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양이 가족을 그리는 방식은 독특하다. 예컨대 봉준호는 세상과 맞서기 위해 규합해야 할 최소 단위의 공동체로 정의하고,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공범으로써의 연대 의식이 맺어준 비혈연 관계로 바라본다. 그러나 이들의 영화에서는 적어도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와 소통하며 각자의 동선을 교차한다. <하나 그리고 둘>은 흩어진 가족 일원들이 한 곳에 모이는 이벤트들 - 결혼식과 장례식 - 로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 얼핏 봐서는 가족이 중요한 키워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을 다 보고 나면 가족 영화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위화감이 든다. 가족 영화를 하나의 장르라고 가정한다면 <하나 그리고 둘>에는 이 장르에 부합하는 컨벤션들이 부족하다. 예컨대 이들은 공유하는 공동의 가치도 없어보이고 서로 간섭도 그다지 하지 않는데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모두 각자도생이다. 이러한 속성을 보이는 것을 사람들은 가족이라 부르지 않는다. 세대라고 부른다. 즉 에드워드 양은 가족 영화가 아니라 세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구성원들이 보이는 이 단절이 중요해보인다. 그건 마치 지각의 단층들처럼 지속된 시간 속에서 겹겹이 누적된 흔적들이다. 이들은 서로와 섞이지 않고 오롯이 그들만의 세대를 표상하면서 스스로의 존재를 버텨낸다. 그렇기 때문에 가령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서 에드워드 양이 잘라낸 단면을 통해 1960년대 과도기 대만의 거대한 지도를 그려낼 수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세대적 감각으로 그 시대를 받아들인다. 여기에는 어떤 인구통계학적인 낯설음이 느껴진다. 당연하다. 우리는 우리 외의 세대를 이해할 수 없으니. 때문에 에드워드 양의 영화 속 가족 구성원들은 계속해서 평행선을 달린다. 할머니는 아들의 결혼식에서 쓰러진 후 의식을 되찾지 못한다. 아버지는 30년 전 애인과 일탈적 여행을 떠나고 딸은 본의아니게 삼각관계에 휘말리며 첫사랑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녀의 남동생은 학교에서의 괴롭힘을 극복하기 위해 사진 촬영에 눈을 뜬다. 이들은 서로의 문제를 해결해주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의 원인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그리고 둘>이 차갑지 않고 이토록 겸허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거기에는 남동생인 양양의 독특한 사진술이 힌트를 제공한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카메라를 갖고 그는 먼저 모기를 찍기 위해 복도를 어지럽게 돌아다닌다. 왜 그러고 있냐는 이웃 아주머니의 질문에 그는 어머니에게 보여드리기 위함이라고 답한다. 꼭 눈으로 봐야지 믿을 수 있다고 했어요. 8살된 꼬마아이는 그렇게 인생의 첫번째 진실을 배우게 된다. 우리는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이를 사고체계의 근거로 사용한다. 모기를 촬영한 사진은 모기가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이는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이다. 양양은 얼마 안 있어 이 진실은 반쪽짜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빠는 아빠의 뒷모습을 못봐요. 그는 정말 영리하게도 우리가 볼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이 절반밖에 되지 않는 것을 알아챈다. 그렇다면 그가 어머니로부터 배운 첫번째 명제에 모순이 생긴다. 스스로를 절반밖에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나의 삶을 온전히 믿을 수 있는가. 때문에 양양은 카메라로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기 시작한다. 삼촌이 못 보니까 제가 대신 보여드리는 거에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 준다는 것. 그는 인생의 두번째 진실을 배우게 되고 이번엔 그걸 스스로 알아낸다. 하나, 그리고 둘, 이다. 우연히도 이는 사진을 찍기 직전에 사람들이 외치는 큐사인과도 같은 울림이다.
극 중에서 양양은 누나나 아빠, 또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찍지 않는다. 그런 장면들은 영화 속에 없다. 하지만 관객들은 모두 양양의 사진술에 따라 - 또는 에드워드 양의 영화술에 따라 - 그들을 시선 속에 담게 된다. 이 때 그들의 인생에서 하나는 무엇이며 둘은 무엇일까. 아버지는 그의 말대로 정말 한 사람밖에 사랑하지 않았을까. 딸은 왜 그렇게까지 서럽게 울어야 했을까. 할머니는 자식들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떠났을까. 그들은 자신의 삶에 비로소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들은 결코 해소가 될 수 없는 물음표들이기에 불안하고 아름답다. <하나 그리고 둘>은 바로 이 불안과 아름다움을 통해 전 세대를 다시 통합시킨다. 인간은 스스로 조차 완전히 알수 없는 결핍 가득한 존재들이므로 서로를 채워주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손자는 할머니를 채워줄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되지 않을까. 할머니는 나도 이제 늙었구나, 라면서 그것을 인정하고, 손자는 나도 이제 다 컸구나, 라면서 그것을 인정한다. 그렇게 인생은 한바퀴 돌아 제자리로 온다. 앞모습에서 시작해서 뒷모습으로 끝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