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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현 Mar 14. 2023

애프터썬


영국의 한 비영리 공익 단체가 만든 광고는 사람들의 행복한 순간들을 담은 일련의 영상들을 보여준다. 이들은 갓난 아기와 같이 놀거나 친구들과 장난을 치기도 하며 가족의 선물을 받고는 신나게 춤을 춘다. 광고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마무리된다. 이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사람들의 마지막 영상들입니다.


불행을 겪고 나면 우리는 사후적으로 그 징후들을 더듬더듬 되짚어본다. 이것만 내가 미리 알았더라면 그 아이의 병을, 우리의 이혼을, 또는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텐데, 하고 말이다. 한동안 이는 우리의 사명이 되어, 명확한 원인만 규정할 수 있다면 심지어 그 불행을 되돌리는 것도 가능하다는 헛된 기대를 하게 된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모든 것이 우리를 지나쳐버린 다음이다. 그걸 깨닫는 순간 사고의 전개는 목적지를 상실하고 왔던 길로 또 되돌아가기를 수없이 반복하다가 그 자리에 영원히 맺히게 된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 고장난 비디오 테이프들을 몇 편씩 머릿 속에 보관해놓고 있다가 문득 이를 재생시키고는 한다. 영상들 속 우리의 모습은 곧 닥쳐올 불행에도 한없이 순진무구해 보인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 중에서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불행인가, 아니면 그 순진무구함인가.


샬롯 웰즈의 데뷔작 <애프터썬>은 위의 광고 속 영상들 중 하나를 장편영화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는 오래된 캠코더 영상들 위에 빛나는 기억의 조각들을 수놓아 아버지와 딸이 20년 전 튀르키예에서 보낸 그들의 마지막 여행을 관객들의 눈 앞에 생생하게 펼쳐보인다.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우리는 <애프터썬>이 하나의 거대한 플래시백이라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러나 이게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는 것을 몇 가지 단서들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첫째, 서사의 부재다. <애프터썬>은 일관된 화술을 통해 사건들을 연속으로 이어서 결말로 향하는 구조의 영화가 아니다. 기본적인 시간 순서는 지키나 장면 간 연결고리는 느슨하다. 이들의 여행은 대체로 별 일 없이 흘러가며, 각 장면들은 스냅샷처럼 개별적인 인상의 기록으로서 기능할 뿐이다. 둘째, 정서의 불안정성이다. 특별한 사건이 없음에도 이들은 시종일관 흔들린다. 지중해의 일렁이는 수면 위로 부서지는 햇빛처럼, 또는 바람에 의해 이리저리 방향이 뒤바뀌는 패러글라이더처럼, 영화 속 장면들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끊임없이 동요한다. 이것이 심리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이라면, 그 불안의 출처는 대체 누구인가. 셋째, 기억의 주체다. 이 여행을 회상하고 있는 소피를 감정적 근원으로 지목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어딘가 석연찮은 부분들이 있다. 영화는 파편화된 기록과 경험으로 이루어져있지만 어떤 것들은 아예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예컨대 소피는 없고 그녀의 아버지만 있는 몇몇 장면들이 그렇다. 영화가 소피의 기억을 토대로 한다면 그녀가 애시당초 겪지 못한 이런 순간들은 떠올릴 수가 없다. 이런 이상한 대목들이 영화의 서술적 진정성 자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놓친 것들을 뒤늦게 복기해보고 마는 것이다. 너무 빠르게 그 순간들을 지나쳐 온 나머지 모든건 백미러를 통해서만 되돌아볼 수 밖에 없게 된다. 거울에 비치는 상들이 왜곡되는 것처럼 그 거리감은 온통 잘못되어 있다.


영화 속 기억은 결국 소피가 그녀의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쓰는 안간힘이다. 그녀에게는 너무도 즐거웠던 그 해 여름, 아버지는 반대로 모든 것이 불안하거나 두려웠다. 그걸 비로소 깨달은 지금에야 그녀는 그 기억을 재편집하는 작업에 착수한 셈이다. 분명 소피는 불완전한 기록을 보고는 수많은 공백들이 눈에 띄어 마음이 아팠을 것이고, 이를 메꾸기 위해 스스로 보정값을 적용해야만 했을 것이다. 진실에 닿기 위해서 허구를 끌어들여 그 빈 공간을 채워넣은 셈이다. 그렇게 그녀는 기억 속의 아버지가 아닌, 상상 속의 아버지를 만들어 우리 앞에 소환해낸다. 소피가 경험하지 못한 그 순간들 속에서 그는 난간 위에 위태롭게 올라 서있거나 혼자서 밤의 어두운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가 하면 알몸으로 유서를 쓰고 서럽게 운다. 아빠가 내 나이였을 때는 지금쯤 뭐가 됐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는 소피의 질문에 말을 잃고 캠코더를 빼앗아 꺼버린다. 어느덧 서른살, 인생은 그의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기록이 중단된 순간은 기억 속에서 다시 되풀이되나 이는 온통 회환으로 가득하다. 그런 모습들이 안타까워도 소피가 이제와서 할 수 있는 건 바라보는게 전부다.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집요한 응시로 뒤바뀐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 아버지의 정신 상태에 대한 경고도, 그와의 정서적 교감도 너무 뒤늦게 도착해버린 것 같다.


그러나 지극히 영화적인 방식으로 <애프터썬>은 그 시차를 극복한다. 딸을 떠나보내는 비행기 승강장 앞에 선 아버지의 시선은 1분에 걸친 경이로운 카메라 패닝을 통해 20년 후 소피의 시선과 맞닿고, 그것은 반바퀴를 더 돌아 마침내 그에게 되돌아온다. 그 두 사람은 삶의 의문을 떨쳐버릴 수 있었을까. 더 이상 같은 해를 보지 못하는 그들이 그 순간 공유한 것은 일시정지된 비디오 테이프 속 어린 소피의 해맑은 웃음이다. 이미 그을린 상처 위에 바르는 선크림처럼, 그것은 한없이 덧없고 부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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