어왔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고, 그 날 이후 바퀴벌레를 정말 무서워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무서움은 조금 사라졌지만, 대신 무서움이 죽도록 싫어함으로 변하여, 대학 다닐 때 가끔씩 자취방에 바퀴벌레가 나오면, 에프킬라 한 통을 다 쓸 때까지 숨통을 끊어 놓거나, 경제원론 같은 두꺼운 책으로 능지처참시키곤 했다.


그런 내가 날개의 기능의 활성화되어 있을 것이 확실한 크기의 바퀴벌레 두 마리를 한 밤중에 1m 내의 거리에서 본 것이다. 집 안엔 없겠지? 그러면서 집 안의 죄 없는 개미들만 죽이며 화를 좀 달랬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지아가 나보다 낫네. 튜브를 들었을 때, 튜브의 샛노란색과 대비되어 난생처음 보는 바퀴벌레, 그것도 두 마리가 얼마나 크고 징그럽게 보였겠는가. 그런데 그냥 ‘개미! 개미!’하고 던져 버리고는, 아무런 트라우마 없이 집에 들어와서 춤을 춘다. 나보다 강하구나, 우리 딸.


나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안방 킹 사이즈 침대에서 엄마와 딸 둘이 자고 난 거실 소파에 잤었는데, 이 날은 소파에 누워 있다가 문 밖을 몇 번 쳐다본 후, 침대 끄트머리로 기어 들어가서 다 같이 잤을 뿐. 어쨌거나 Good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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