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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영 Jan 25. 2024

'─ 었었다'를 아시나요?

교정교열가는 무엇을 고칠까?

아침마다 실내 자전거를 타며 영어회화 방송을 듣는다. 어쩌다 늦잠이라도 잔 날에는 “망했다.” 소리가 저절로 나올 만큼 하루 가운데 매달리는 시간이다. 그런데도 가끔 도저히 못 참겠어서 앞으로 건너뛸 때가 있다. 


“우리나라 말이 제일 어려워요. 그죠?”


과거 완료 진행 부정[(had+not+been)+동사+ing] 표현을 가르치면서 선생님이 말했다. 그의 가르침대로 하면 ‘I had not been thinking of you’는 ‘나는 (그때까지) 너를 생각하고 있던 게 아니었어’가 된다. 


이렇게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이 모두 한국 사람인 건 참 이상한 일이다. 나만해도 외국인 친구 한 명 사귀어보겠다고 달마다 결재하고 있으니 뭐라 할 말은 없다. 그래도 저 풀이가 우리말이 아니라는 걸 짚고 넘어가려고 때마다 다짐한다. 


그저 한글로 써놨다고 해서 다 우리말이 되는 건 아니다. ‘나는 (그때까지) 네 생각 안 했어’라고 써야 옳다. 이러면 저 영어문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할 사람이 있겠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건 우리말법은 아닌데, 영어 시제가 열두 가지나 되니까 이렇게 나누기로 하죠.”하고 설명이라도 덧붙였으면 좋겠다.  


우리글은 ‘-었었다’라고 쓸 일이 없다. 우리말의 때매김(시제)은 이적(현재), 지난적(과거), 올적(미래)에 나아감을 나타내는 때로써 ‘-고 있다’, ‘-고 있었다’, ‘-고 있겠다’가 있을 뿐이다. ‘지난적끝남때(과거완료시)’라고 해서 ‘-었었다’고 쓰는 말법이 없다. 물론 ‘있던 게 아니었어’하는 표현도 있을 수 없다.


서어나무 님의 글에도 ‘-었었다’가 자주 보였다. 지난날을 떠올리며 쓴 글이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썼을 테고, 나도 다르지 않다. 어릴 때부터 배운 모든 교육과 온갖 읽을거리들, 방송인들의 말과 글에 익숙해져 어처구니없는 잘못을 되풀이한다. “우리말이 제일 어렵네.” 따위 소리에 고개를 끄덕일 때도 얼마나 많았는지. 


그렇다면 ‘-었었다’는 어떻게 고쳐 써야 할까? 서어나무 님의 글을 본보기 삼아 배배 꼬지 않는 우리글의 멋스러움을 다시 알아차리자.(‘-었었다’ 말고도 고쳤으면 하는 부분도 함께 표시했다.)


● 그도 그럴 것이 조리원에는 초산모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많았는데 나는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었다. (않았다.)


● 아이마다 요구하는 머리 스타일도 달랐기 때문에 매번 다양한 방법으로 머리를 묶어줬었다.

→ 아이마다 해달라는 머리 모양도 달랐기 때문에 그때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묶어줬다.


● 걸핏하면 나의 실패와 괴로움을 환경 탓, 가정 탓으로 돌렸었다. (→ 돌렸다. )



다음은 때매김(시제)이 잘못된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는데 번역 말투가 섞여서 어색한 글월들이다. 어떻게 바꿔야 매끄러운 글이 될지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다.



● 거의 격주 단위로 이집 저집을 떠돌며 생활했던 나는 최소한의 짐을 제외하고 주변 친구들에게 짐을 맡겨달라며 흩뿌렸었다.

거의 주마다 이 집 저 집을 떠돌며 살다 보니, 짐 대부분을 친구들에게 나눠 맡긴 처지였다.


● 더 슬펐던 건 이곳에 누군가는 서 있고, 누군가는 누워있다는 사실 외에는 나도 ㅅ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 더 슬픈 건 지금 여기에 누군가는 두 발로 서 있고, 누군가는 누워있다는 사실 말고는 나도 ㅅ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영어를 잘하는 사람 앞에서 주눅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은근히 부러워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면서 우리말도 제대로 못할 때 부끄럽기를 바란다. 굳이 ‘말의 역사’를 따져서 미국과 중국, 일본의 지배를 받은 우리 모습을 되짚어 보지 않아도 소리글자 한글은 과학과 예술이 어우러져 아름답다. 게다가 한글이 태어난 이야기는 언제나 뭉클하지 않은가. 전쟁통에도 아이가 태어나고 삶을 이어가듯 말이다. 부디 이 뭉클함을 내가 더 잘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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