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아는 영웅담은 운명에 맞서 싸우는 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린 나이트>는 반대로 운명을 받아들이는 자에 관한 이야기다. 운명이란 표면적으로는 녹색 기사가 제시한 게임의 규칙에 의해서 정해진다. 즉 자신에게 가한 일격은 1년 후에 그대로 되돌려주겠다는 것이다. 가웨인 경은 이 조건을 수용하여 녹색 기사를 참수하였으므로, 그 역시 1년 후에 목이 잘려야 마땅하다. 마침내 찾아간 녹색 예배당. 가웨인 경은 녹색 기사가 너무도 단순하게 그의 목을 자르려고 하자 당황한다. 이게 다인가. 그렇다. 녹색 기사는 답한다. 게임의 규칙 하에서는 가웨인 경에게 다른 옵션은 없다. 1년 후에 참수를 약속했으니 가웨인 경은 그걸 위해 녹색 예배당에 도착했으며 녹색 기사는 그걸 수행할 뿐이다. 허무함이 몰려온다. 그것이 운명의 속성이다. 인간은 이 결정론적인 우주의 매커니즘 앞에서 무력하다. 가웨인 경이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 녹색 기사의 도끼는 이를 상징한다. 언젠가는 그의 목을 베기로 예정된 도구를 그는 충실하게 짊어지고 모험을 지속한다. 이것은 마치 기요틴이나 전기의자를 들고 다니는 것 마냥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운 광경이다. 이 모험은 말하자면 자살행위이다.
그러나 <그린 나이트>에서의 운명은 보다 심층적인 속성이 있다. 바로 가웨인 경의 열등감이다. 녹색 기사를 찾아가 승부를 보는 것을 망설이고 있는 가웨인 경은 아서 왕에게 말한다. 제가 위업을 달성할 수 없는 운명일까 두렵습니다. 하루빨리 기사로 인정받아 왕의 대를 이어야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음에도 그에게는 크리스마스 연회장에서 풀 수 있는 무용담 하나 없다. 그는 영웅적 면모가 충만한 자가 아니며, 그러한 결핍을 하층 계급에 속하는 매춘부 에셀로부터 받는 위로로 채우는 나약한 인간이다. 소명에 따라 위대함의 서사를 쫓으면서도 조금이라도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 오면 바로 도망치는 겁쟁이다. 그런 스스로를 가웨인 경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형편없음을 벗어나지 못할 때 인간은 본인에게 족쇄를 채우고 운명 그 자체가 된다. 그가 허리에 둘러찬 복대가 이를 상징한다. 마법의 룬 문자들이 새겨진 이 복대는 그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안전장치이다. 일생일대의 모험에서 그는 자신의 목숨 하나 지키고자 얄팍한 미신에 의존한다. 이는 그가 손에 든 녹색 기사의 도끼와는 정반대의 방향이다. 죽음의 운명과 삶의 운명. 그는 대체 어느 쪽을 원하는 것인가.
성주도 질문한다. 너는 이 모험에서 무얼 얻고자 하지? 이 때 가웨인 경은 다소 횡설수설하며, 기사가 되어 명예를 누리는 것이라고 답한다. 재밌는 것은 그가 녹색 기사와의 승부를 저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면 이를 모두 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왕 옆의 빈자리는 결국 유일한 혈육인 가웨인 경이 왕위를 계승해야 함을 뜻하며, 이를 위해 기사로의 서임도 따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다. 이에 필요한 최소한의 근거는 바로 녹색 기사 모험담인데, 실제 있었던 크리스마스 날의 결투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좀 거짓말을 하면 어떠랴. 본인 말고는 증인도 없는 이 여정을 마무리짓지 못했다고 나무랄 사람은 없는 것이다. 심지어 주변 인물들도 - 아서 왕과 녹색 기사만을 제외하면 - 일관되게 그가 모험을 포기할 것을 회유한다. 즉 모든 외적인 조건들은 그가 삶의 운명을 택하도록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가웨인 경은 고집스럽게 죽음의 운명을 결판지으려 여정을 지속한다. 기사가 되어 명예를 누리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가웨인 경의 모험은 끝까지 갈 때 오히려 성립이 되질 않는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온갖 고난을 거쳐 녹색 예배당에 도달한다.
가웨인 경에게 고결함이 있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미 그는 삶의 운명이 제시하는 유혹의 속성을 간파한 상태인 것이다. 거기에는 그의 열등감이 강력하게 작용한다. 스스로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 명확한 자들은 다른 이들의 아첨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서 오직 자기 자신만의 평가에 의존한다. 열등감이 강한 사람들이 더 크게 성장하는 까닭이다.
한계에 대해서 먼저 말해보자. 이 관점에서 보면 가웨인 경이 녹색 기사에게 목을 내밀어 바치는 순간의 플래시 포워드 - 약 20분 간 펼쳐지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몽타주 시퀀스 - 는 이미 그가 모르는 이야기가 아닌 셈이다. 그는 녹색 기사와의 결투로부터 도망쳐 집으로 돌아온다. 기사가 된 그는 왕위에 오르며, 그의 신분에 맞는 아내를 들이기 위해 에셀을 버리고 타 지방 영주의 딸과 결혼한다. 그의 무능으로 인해 그의 아들은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가웨인 경은 왕으로써 존경받지 못한다. 머지않아 카멜롯은 공격을 받게 된다. 적들이 그의 문 앞까지 찾아온다. 그 순간 가웨인 경이 허리에 둘러찬 복대를 풀자 그의 머리는 참수되어 바닥을 나뒹군다. 이상이 그가 평생을 스스로에게서 보아왔던 자명한 한계들이 만들어낸 총체적 난국의 환영이요, 비극이다. 모든 것이 그의 목이 잘리는 순간을 향해 달려가는 참담한 예지몽이다. 가웨인 경은 비겁하게 살아남아 비참하게 죽는다. 그것은 얼핏 삶의 운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죽음의 운명이다.
그렇다면 가웨인 경의 이야기는 결국 두 죽음의 운명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이미 죽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으며, 지금 아니면 나중이다. 녹색 기사의 도끼는 바로 그의 머리를 칠 수 있으며, 복대는 그러한 시간을 유예시켜줄 수 있으나 그의 참수는 막을 수 없다. 그럼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평가가 다르다. 더 정확하게는 가웨인 경 스스로의 평가가 다르다. 후자를 택할 경우 그는 삶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겁 많고 무능한 그가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선택이다. 그 결과 그는 한계를 돌파하지 못한 인간으로 스스로 평가내린채 죽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건 거짓된 삶의 운명이다. 그렇다면 전자는 어떠한가. 죽음의 운명을 받아들였을 때 가웨인 경은 그것을 버텨낼 수 있는 용기를 자신으로부터 끌어내고야 만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것만이 그로 하여금 유혹을 버리고 인생 앞에서 당당하게 설 수 있게 할 테니까. 그는 실제로 그렇게 함으로써 한계를 넘어선다. 그의 선택을 온전히 스스로의 평가에서 긍정할 수 있게 되자, 가웨인 경은 진정한 기사가 된다. 무릎을 꿇은 그에게 녹색 기사는 그의 도끼로 기사 서임식을 거행한다. 이 몇 초 안되는 시간 동안 그는 살아있다. 이것이 두 거대한 죽음의 운명 사이에서 그가 마침내 찾아낸 진실된 삶의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