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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현 Mar 14. 2023

부운


그 누구도 자신이 겪을 시대를 고를 수는 없다. 때문에 사람들이 일생 동안 보일 수 있는 최대 운신의 폭은 모두 그 시대로부터 제한받는다. <부운>의 원작자인 하야시 후미코 역시 그러한 삶을 살았으며, 그것이 그녀가 작가로써 천착했던 문제였다. 분명 그녀의 소설 속 여성들은 주어진 한계의 끝까지 자신들의 삶을 밀어붙인다. 사회의 시선에서 보다 자유롭고자 하고 매사 능동적으로 행동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에 솔직하다. 페미니즘 소설의 효시 격이라고 상투적으로 표현해봐도 좋을 것이다. 물론 이를 현대의 기준으로 납득하기에는 색안경을 통한 다소의 보정이 필요하나, 이 역시 당대 여성들이 살아가기 위해 만족해야 했던 조건들을 더 직관적으로 폭로한다. 바로 그 시차가 그녀의 소설들, 그리고 이를 원작으로 하는 일련의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들을 이해하는 핵심 보조장치일 것이다. 만약 이들의 작품 속 인물들이 충분히 도약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건 그들의 한계가 아닌 천장의 한계다.


<부운>의 멜로드라마는 전후 일본이라는 시대를 품는다. 패전 국면 하에서 남성들은 이미 전사했거나 패잔병이 되어 돌아왔고 여성들은 과부나 양공주가 되어 힘들게 삶을 지속한다. 당면한 현실로 인해 일본 국민들은 전쟁 기간의 제국주의 시절을 낭만적으로 회상했는데, 나루세 미키오는 소위 좋았던 날들을 기억하는 두 남녀의 치정극을 통해 특수한 로맨스의 조건들을 만들어낸다. 도미오카는 끝없는 우유부단함으로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남자고 유키코는 그런 그를 가만히 놓아주질 않는다. 이들을 처음 연결시킨건 두 사람을 인도차이나로 파견보낸 식민지 정책이지만 이후 도미오카의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를 지속시킨건 유키코의 순수한 의지이다. 즉 시대가 맺어준 인연을 남성은 단절시키려 하고 여성은 봉합시키려 한다. 두 인물의 각기 다른 욕망은 자연스레 당시 일본 사회 기저에 깔려있던 국민적 정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흥미로운 것은 이 욕망의 전개 과정 속에서 시대가 이 두 인물들 - 내지는 남성과 여성 - 을 대우하는 방식이다. 패전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들임에도 극 중 남성들은 불륜과 위선 그리고 무능을 반복한다. 심지어 전후 인구의 성비 - 그리고 성분 - 를 반영한듯 이들은 대체로 그들의 배우자들보다 늙었거나 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성들을 취하는데 어려움이 없으며 결말에 이르면 상실했던 경제적 가치도 되찾게 된다. 예컨대 도미오카는 다시 농림부 공무원으로 복귀하여 방황을 끝낸다. 남성들의 방황은 패전의 맥락 하에서 사회가 잠시 눈 감아줬던 것이므로, 일시적이다. 그러다가 어느새 국가의 슬로건이 패전에서 재건으로 바뀌게 되자, 이들 역시 빠르게 국면 전환하여 다시 일어선다. 그들의 입지는 사회의 발전과 맞춰 저절로 회복된다. 남성들의 서사는 시대의 서사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는 것이다.


반대로 유키코는 도미오카가 그랬던 것처럼 그 서사에 편입되지 못한다. 아니, 편입되기를 거부한다. 그녀로 표상되는 전후 일본의 여성들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처럼 제대로 된 배우자를 찾지 못해 부유하거나, 미조구치 겐조의 영화처럼 끊임없이 성적 피해자로 고통받는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서 유키코란 인물은 자신에게 강요되는 시대의 제한을 거부할 수 있는 주체성을 가졌다. 그 저항의 방향성에 대해 다르게 평가할 수 있으며, 역사가 굴절시킨 여러 착시 효과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 자신이 원하는 남자를 쉬지 않고 밀어붙여 끝내 쟁취하고 만다. 도미오카를 따라 오게 된 오지의 섬에서 유키코는 결국 병에 걸리지만, 그녀는 말한다. 당신 옆에서 죽는 것이 내 소원이었어요. 혼란한 시대, 남자는 살고 여자는 죽는다는 단순한 도식을 넘어서는 것은 유키코가 힘겹게 완성한 마지막 문장이다. 그녀의 처절한 변호 끝에 전후 일본의 여성들은 올바른 존엄의 위치로 복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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