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31 일요일, 여행 4일 차
역시 10시 기상. 이것이 진정한 Hawaii Life인 듯하다. 날씨는 여전히 믿을 수 없을 만큼 맑아서, 부산 사투리로는 “죽이네”, 영어로는 “couldn’t be better”라는 표현이 절로 나온다. 아침은 American Style로 빵, 시리얼, 크램차우더 수프, 햄, 삶은 달걀, 요구르트, 산딸기, 헤이즐럿 향 커피, 오렌지 주스로 푸짐하게 준비했으나, 지아의 “엄마 밥!” 한마디에 어제 Ginovanni’s에서 남겨 온 Shrimp로 새우볶음밥이 준비되었다.
오전은 동네 산책과 세탁을 하기로 했다. 세탁기를 돌리기 위해서는 25센트 동전 8개 필요했다. 그래서 난 25센트 쿼터를 모으기 위해 근처 맥도널드로 가서 애플파이와 아이스크림을 샀고, 가급적 많은 쿼터로 거슬러 달라고 하자, 본인들도 아침 시간이라 충분하지 않다고 하면서, 내가 필요한 딱 8개를 거슬러 준다. 난 “Eight is enough”라고 발랄하게 대답하고 윙크 한 번 해주고 나왔다.
사실 어제 저녁에 세탁을 하기 위하여 Whole Foods Market에서 도시락을 하나 사고 1달러 코인 2개로 거슬러 달라고 했더니, “What do you mean, 1 dollar coin?”이란 대답을 들었다. 그 순간 헷갈렸다. 우린 1달러 동전이 없나 보다 했다. 마치 이마트 가서 ‘천 원짜리 동전 두개 주세요.’라고 한 것처럼 부끄러웠다. 하지만, 나중에 확인해보니 1달러짜리 동전이 있구먼. 괜히 부끄러웠네. 생각해 보니 1달러짜리 동전이 없는 게 더 이상하다. “What do you mean, 1 dollar coin?”이란 말을 들었을 때, 자신감 있게 YOU에 악센트를 주고 “What do YOU mean?”이라고 대답해줬어야 했다. 물론 25센트 동전 8개가 들어가는 세탁기였기 때문에, 1 dollar 동전을 받았다고 해도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오전 집 앞 산책 중]
오늘은 Kailua Beach로 갔다. 사실 Lanikai Beach로 향하다가 Kailua Beach가 먼저 나왔는데, 압도적인 풍경에 이끌려 그대로 주차해버렸다. 이번에는 짐이 더 많다. 해변용 의자 두 개, 파라솔, 비치타월, 애들 도시락, 우리 간식, 각종 IT 기기들 등. 이틀 전 갔던 Waimanalo Park Beach보다는 파도가 잔잔하여 애들 둘을 데리고 놀기에 에너지가 덜 소비되었으나, 바닥이 너무 급격하게 경사져서 서너 발 이상 나아가기 힘들었다.
이곳은 여행객보다는 하와이 현지인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와이키키는 여행객들에게 양보하고 현지인들은 이 곳으로 오는 듯했다. 마치 해운대를 타지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송정으로 가는 부산 사람들처럼.
가만히 모래사장에 누워서 사람들을 관찰해봤다. 하와이 인종별 구성은 일본인이 가장 많다고 하는데, 이 곳에는 대부분 백인 혹은 백인과 동양인의 2세로 추정되는 사람들, 그리고 프로레슬링 선수이자 영화배우인 더락과 같은 외모와 우락부락한 근육으로 무장한 사모안들이 눈에 많이 띈다. 간혹 한 끼에 하와이안 피자 한 판을 먹고 입가심으로 무수비(밥, 스팸, 김으로 만든 하와이 스타일 삼각김밥) 서너 개를 가볍게 먹을 듯한 거구들도 보이는데, 거구들조차 적당한 근육이 몸의 밸런스를 잡아줘서 모래사장 위를 잘 뛰어다닌다.
여기 사람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나보다 잘생겼거나, 나보다 몸이 좋거나, 나보다 영어를 잘하거나. 여기서 벗어나는 사람은 없다. 나보다 영어 잘하는 사람이 거의 전체 집합을 형성하고, 그 안에 나보다 잘생긴 사람과 몸이 좋은 사람이 부분 집합으로 들어가는데, 그 둘의 교집합이 제법 크다. 이 곳에 누워 있으니, 내 몸은 순두부같이 희고 말랑말랑하고 외모는 오징어구나.
바다에 오면 1993년 여름이 생각난다. 고2 여름방학, 친구 다섯 명과 경상남도 상주로 2박 3일 여행을 떠났다. 우리 5명은 나름 수영에 자신이 있어서, 조그만 튜브 하나에 다섯 명이 의지해서 계속해서 바다 깊은 곳으로 나아갔다. 그 튜브는 딱 세 명이 팔을 걸칠 수 있는 크기였고, 어딘가 구멍이 나서 조금씩 바람이 빠지고 있었지만, 우린 돌아가며 세 명은 튜브에 매달려 쉬고 두 명은 수영을 하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나 들어왔을까. 모래사장의 사람들이 조그만 점처럼 보이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모래사장마저 가물가물해진다.
폼생폼사 중2병을 고2 때서야 겪고 있던 우리 다섯은 자존심이 달린 문제라 어느 누구 하나 먼저 돌아가자는 말을 못 한 채 바다 위에 둥둥 떠 있었고, 그 순간 우리가 떠있던 곳은 더 이상 상주 앞바다가 아니라, 태평양 초입이었다.
그러다가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썰물 타이밍이 겹쳐서 물살이 바다 쪽으로 빨라지기 시작했고, 우린 수영을 해도 뒤로 밀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고서야 서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큰.일.났.다’
그 순간, 누군가의 신고를 받고 출동했는지 해상구조대 보트 하나가 광속력으로 다가온다. 우린 하이파이브를 하며 안도의 한 숨을 내쉬고 여유 있게 손을 흔들며 “아저씨, 여기요! 살려주세요!”를 외쳤다. 하지만 이 보트는 우리 가까이 접근한 후 “이놈들, 빠져버려!”하면서 지나가버린다. 사실이 대목은 나의 기억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설마 구조대가 고등학생 다섯 명이 깊은 바다에 떠 있는데 빠져버리라는 막말을 하며 지나갔을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나의 기억엔 그렇게 남아 있다.
우린 그때부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람이 빠질 대로 빠져서 무용지물이 된 튜브를 던져버리고 모래사장을 향해 수영을 했다. 필사의 수영이었다. 그중 수영을 잘하던 친구 두 놈이 먼저 치고 나가고, 나를 포함한 세 명은 2위 그룹을 형성한 채 뒤따라 갔다.
딴 사람은 모르겠고, 난 정말 숨이 턱까지 차 왔다. 더 이상 갈 힘이 없었다. 진짜 100% 힘을 소진했다. 수경을 안 끼고 미친 듯이 수영을 했으니 내가 어디쯤 왔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제발~ 하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멈춰 섰는데, 캬! 아슬아슬하게 발 밑에 바닥이 느껴졌다. 기력을 모두 쏟아부은 우리는 물 밖으로 나온 후, 모래사장에 벌러덩 누워서 한 5분을 서로 아무 말도 없이 숨만 헐떡거렸다. 류지훈, 정현철, 방진철, 변성준, 조현호, 나 - 역시 고등학생들은 지들끼리 여행을 보내면 절대 안 된다.
사실 기억에 남는 건 그 날 저녁이었다. 우린 나름 번화한 남해 바닷가 근처 유흥가 골목에서, 여름 특수를 노리며 부스를 설치해놓고 장사를 하는 가게들을 동전을 짤랑거리면서 기웃거리며 이런저런 게임을 하면서 놀았다. 농구도 하고, 사격도 하고, 오락도 하고.
그러다가 동그란 링을 던져서 그 안에 걸린 것을 주는 게임을 했다. 인형도 있고, 돈뭉치도 있고, 장난감도 있고, 과자도 있었다. 그때 누가 던졌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동그란 링이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더니 바닥을 몇 번을 튕기다가 걸려버린 물건이…
담배!
우린 순간, 말없이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이건 아니잖아, 친구들아. 우린 겨우 고등학생 이잖아, 이건 옳지 않아.’라고 말할 만한 모범생 역할은 사실 내가 맡고 있었지만, 가오 빠지게 그 순간 그런 말을 할 순 없었다.
아저씨는 고등학교 2학년 정도면 당연히 담배를 피워도 된다는 듯, 무표정하게 담배를 우리에게 전해주셨고, 나름 고 2 여름까지 담배를 한 번도 안 피워봤던 우리, 일단 담배를 가지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문을 잠갔다.
그날 우리의 숙소 방은 너구리 굴이 되었고, 그 안에서 고등학생 다섯 명은 연신 콜록콜록거리다 키득키득 거리다가 한 갑을 다 나눠서 피운 후, 한 갑을 더 사 왔다. 그리고 그날 밤 우린 약속했다. “우리 딱 여기서만 피자. 부산 가면 무조건 끊자.”
난 당연히 약속을 지켰는데, 한 달 후 다시 만난 친구들은 너무나 능숙하게 기침 없이 속담배를 피우며 담배연기로 노련하게 도넛까지 만들고 있었다. 무심코 던진 링 하나가 여럿 골초로 만들었다. 류지훈, 정현철, 방진철, 변성준, 조현호, 나 - 다시 말하지만, 고등학생들은 지들끼리 여행을 보내면 절대 안 된다.
벌써 23년 전 일이구나. 시간 참 빠르다. 머리 속이 1993년 상주에서 다시 2016년 하와이로 돌아왔다. 지우 지아는 물놀이를 조금 하더니 해변용 의자에 앉아서 식사 후 아이패드 감상을 시작했고, 난 소중한 개인 시간을 얻어 본격적인 Kailua 바다를 만나러 나갔다. 확실히 조금만 나가도 수심이 깊어지는데, 반대로 힘이 빠질 때쯤 조금만 들어와도 다시 발이 닿으니 공평한 게임이다. 이 정도는 놀만 하다.
물 안에서 쉐도우 복싱도 하고 살랑살랑 수영하며 혼자 놀고 있었는데, 마침 옆에서 격투기 스타 마크 헌트 같은 외모에 거대한 몸집을 한 현지인이 7~8세로 추정되는 아들에게 수영을 가르치고 있어서 유심히 봤다. 그 거구 아저씨의 목까지 물이 찼으니, 수심은 170 정도로 추정되어 나도 까치발을 들고 고개를 뒤로 젖혀야 겨우 코와 입이 물 밖으로 나왔다. 그 수심에서 마크 헌트 아저씨는 실~실~ 웃으면서 그냥 아들을 허공에 던져버린다. 그리고 외친다. “swim like doggy, baby! Swim like doggy. Take it easy. Swim like doggy, baby” 역시 바다수영은 조오련이나 바다거북이 레벨이 아니면, 자유형, 배형, 평형, 접영 다 필요 없고 개헤엄이 글로벌하게 진리구나.
[수영 후 휴식. 모자 밑엔 아이패드]
잠시 후 바다에서 빠져나왔더니, 겨울이라고 바람이 제법 불어 쌀쌀함이 느껴진다. 비치용 타월은 이미 애들 몫이고 순두부 같은 내 몸은 조금씩 찰랑찰랑 떨리기 시작했고, 그래서 모래에 몸을 파묻고 누웠다. SFP 100 선크림은 태양을 바라보고 큰 대자로 좀 더 화끈하게 눕는 것을 허락해주었고, 온몸 혈관에 쌓인 찌꺼기들이 모래 속에서 사르르 녹는 듯하다. 아, 좋구나. 이건 바디프렌드 수면모드보다 더 안락하니, 300만원짜리 휴식이구나.
하늘에 구름이 한 점 없어 윈도우 배경화면으로 띄우고 싶은 하늘이었는데, 이미 양 손은 모래에 파묻힌 상태라 눈으로만 이 장면을 캡처하였다. 그런데 사실 '눈으로 담고 가슴으로 기억한다', 이런 말 난 싫어한다. 하루만 지나도 눈과 가슴으로 캡처한 장면들은 이내 사라져버린다. 나처럼 평범한 감수성과 기억력의 소유자들은 순간순간의 감동을 고스란히 담기 위해서는 사진을 최대한 많이 찍는 게 진리인 듯하다.
유독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라 파라솔도 펴지 못하는 날씨와, 그런 날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뜨거운 햇살로 인해, 우리는 예정보다 일찍 자리를 접고 일어났다. 애 둘 키우며 각종 유모차를 접는데 익숙한 몸이지만, 해변용 의자를 어떻게 접는지 각이 안 나온다. 한참을 씨름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아줌마 – 아가씨였으면 죄송 – 가 다가오더니, 본인도 같은 브랜드 의자를 쓴다며 접는 법을 알려 준다. 이럴 땐 Thank you 뒤에 so much까지 진심에서 우러나와 붙여진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길가 공터에서 닭을 구워서 팔길래 급하게 유턴을 하여 치킨 트럭으로 갔더니, 우리 앞사람에서 Sold out 되어버렸다. 치킨은 주말에만 구워서 판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하와이엔 길거리에 닭들이 정말 많이 싸돌아 다닌다. 저 닭들은 주말마다 본인들이 포동포동한 순서대로 구워질 슬픈 운명이란 것을 알까. Giovanni’s Shrimp에서처럼 마지막 손님의 행운이 찾아오진 않았지만, 다행히 우리에겐 한 번의 주말이 더 남아 있구나. 다음 주말의 치킨을 기약하자.
하와이 오기 전에 한 달 정도 운동을 해서 허리가 2인치 정도 빠졌는데, 하와이 4일 차만에 익숙하던 허리의 love handle들이 컴백했다. 2인치 빼려고 흘린 땀이 무안하게 빨리도 돌아오는구나. 숙소의 우리 냉장고는 두 번의 Target, 한 번의 Costco 쇼핑으로 <냉장고를 부탁해> 나가도 될 수준으로 먹을 것들이 풍족하게 채워져 있고, 심지어 나의 기호들이 충분히 반영된 음식들로 채워져 있어서, 말랑말랑한 살들의 리바운딩은 예상된 수순이긴 했다. 한국 돌아가서 다시 한 달 이상을 빡세게 운동해야 Hawaii Weight가 다 없어지겠구나.
집에 돌아와 네 명의 몸과 짐들에서 모래를 털어내는 샤워 및 청소에만 한 시간이 걸렸다. 우선 애들만 김, 스팸, 햇반으로 저녁을 먹이고, 우린 나가서 맛있는 거 사 먹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구 상에 김, 스팸, 햇반 조합보다 더 맛있는 음식이 어디 있단 말인가. 결국 우리도 햇반 두 개 더 돌리고 스팸 반 개 더 구워서 저녁을 먹고, 매일 새벽 1~2시 취침해서 아침 10시에 기상하는 패턴을 한번 의도적으로 끊어버리기 위해, 저녁 일정을 모두 포기하고 7시부터 온 집의 불을 다 끄고 자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절대로 어두워지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바퀴벌레 때문에 외출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다행히 수영도 했겠다, 이제 4일 차 어느 정도 시차 적응도 됐겠다, 드디어 애들을 초저녁에 취침시키기에 성공했다.
내일은 Hanauma Bay에 스노쿨링을 하러 가기로 했다. 이곳에 가기 위해 워터슈즈, 스노쿨링 장비 일체를 사놨다. 벌써 4일 차가 저물고 이제 일주일밖에 안 남았다는 생각에 잠들기 아쉬웠지만, 취침 기상 패턴을 바꿔야 하는 건 사실 애들보다 더 촌스러운 육체 시간을 가지고 있는 나부터였다. 그래서 나 역시 그동안 찍은 사진들 컴퓨터에 다운만 받아 놓고 바로 잠자리에 들어갔다. 물론 소파가 아닌 킹사이즈 침대로.
4일 차도 Good n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