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oha Hawaii - #5

2016.02.01 월요일, 여행 5일 차

by 손창우


계획한 만큼 이른 시간은 아니었지만, 정상적인 아침 시간에 눈을 뜨는 것은 성공했다. Hanauma Bay는 스노쿨링으로 워낙 인기 있는 장소라 아침 일찍 가지 않으면 주차장이 만차가 되어 입장 불가하다고 겁을 주는 블로거들이 많았다. 그래도 실제로 입장을 못했다는 사람은 없었고, 대부분 어렵사리 주차공간을 발견하여 들어갔다는 내용들이어서 급하게 서두르지는 않았다. 심지어 지금은 겨울이고 월요일인데 못 들어갈 리는 없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래서 왜 이 곳이 세계적으로도 베스트 스노쿨링 포인트로 손꼽히는지 궁금하여 구글맵으로 한 번 찾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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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uma Bay 구글맵 사진]



딱 봐도 지형 자체가 특이하다. 바람이 거의 없어 보이고, 확대했을 때 육안으로 뚜렷하게 보이는 산호들로 인해 파도가 잔잔할 수밖에 없겠구나. 내가 바다거북이나 물고기라도 이 곳에서 지낼 듯했다. 사실 저 지형은 아주 익숙하다. 학창 시절 연습장에 낙서로 만화를 그릴 때, 내가 상대의 몸통에 펀치를 날리면 항상 저런 형태로 몸 안으로 주먹이 쑤욱 들어가게 그렸었다. Hanauma Bay는 ‘악당을 무찌른 나의 왼 주먹’ 정도로 기억될 듯하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Hanauma Bay로 출발했다. Kalanianaole Highway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건 처음인데, 이 길이 또한 장관이다. 해안선을 따라 절벽들이 펼쳐지고, 가끔씩 보이는 절벽 안쪽에는 천연사이다보다 더 맑아 보이는 바다 모습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어, 아이들만 없었으면 당장이라도 다이빙해서 뛰어들고 싶을 정도였다.


마침내 Hanauma Bay 입구에 도착했는데, 뭔가 이상하다. 입구가 막혀 있다. 여기가 입구가 맞는데? 차를 U-Turn 해서 다시 가 볼 생각이었는데, 눈썰미 좋은 와이프가 입구에 적혀 있던 푯말을 보았다고 한다.


“WarningBeach Closed. Due To : Jellyfish”


이런 해파리냉채 같은 쉐이들. 여길 오려고 Target에서 장비도 다 구입했고, 어제 힘들여 애들 일찍 재우고 조기 기상했건만, 폼나게 “Warning. Due To : Shark Sighted”도 아니고 이름마저 귀엽고 맛있어 보이는 Jellyfish 해파리 때문에 돌아서야 하다니.


억울했지만 할 수 없다. 일단 쭈욱 직진했다. 계속 직진하면 와이키키가 나온다. 그 유명한 해변이라면 대안으로 손색없다. 와이키키 지역에 주차하기 편한 곳으로 검색을 해보니, Honolulu Zoo 주차장에 무료 주차를 하고, 그 앞 해변을 이용하면 된다고 나와있다. 어차피 애들 때문에 어떤 바닷가를 가던지 큰 의미가 없기 때문에, 기왕이면 무료주차가 낫겠다는 생각으로 그곳을 향했다.


한 블로거가 친절하게 올린 글 안내에 따라 Honolulu Zoo 옆 쪽 무료 주차공간에 차를 세우고,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해변을 행했다. 이 곳은 바득바득 우기면 와이키키 해변으로도 볼 수 있으나, 엄밀히 말해서는 와이키키 해변은 아니고 그 지역의 해변이다. 조금만 더 가면 자타공인 와이키키 해변이 나오는데, 굳이 모래사장도 좁고 투박한 이 곳을 찾아올 여행객은 없을 듯했다. 그래도 뒤에 공원도 있고 – 나중에 찾아보니 Sans Souci State Recreational Park라는 쓸데없이 긴 이름의 공원이다 – 지도 상으로 보니, 100미터 정도 가면 나오는 Waikiki Wall을 기준으로 위쪽으로는 Waikiki Beach, 우리가 있는 쪽은 Queens Beach로 되어있다. 해운대나 광안리나 거기서 거기지 뭐.


그래도 애들 뛰어놀긴 좋다. 뒤에 공원이 있어서 나무 그늘에 의자를 깔아놓고 바다도 들어갔다가, 공원에서 새들 잡으러 뛰어다니다가, 엄마가 주는 환상의 김치볶음밥– Whole Foods Market에서 산 “Mother-In-Law김치”와 스팸, 계랸을 넣고 만들었는데, 와이프가 맛이 어떠냐고 해서 그냥 ‘맛있다’라고만 대답했지만, 사실은 ‘기가 막히게 맛있었음’ - 을 먹다가, 아이패드 꺼내서 만화도 한 편 볼 수 있으니, 애들에겐 여기가 천국 이리라.


우리 애들은 새를 왜 이렇게 잡으려고 뛰어다니는 걸까. 새의 종류나 크기를 따지지도 않는다. 조그만 참새부터 커다란 오리와 닭까지. 내가 새라면 꼬마들이 계속 쫓아오면 반격 한 번 하겠다. 새들이 날개 파닥거리면서 제대로 한 번만 공격하는 시늉만 내도 꼬마들은 평생 새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아갈 수도 있을 텐데, 하와이의 만사가 귀챦은 표정의 새와 오리와 닭들은 이런 애들 많이 봐왔고 귀챦다는 듯, 날지도 않고 빠른 걸음만으로 지우 지아를 비켜 다닌다.


아이들과 새들의 술래잡기를 늘어져서 보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늘은 원래 스노쿨링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차에 장비가 다 있구나. 듣보잡 바다가 썩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장비를 착용하고 바다로 나가봤다. 헉, 근데 이게 웬일인가. 초반부엔 큰 매력이 없는 바다였는데,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수심이 급격히 깊어지지도 않고 가시거리도 늘어나며 발 밑으로 알록달록한 산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고기들도 하나 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개복치, 가오리, 해마와 같은 특이한 물고기는 없었지만, 아무 기대가 없었기 때문인가, 나에겐 여기가 Hanauma Bay구나.


이 장관을 보여주고 싶어서 지우도 장비 착용시키고 데리고 나왔는데, 모래사장에서 멀어질수록 겁을 먹고 나에게 꼭 안겨서 입수를 거부한다. 무섭다는데 어떡하겠는가. 그다음은 인명구조 자격증이 있는 와이프를 부추겼는데 막상 바다에 들어갔다 나오면 뒤처리가 산더미인지라, 고민 끝에 거부했다. 그래서 나만 한 번 더 들어갔다. Hanauma Bay의 맑음 정도를 100%라 보면, 여기는 80% 정도는 되지 않을까. 게다가 주위 100m 반경에 사람이 5명도 안될 만큼 유명하지 않은 곳에서의 스노쿨링이라 마치 내가 처음으로 발견한 것 같은 뿌듯함까지 더해져, 상당히 만족스러운 스노쿨링이었다.


열악한 샤워시설과 탈의시설 덕분에 대충 마무리를 하고 차를 타니, 차 안은 모래와 쓰레기들과 애들이 먹다 아무렇게나 뿌려댄 과자 부스러기들로 난장판이다. 아마 차량 털이범이 왔었더라도 차 꼬락서니를 보고 세차비 꽂아놓고 돌아섰을 법하다.


그런데 주차장에 들어서서 깨달았다. 차를 벌써 5일이나 가지고 다녔는데 아직 차 넘버를 모르고 있구나. 간지 나는 Dodge 흰색 세단인 것만 기억하고 항상 주차해놓은 위치와 자동차량 열쇠 삑삑이로 차를 찾았을 뿐, 비슷한 차 몇 개가 서 있으니 헷갈렸다. 차 넘버는 ‘RZD 905’였다. 또 유치하게 시카고 컵스 야구선수 RIZZO의 RZ, 다저스의 D, 95학번이니 905 이딴 식으로 외워버렸다.


애들은 이제 놀만큼 놀았고, 이제 아빠 엄마의 시간이다. 우선 와이키키 시내 쪽으로 들어가기 앞서, 이 곳에서 유명하다는 Leonard’s Bakery 도넛을 한 박스 샀다. 주차를 애매하게 해서 와이프만 도넛을 사러 들여보냈는데, 그것이 실수였다.


첫 번째 도넛을 먹으면서 3분의 1이나 먹었는데 안에 내용물이 나오지 않아서 달달한 내용물이 한쪽으로 쏠렸나 보다 생각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는가. 그런데 3분의 2까지 베어 먹었는데 내용물이 쏟아져 나오질 않길래, ‘아~ 기본은 아무것도 들지 않았구나. 뭐, 그럴 수 있지’ 하며, 두 번째 다른 종류의 Donut을 집었다. 어떤 내용물이 들었을까 잔뜩 기대하며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는데, 역시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때서야 물어봤다. “이거 안에 아무것도 안 든 거야?”


이곳에는 기본 Malasadas Donut도 팔고, Malasadas with filling도 판다. 당연히 안이 꽉꽉 채워진 with Custard Filling, Coconut Filling, Chocolate Filling 등을 사 왔어야 하는데, 와이프는 기본 Original과 Cinnamon Donut로만 채워진 한 박스를 사 왔다. 물론 이것도 맛있다. 하지만 빵은 무조건 안에 Something sweet 한 것이 들어있어야 한다. 그래서 20대 때 붕어빵 장사를 할 때, 난 붕어 아가리가 벌어지건 배가 터지건 신경 쓰지 않고 팥은 꽉꽉 채워 넣어 팔았다. 그런데 6개 도넛 전부를 기본으로만 사 오다니. 아, 기대했던 Custard, Coconut, Chocolate이 없는 Donut은 마치 짜장 소스가 빠진 간짜장이나, 소시지가 없는 핫도그처럼 내겐 너무나 가혹한 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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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lings가 빠진 도넛]



도넛에 대한 실망감은 쇼핑으로 풀면 된다. 곧이어 와이키키에 있는 Ross로 향했다. 역시 Ross는 쇼핑을 즐기지 않는 내게도 흥미로운 곳이다. 무질서하게 진열되어 있는 옷들 틈에서 맘에 드는 것을 발견한 후, 조심스럽게 가격표를 확인하는 과정은 짜릿했다.


남자 옷 사이즈가 Small, Medium, Large, X-Large, XX-Large, XXX-Large가 있는데, 난 주로 Small과 Medium 코너 주위를 서성였다. 사실 Medium도 커서 Medium 코너에 Small 옷이 잘못 걸려 있는 게 없나 보는 수준이었고, 구입은 전부 small 사이즈로 했다. 하와이에 일본인들이 가장 많다는데, 내가 일본인들 틈에서는 중간 사이즈는 될 텐데 Ross에선 큰 사이즈 옷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진열대 끄트머리의 small에서 옷을 고르는 것이 조금 자존심 상하기도 했다. Small이나 Medium 입는 일본인들은 모두 부자라서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는 건가, 왜 이렇게 물건이 없지?


지난번 Ross에서는 PUMA 티셔츠, Mark 뭐시기 브랜드 옷, 나시를 하나씩 샀고, 오늘은 7.9달러짜리 Texas Rangers 모자 두 개와 거금 39달러짜리 미끈한 아디다스 운동화, 그리고 7달러짜리 선글라스를 하나 샀다. 보는 것마다 사달라는 지아, 일단 무조건 카트에 실었다가 지아가 안 볼 때 슬쩍슬쩍 다시 갖다 놓았다. 와이프는 옷 세 개를 골랐는데, 좋아하는 기쁨의 크기를 봤을 때, 며칠 전 Tommy의 목욕가운만큼의 초대박 득템은 아닌 듯했다.


그리고 어느덧 저녁 시간. Ross에서 3분 거리에 있는 Jimbo 우동집으로 갔다. 나의 취향은 아니나 애들이 좋아하는 우동과 가츠동이면 안전한 한 끼가 될 수 있을 것 같았고, 설영이의 추천도 있었다. 예상대로 음식은 그냥 그랬다. 역시 내 혀와 식도는 일식에 강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Tip 주는 곳에서의 식사 치고는 조금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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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bo 우동집]



다 먹고 나오니, 해가 넘어가고 빠른 속도로 어두워져 있다. 이제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차량넘버 '리조 다저스 95학번' RDZ 905를 찾아서 자리에 앉았는데, 와이프가 묻는다. “내 가방은 트렁크에 있어?”


그 순간,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아니, 앞자리에 있었는데” 그리고 트렁크를 열어보니 역시 가방이 없다. 난 형식적으로 다시 Jimbo에 들어가서 우리가 앉았던 테이블과 화장실을 뒤져봤지만, 이미 결과는 알고 있었다. 분명히 차 앞자리에 가방이 있었다.


가방이 사라졌다. 이게 말로만 듣던 휴가지에서의 도난사고구나. 근데 차 안에는 내비게이션도 있었고 트렁크에는 간지 나는 PUMA 옷, TexasRangers 모자, 아디다스 운동화도 있었는데, 그 가방 하나만 사라졌다. 다행히 가방 안에는 여행에 지장을 줄만한 중요한 물품은 없었다. 와이프의 새로 산 화장품들과 기타 등등…만 들어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와이프 명품 선글라스… 까지만 들어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아끼는 캐논 디지털카메라가 들어 있었다.


하와이에서 처음 찾아온 냉랭한 기운이 차 안을 감쌌다. 지우도 어릴 때 Super Why 만화를 많이 본 실력으로, 나름 범인을 추리해보고 있다. 지우에게는 다른 게 문제가 아니다. 그 가방이 할머니 물건인데 우리가 잃어버렸다는 것과 가방 안에 숙소 열쇠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 집에 못 들어가는 게 아니냐는 것이 걱정의 포인트였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서늘함이 엄습해 올 땐, 빨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 영어 숙어로 그 유명한 in spite of” 카드를 꺼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맙게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 봤다.


검색을 좀 해보니, 하와이에서는 도난 사고가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 특히 차량 유리를 박살내고 절도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고 하는데, 그래도 곱게 문만 따고 가방 하나만 작업해줘서 고맙네. 그리고 또 다행스러운 것은 디지털카메라의 사진은 어제 밤에 컴퓨터로 다 다운로드하여놓은 상태라, 오늘 찍은 사진들만이 사라졌다. 물론 오늘 오전 Queens Beach와 공원에서 역대급 사진들을 좀 찍었었는데, 그 사진들이 많이 아쉽긴 했다.


또 절도범이 거지는 아니었나 보다. Leonard’s Bakery 도넛 박스는 건드리지 않았다. 아니면 나처럼 Custard, Coconut, Chocolate이 없는 기본 Donut에는 관심 없는 미식가였거나. 그리고 또 추가적인 고마움은, 지우가 이 도난 사건으로 엄마 아빠가 기분이 아주 안 좋을 것이라 예상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밤에 잠들기 전까지 아주 고분고분 말도 잘 듣고, 엄마 기분 좋아지라고 편지도 써줬다. 난 기분 나쁜 티를 많이 안 냈는지, 편지를 받지는 못했다.


난 집에서 Best Buy 홈페이지부터 들어갔다. 까짓 거 카메라 하나 더 사버릴까? 그런데 역시 가격을 보니 만만치 않다. 핸드폰 카메라도 쓸 만 한데, 아예 high-end로 가면 모를까, 비슷한 성능의 카메라를 그 가격에 장만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래서 살며시 카메라에서 핸드폰 페이지로 옮겨가서 Blackberry Phone 검색을 하고 있는데, 와이프가 조용히 쐐기를 박는다. “No~!”


잠들기 직전, 또 와이프가 한 마디 한다. “아, 맞다. 아이패드랑 카드지갑이랑 전부 차 안에 있어.” 이건 지금 나가서 가져와달라는 소리다. 절도범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았느냐, 좀 가져와달라는 소리다. 하지만 난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거 다 털려도 지금은 못 나간다!”


그렇다. 이 곳은 밤이 되면 바퀴벌레들이 파티를 한다. 처음 튜브에서 두 마리를 본 이후, 컴컴할 때 두 번을 더 나갔는데, 두 번 모두 바퀴벌레를 봤다. 나도 놀래고 바퀴벌레도 놀래고. 이건 서로에게 못할 짓이다. 또 나가서 4타수 4안타를 치게 되면 트라우마가 클 것 같다. 밤에는 이제 나가지 않는 걸로. 대신 또 죄 없는 개미들만 수십 마리 살상되었다.


이렇게 하루가 또 저문다. 하와이 일정의 반이 지나갔다. 내일 일정을 살펴보니, 아침에 Farmer’s Market 들렀다가 North shore 쪽으로 올라가면서 Giovanni’sShrimp, KuaAina 햄버거, Turtle Bay, Ala Moana 등이 적혀있는데, 5일 차 정도 지내보니 이제 확실히 알겠다. 내일 절대로 계획된 일정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잠들기 아쉬워 냉장고를 열어보니, 그래도 여행인데 맥주 한 캔도 없구나.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 와서 알코올이 없는 루트 비어만 한 병 마셨을 뿐,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나, 참 술을 안 마신다. 주량도 약하고 즐기지도 않는다.


항상 이랬던 것은 아니다. 지금 날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안 믿겠지만, 나도 진짜 술을 잘 마시던 시절이 있었다.


1997년, 그 해 나의 주량은 대단했다. 일주일에 6일은 술집을 향했다. 당시 술 멤버들은 초저녁부터 반주로 각 1병씩 마시고 얼큰하게 취한 후, 2차는 당시까진 서태지 조금 닮았었는데, 지금은 살쪄서 올밴 우승민을 닮은 한경훈이 서빙을 보던 ‘웃음소리’ 술집으로 향했다.


당시 술 멤버들 중 나만 과외를 두 개를 하고 있을 때여서, 내가 그들의 지갑이었다. 경제력으로 봤을 때 난 그들의 아버지였고, 나까지 돈이 없을 땐 경훈이가 친절히 외상을 달아주었다.


당시엔 술을 마신다는 표현보다는 고개를 확~ 제치며 소주를 입에 털어 넣곤 했었다. 부대찌개 안주가 위에 다다르기도 전에, 두 번째 소주가 또 확~ 털어 넣어졌다. 그렇게 소주 두세 병은 우습게 마시던 시절이었다. 유치하게 랭킹 매기는 것을 좋아하던 우리. 난 항상 얼굴은 하위권에서 다퉜지만– 실제로는 완전 상위권임 – 술은 언제나 내가 확고부동한 1위였다.


그 절정은 1998년 1월 8일, 성준이 생일날이었다. 생일자 성준이가 주인공이었어야 하는 날에, 친구 한 놈이 내게 술 도전을 해왔다. 난 1인자답게 당연히 도전을 받아들였고, 우리의 첫 잔은 가볍게 500cc 잔에 소주를 가득 부은 후 원샷이었다. 그때부터 투견 경기를 보는 것처럼 친구들이 광분하며 응원을 했고, 둘 다 강했다. 그 자리에서는 승부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계산하고 밖으로 나오자, 나에게 도전했던 그 친구는 8차선 도로 중간에 누워 있었다. 나의 승리였다.


그 이후, 갑자기 술이 몸이 안 받기 시작했다. 당시에 난 일시적으로 술이 약해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20년이 흘렀고, 난 여전히 술을 못 마신다. 일시적으로 술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난 원래 술이 약한데 1997년 한 해만 일시적으로 술을 잘 마신 것이었다. 1996년에 뱀만 한 지네가 내 발을 깨물고 지나간 적이 있는데, 지네의 힘으로 잠깐 내 몸의 술 해독 능력이 반짝했었나 보다.


다음번 장을 보러 갈 땐, 하와이 맥주도 몇 캔 사야겠다. 지네여, 다시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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