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oha Hawaii - #6

2016.02.02 화요일, 여행 6일 차

by 손창우


아침에 비가 내렸다.


새벽에 잠시 눈을 떴으나, 비 오는 소리가 마치 ‘지금 일어나도 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해주는 것 같아, 빗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계속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어제 밤 차에 묻은 새 똥이 씻겨 내려갈 만큼 시원하게 비가 내린 후, 빗소리가 그쳤다. 이제 6일 차 활동시간이다. 기지개를 켠 후 상쾌하게 문을 열었더니, Wow! 문 앞에 달팽이 세 마리가 간도 크게 산책 중이다.


남양주 풀밭에서 가끔씩 보이는 사이즈가 아니다. 천적도 없어 생태계 먹이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 있을 법한 사이즈다. 내 안의 미슐랭 본능이 꿈틀거렸으나, 근처에 몬산토 농장도 있던데 저 놈들은 유기농이 아닌 듯하여 무심코 들었던 포크는 살포시 제자리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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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를 동화책이 아닌 실물로 처음 본 지아가 너무 신기해했다. 경계태세를 풀지 않고 한참을 쳐다보다가 나에게 달팽이들의 이름을 물었다. 그래서 ‘달! 팽! 이!”라고 해줬더니, 그거 말고 각각의 이름이 뭔지 묻는다. 잠시 고민하다가 내 입에서 나온 것이 "갑, 을, 병".


순간, 이건 아니다 싶었다.


비록 내가 휴가까지 와서 ‘갑, 을, 병’이 포함된 계약서 검토를 좀 하긴 했지만, 한 때 문학청년이었던 내가, 그것도 휴가까지 와서 저 이쁜 달팽이들의 이름을 "갑, 을, 병"이라 짓다니. 서로 채권채무, 연대보증 관계에 있는 달팽이들도 아닐 텐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달팽이들에게 육성으로 사과했다.


그래서 다시 비사무적인 이름으로 지어주기 위해서, 잠깐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아래 사진의 장면이 나왔고, 이들에게 적당한 이름이 떠올랐다.


“이 달팽이들의 이름은, 덕선이랑 택이, 그리고 사천 내려가는 정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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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금 부지런히 다녀보기로 했다. Breakfast로는 어울리지 않는 누룽지와 불고기 조합으로 애들만 배 좀 채워놓고, 아이패드 배터리 풀로 채운 후 집을 나섰다. 일단 방향은 North Shore 쪽으로.


딱히 정해진 목적지 없이 일단 북쪽으로 올라가 봤다. 여행 경험 상, 목적지가 없을 땐 기대치도 낮기 때문에, 뜻밖의 경험들로 만족도가 높을 때가 많았다.


지난번 North Shore로 갈 땐 H2 Highway를 타고 내륙을 뚫고 올라갔는데, 오늘은 최단 소요시간 길만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을 무시하고 동쪽 해안도로를 타고 쭈욱 올라가 봤는데, 굿 초이스였다. 동쪽 해안도로는 하와이 전역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드라이브 길이었다.


동쪽 마을들은 상대적으로 아직 미개발 지역이었는데, 여기저기 “Be the country country”, “No development”, “What a shame” 등의 푯말이 붙어져 있다. 여기도 주민들이 원치 않는 개발이 진행되고 있나 보다.


오른쪽은 탁 트인 바다, 왼쪽은 웅장한 수풀을 끼고 달리다 보니, 쥐라기 공원을 찍었다는 Kualoa Ranch가 나온다. 이 곳도 하와이의 Must Visit 여행 장소 중의 하나였기에 핸들을 돌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지나쳤다. 그리고 1 km 정도 더 달렸는데, Wow!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싶은 아름다운 바다가 나온다.


일단 갓길에 차를 세우고 차분하게 주위를 살펴보니, 여기가 오늘 우리의 목적지다.


전방으로 Kualoa Ranch의 웅장한 산이 보이고, 모래사장은 아무도 밟지 않은 눈처럼 너무 곱고, 맞닿아 있는 바다는 말 그대로 에메랄드 빛이었다. 파도도 잔잔하고, 무엇보다 사람이 거의 없다. 마을 사람으로 추정되는 한 두 명만 보일 뿐.


당연히 주위에 화장실 및 탈의실이 없는 곳이라 본격적으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입수하지는 않았으나,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지난 며칠 동안 Waimanalo, Kailua, Waikiki 등 유명 바닷가들을 다녔지만, 이 곳이 단연 압도적이었다.


그래서 이 곳을 기억하기 위하여 좌표 체크. 51-329 Kam Hwy Kaaawa. 우리 가족만의 비밀 바닷가로 명명하기로 했다. 다음에 수영 및 스노쿨링 장비와 샤워에 필요한 생수 몇 통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이 곳을 다시 찾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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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바닷가 사진들]



하와이에서 가장 많은 사진을 찍은 곳. 다음에 오면 이 지역으로 숙소를 잡아도 될 듯하다.


이제 비밀 바닷가와 작별을 고하고, 다시 거북이를 보러 Laniakea Beach로 향했다. Laniakea가 하와이 말로 “측량할 수 없는 천국”이라고 하는데, 우린 30분 정도 머물렀지만 오늘도 허탕이다.


사실 우리의 운은 예측이 가능했다. Giovanni’s Shrimp에서 마지막 손님이 되었을 때, 하와이에서 할당된 운은 다 쓴 거다. 지난번과 조금 다른 위치에서 거북이를 기다려봤지만, 과연 이 곳이 거북이가 한 번이라도 나온 적이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조용했다.


거북이는 고사하고 게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동안 동화책에서 거북이 칭찬을 얼마나 했었고 레고로 거북이를 몇 번을 만들어줬는데, 두 번이나 이 곳을 찾은 나에게 이러는 거 아니다. 그래도 오늘은 한 마리 나올 때까지 오기로 좀 더 버텨보고 싶었으나, 역시 지아의 “아빠, 응가!” 한 마디에 상황 종료.


“아빠, 쉬!”는 나무 뒤에서건 차 뒤에서건 어떻게든 다양한 솔루션을 찾아볼 수 있지만, “아빠, 응가!”는 답이 없다. 모두 빠른 걸음으로 차량에 탑승하라는 명령어다.


이 황량한 곳에서 근처 화장실이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보다가, Dole Plantation이 떠올랐다. 딱 10분 정도 운전하면 도착할 수 있다. 지아도 차량 탑승 후 아이패드를 찾는 것을 보면, 일분일초가 급한 상황은 아닌 듯했다. 그래서 Dole Plantation으로 출발.


그런데 잠시 후 지아를 보니, 똥을 뱃속에 볼록하게 머금고 잠이 들어버렸다. 한 번 잠들었을 때 멀리 가야 한다. 그래서 목적지를 집으로 수정했다. 집 앞 바닷가는 산책만 했을 뿐, 그곳에서 물놀이를 하면 되겠구나. 그러면 말도 안 되는 샤워 및 탈의시설에서 모래와 사투하며 뒷정리를 할 필요가 전혀 없이, 집에서 쾌적하게 마무리하면 된다. 여러모로 지금 상황에서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주유를 해야 했다. 이미 주유 경고등이 켜진 상황에서 몇십 km는 달린 듯했다. 물론 경고등 켜진 후 일반적으로 50km 정도는 더 달릴 수 있고, 난 적당한 시속으로 안전하게 운전을 했기 때문에 추가 거리가 주어질 듯 하지만, 그렇더라도 거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난 비밀 바닷가에서 나올 때부터 주유소를 찾았는데 보이질 않았다. Dole Plantation 주변에 끝없이 펼쳐진 파인애플 농장밖에 보이질 않아서 살짝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가다가 바로 H2 Highway로 들어서면 낭패다.


2001년에 경고등이 켜진 상태로 몇십 km를 운전하다가 차가 그냥 멈춘 경험이 있었다. 그 날 내 오른발의 느낌은 베컴이 인생 프리킥을 찼을 때 전해졌을 발끝의 촉감처럼 또렷하게 남아 있다. 힘을 줘야 조금씩 눌러지는 뻑뻑한 액셀레이터 페달이 갑자기 공기가 빠진 것처럼 쑤욱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차가 날 책망하듯 “위잉~~”하는 힘 빠지는 소리와 함께 멈춰 버렸다. 그 오른발의 허무했던 느낌이 다시 찌릿찌릿하게 올라온다.


Highway가 임박한 듯하여 나의 불안함이 증폭되고 있을 때, 다행히 진입 직전에 주유소가 나온다. 휴~ 운동 후 게토레이 하나 원샷한 기분이었다.


미국에서의 주유는 정말 오래간만이라 시스템이 잘 기억나질 않는다. 잠시 기계를 눌러보다가 주유소 편의점에 들어가서 어떻게 주유하는지 물어보니, 거기서 카드를 긁어준다. 아, 이런 시스템이었지, 기억이 되살아났다. 스팸 삼각김밥인 무수비가 진열대 앞에 수북이 쌓여 있었으나, 왠지 유통기간이 지난 듯한 허술한 포장상태에 손이 가지는 않았다.


미국은 갤런당 2.4불 정도다. 1갤런이 3.78리터 정도 되니, 리터당을 계산하면 약 750원 정도 된다. 한국의 반값 정도다. 한국과 미국의 휘발유값 차이는 가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한국의 Tax로 설명하면 심플해진다.

그런데 최근 우리 집 앞 주유소는 리터당 1,300원인데, 삼성동 사무실 근처 주유소는 1,800원이다. 산유국이 기름 싼 것이 당연하다면, 우리 동네에는 기름이 나오기라도 한단 말인가.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이 정도 가격 차이는 쉽게 이해가 가질 않는다. 지역별로 정유사로부터의 납품 단가는 큰 차이 없을 테고, 임대료 및 인건비 정도로 설명이 되어야 할 텐데, 우리 동네가 읍면리도 아니고 나름 서울 근교 지역임을 감안하면, 결국 강남 지역에서 주유하는 사람들이 호갱님들이구나. 리터당 1,300원 지역의 거주자로서 개인적인 불만은 없다만, 단통법만큼 휘통법이 필요해 보인다.


결국 30달러로 탱크 3/4를 채우고 홀가분하게 다시 출발해서 집으로 돌아왔고, 수영복으로 갈아 입고 100미터 거리의 집 앞 바닷가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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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바닷가 가는 길]



위치상으로는 Waimanalo 해변 끄트머리 정도에 자리 잡은 조그만 바닷가지만, 하와이 바다라기보다는 어린 시절 다대포 같은 분위기다. 파도는 적당한 Medium 수준이나 에메랄드 빛 해변은 아니었다.


이미 저녁 5시가 다된 시간에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 제법 추웠는데, 바다에 들어가니 의외로 따뜻했다. 지아의 컨디션이 안 좋아 와이프가 먼저 데리고 돌아가고 나랑 지우만 놀았다. 해가 떨어지고 나니, 아무래도 정신없이 노는 지우를 더 놔두면 감기에 걸릴 듯했다.


이럴 땐 뭔가 Ending이 딱 떨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큰 파도 20번만 맞고 들어가자고 했는데, 아직 20을 몹시 큰 숫자로 생각하는 지우는 좋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잔잔한 파도는 건너뛰고 20번의 파도를 둘이서 손잡고 점프하며 부딪쳐나갔다. 특히 마지막 20번째 파도는 내 몸이 흔들릴 정도로 짜릿하여, 지우랑 서로 하이파이브하며 기분 좋게 마무리했다.


해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비치타월로 드레스를 만들어줬더니 좋아한다. 아직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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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바닷가 풍경]



집에서 한 명씩 샤워를 하고, Giovanni’s Shrimp에서 먹다 남은 밥과 새우, 그리고 스팸과 아침에 먹다 남은 불고기, 어제 산 Mother-In-Law 김치, 설영이를 주려고 가져왔다고 배달사고를 낸 떡볶이로 푸짐한 저녁이 준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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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면 이 지역을 떠나 새로운 숙소로 간다. 벌써 여행의 3분의 2가 흘렀구나. 아쉬운 마음에 저녁을 먹고 난 다음 Kailua로 저녁 외출을 떠났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이라, 아직 바퀴벌레들의 출근 전 시간이었다.


Ross를 한 번 더 갈까 하다가, 바로 옆의 Whole Foods Market으로 갔는데, 왜 진작 여길 안 오고 Target과 Costco에서 장을 봤을까 후회가 될 만큼, 진열 상품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기본적인 생활용품들과 유기농 식품들을 파는데, 구석구석 가지고 싶고 먹고 싶은 것들 투성이다. 여기서 살면 몸 제대로 타락할 듯했다. 난 가게에서 나오기도 전에 우리가 내일 옮기는 지역 주위에도 whole foods Market이 있는지 검색해보니, 하와이에 총 3군데, 그중 오하우에 2군데, 여기와 호놀룰루 남쪽에 하나씩 있다. 위치를 보니 다시 와지진 않겠구나. 그래도 예전에 처음 Costco 갔을 때 느꼈던 새로운 매장에서의 쇼핑의 즐거움을 오랜만에 다시 느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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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le Foods Market]



애들은 컵케익에 꽂혔다. 원래 애들은 작고 이쁘게 생긴 걸 좋아하는데, 심지어 맛까지 끝내주게 생겼으니 저걸 어떻게 지나치겠는가. 지우가 그중 젤 이쁘지만 딱 봐도 맛은 별로일 것 같은 컵케익을 골라서 하나 사줬더니, 지아가 또 난리다.


지우는 본인이 무조건 하나를 다 먹을 거니까 나눠줄 수 없다고 버텼고, 지아는 울부짖으며 “나도! 나도!”를 외쳐서 똑같은 컵케익을 하나 더 사줬다. 둘 다 이 컵케익을 샤넬 가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양 손으로 조심조심 들고 다녔다. 물론 아직 밸런스 잡는데 서툰 지아의 컵케익은 나중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지만.


예상대로 애들은 집에 와서 컵케익을 한 입 먹어보고 나서 맛이 없다고 당황한다. 딱 봐도 이건 그냥 관상용 케익이었다. 지우에게 ‘그러게 왜 아빠 엄마가 하나만 산다고 했을 때, 혼자 다 먹을 수 있다고 고집부려서 두 개를 사게 만들었냐’고 살짝 핀잔을 주자, 책임감을 통감하며 Penalty성으로 꾸역꾸역 하나를 다 먹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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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컵케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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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케익이 맛이 없어 당황해하는 아이들]



생각해 보니, 6일 동안 Tip을 내는 레스토랑은 딱 두 번 가봤다. 설영이와의 Mariposa 저녁, 그리고 가방을 잃어버렸던 Jimbo 우동집. 나머지는 도시락을 싸서 먹거나, 픽업트럭에서 먹거나, Target, Costco, Whole Foods Market에서 장본 후 집에서 해 먹었다.


물론 현지 음식을 먹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이고 우리도 그 부분을 고민해봤지만, 이번 여행은 그냥 아빠 엄마의 여행이다.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경험시켜 주고 싶지만, 그러다 보면 어른과 아이들 모두 만족하기 힘든 여행이 될 듯하여, 우린 그냥 애들에게 아이패드를 후하게 허락해주며 어른 위주의 여행을 했다. 그러기 위해서 적어도 애들 밥은 수월하게 먹여놓고 다니는 것이 우리가 편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지우 지아가 조금 더 커서, 스스로 여행 계획을 세울 수 있을 때쯤 되면, 아이들 중심의 여행을 해보리라.


이렇게 하루를 보내는 동안, 카톡 및 이메일로 계속 업데이트되고 있는 사무실 소식. 오늘 한국시간 2016년 2월 3일, 겨우내 일하던 딜이 마침내 Closing 되었다. 마무리를 눈 앞에 두고 여행을 떠나서 남아있는 분들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쨌거나 충분히 열심히 한 지난 몇 달이었고, 하와이에서 가족들 모두 잠든 상태로 Deal Closing 메일들을 확인하니, 이 또한 운치가 있었다.


이제 5일 후면 돌아가고, full day로는 4일 남았다. 하와이를 4박 5일로 오는 사람들에겐 설레는 첫 번째 밤이겠지만, 벌써 아쉽구나. Good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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