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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굴이 Mar 21. 2023

내 존재의 이유

"나는 타인에게 어떤 사람으로 보이길 원하나요? 어떤 모습으로 보이면 가장 뿌듯하고 마음이 편안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내 존재의 이유입니다."


시간이 없어도 짬을 내어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 땅의 아이들 뿐 아니라 전 국민의 멘토가 된 그분의 프로그램이다. 나를 반추하며 과거와 현재의 나에게 적용해 볼 조언을 많이 얻을 수 있어 특히 좋아한다.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에게 하다 보니 약 8년 전의 여름이 떠올랐다. 


 


날은 찌고 해는 강렬하고, 그런데 내 두통은 내리쬐는 자외선 보다도 강렬해서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진통제 1알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두통이 떠나질 않더니 이 날은 아예 증상이 급격히 심해졌다. 손오공 머리띠 같은 무언가가 내 양 관자놀이를 쥐어짜는 것 같았다. 불편함은 머리에 그치지 않고 위장도 뒤집기 시작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병원으로 가는 길은 걸어서 10분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는데 도착하기도 전에 길바닥에 토할 것만 같아서 잠시 전봇대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병원에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목과 어깨 근육의 긴장으로 발생하는 '긴장성 두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속이 좋지 않아서 뻔질나게 병원을 드나들 때마다 십중팔구 들었던 '신경성 위염'이 이제는 머리로 갔나 보다. 의사가 말하길 특별히 심각한 것은 아니나 경추 근육이 과하게 굳어 있는 것 같으니 물리치료를 받고, 심해질 때 먹으라며 근육이완제를 처방해 주었다. 병원 계단을 내려오는데 한숨부터 나왔다. 며칠 째 아프다는 '핑계'로 제출하지 못한 채 늘어져있는 일 생각이 났다. 


퍽 마음이 답답했던 것 같다. 그다지 연락을 자주 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몸과 마음이 힘들 때 엄마에게 전화를 하고 싶어 진다. 그런데 이 날은 이상했다. 아마도 전화를 하지 말았어야 했나 보다. 


자초지종을 들은 엄마는 평소와 달리 긴 한숨을 내 쉬었다. 참고로 나의 부모님은 공감능력보다 문제해결능력이 탁월하게 뛰어났던 분들이라 어릴 적부터도 대화는 늘 '문제 진단 - 해결방식 논의'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잘 알고 있었지만 심신이 많이 지쳐있었던 터라 나의 칭얼거림을 들어줄 상대가 필요했던 것 같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엄마의 반응은 헛구역질까지 불러일으킨 두통을 몇 초 만에 잊게 만들고 대신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다 못해 정수리를 뚫고 나올 것 같은 효과를 낳았다. 


"그때 너를 말려서 취업이나 시키고 시집이나 보낼걸."


마지막 '시집이나 보낼걸' 부분은 사실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한 가지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부분은 과거의 일을 후회하는 엄마의 말투와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후회'는 내가 선택한 길을 향한 것이었다.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역시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병원 앞 계단에서 전화기 너머로 큰 역정을 내던 나,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성난 목소리, 듣기 싫다며 내 멋대로 끊어버린 전화, 그리고도 진정이 되질 않아 행인들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크게 엉엉 울던 내 모습, 울음이 잦아든 이후에도 속이 상하다 못해 심장을 두들겨 맞은 것 같아 들숨 날숨을 연거푸 내 쉬던 모습, 등이 웹툰 만화 컷처럼 기억이 난다. 집으로 어떻게 왔는지는 역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일이 있은 후 두통은 시나브로 없어졌지만 나는 더 큰 병이 생긴 것을 모르고 있었다. 

처음으로 겪는 우울증이었다. 



데드라인은 역시 맞추지 못했다. 진심으로 한 자도 쓰지 못했기 때문에. 

스크린의 커서는 계속 깜박이는데 며칠 째 진전이 1도 없었다. 쓰다 지우길 반복하다 못해 키보드에 손조차 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이유는 당연히 알지 못한 채, 스스로를 의지박약이라 몰아세우며 더 괴로워하고 있었다. 


대만에 가 있던 친구에게서 급 제안이 왔다. 망고나 따 먹으며 쉬다 가라고. 

충동적으로 다음 날 비행 편을 구입하고 대만으로 날아갔다. 

찌다 못해 한증막 같은 날씨 속에서 흘린 땀을 망고와 버블티로 보충하며 친구 집에서 신세를 졌다. 며칠 '방황'하고 돌아오면 '의지박약'의 내 모습은 사라지고 다시 할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내 착각이었다.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미팅을 대충 마쳤던 것 같다. 아마도 상대방은 알았을 거다. 내가 아무것도 해 놓지 않았다는 것을. 그러거나 말거나 부담스러운 미팅을 일단 마쳤으니 당분간 일 생각을 안 하고 싶었다. 그런데 단순히 일 생각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뇌의 전원을 꺼 버린 것 같은 날이 지속되었다. 한 여름의 점점 더워지는 날씨 속에서 순전히 에어컨을 틀기 귀찮다는 이유 만으로 2주 넘게 집 안에서 땀을 흘리며 지냈다. 밖을 나가질 않으니 식사량도 현저히 줄어 하루에 1끼만 먹어도 살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운동량이 적어 식사 요구량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아예 식욕 자체가 사라졌던 것이었다. 여름이라 낮이 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잠을 신생아처럼 잤다. 12시간은 우습게 자더니 그 시간이 15시간으로 늘고, 나중에는 내가 잠을 자고 있는 것인지 깨어 있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뇌가 무뎌 졌던 기억이 난다. 잠을 자지 않고 깨어있는 얼마 안 되는 시간은 평소에 듣지도 않던 우울한 노래를 들었다. 자우림의 '스물 하나, 스물다섯'이 그렇게 슬픈 노래는 아닐 텐데, '스물 하나, 스물다섯'이라는 구간이 나올 때마다 눈물이 마를 새 없이 흘렀다. 듣지 않으면 될 일인데, 내 손은 어느새 더 슬픈 곡을 찾아 재생 버튼을 누르기 바빴다. 


조금 이상하긴 하네,라고 생각했다. 평소에도 성수기와 비수기의 차이가 큰 편이고, 야행성 인간이다 보니 밤에 감성적으로 변할 때가 있었기에 첫 2주 동안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물론 해야할 일을 미뤄두고 있으니 괴롭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던 내가 '지금 한 발만 내디디면 저 차에 치여 죽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것을 보고 사태가 조금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 길로 죽기는 싫었나 보다. 

몇 번의 검색 끝에 학교 상담센터에서 무료 심리 상담 치료를 제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만 대기가 길어서 1-2개월은 기다릴 각오를 해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일단 사전 검사부터 하고 연락을 기다리라는 상담원의 말을 듣고 1-2달 동안 이렇게 괴로운 마음으로 지내야 하나 조금은 막막해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상담을 시작하자는 연락은 1달이 아니라 1주일 만에 왔다. 내가 사전 검사에서 고위험군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상담을 하러 가서 상담자와 내담자의 성향이 맞지 않아 더 큰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나는 운이 좋았던 것인지 나를 맡아주신 상담사 선생님이 첫날부터 마음에 들었고, 총 13회의 상담을 받을 동안 그분이 내 상담사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처음으로 상담을 통해 나를 알아가던 그 시간이 뜻깊었다. 상담도 운동처럼 꾸준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고, 마음 건강의 중요성을 살면서 처음 깨달은 여름이었다. 13회에 걸친 상담이 끝날 때 예전 상태로 돌아갈까 봐 약간의 두려움은 있었지만 그 이후 다행히 극심한 우울감이 찾아오지도 않았고 그 당시 내 우울증을 야기했다고 믿었던 원인도 잘 처리했다. (참고로 나는 정신의학과에서 '우울증'을 진단받은 것은 아니다. 다만 공인된 상담 센터에서 검사를 받았고 전문 상담사의 진단 결과 '급성 우울증'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일시적인 '우울감'과 병으로 분류하는 '우울증'은 다르며, 내 경우는 '우울증'에 더 가까웠다고 보면 되겠다)


 


그로부터 세월이 꽤 지난 어느 날, 내 존재의 이유는 무엇이냐는 질문을 들었다. 나를 향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나는 잠시 화면을 멈춰두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 때 스스로가 가장 뿌듯하고 마음이 편안할까?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이길 원할까? 내 존재의 이유는 무엇일까? 

질문을 던진 국민 멘토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 존재의 이유가 충족되지 않거나 건드려졌을 때, 굉장한 타격으로 다가옵니다." 


답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나는 내가 하는 일에서 전문성을 가진 사람, 특정 분야에서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일하는 사람,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으로 보이길 원한다. 이러한 '존재의 이유'는 최근에 형성된 것이 아니고 내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갖고 있던 자아상이었다. 내가 전문성을 갖고 싶어 하는 분야는 나이가 들면서 수시로 바뀌었지만, 내가 그 분야에서 전문가로 활약하고 싶다는 바람은 늘 일관된 생각이었다. 나는 내 일과 관련해서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를 꿈꾸고 있었다. 


'취업이나 시킬 걸'과 같은 후회는 내가 원하던 자아상과 정 반대되는 말이었다. 순수한 시절의 내 영롱한 젊음을 곱디곱게 갈아 넣어 열심을 다했던 그 세월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말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취업해라', '결혼해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엄마가, 오히려 결혼하지 말고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면서 살라며 '비혼주의'라는 개념이 유행하기 전부터 딸에게 '비혼'의 장점을 은연중에 옹호하던 그 엄마가, 내 노력과 피와 땀이 담뿍 담긴 그 세월을 부정하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누군가는 그게 그렇게 크게 받아들일 일이냐고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수없이 나에게 질문했었다. 왜 그 한 마디에 몸이 떨릴 만큼 화가 났고,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뇌는 파업을 선언하고, 호르몬은 밸런스를 잃고 우울증에 빠졌냐고. 그 답은 8년이 지난 어느 날, 블루베리를 먹다가 우연히 찾았다.


두통으로 길바닥에서 토해도 보고, 우울증으로 자살 생각까지 해 보던 그 시절의 나를 뒤로한 채, 나는 조금은 편안해진 상태로 오늘을 살고 있다. 물론 타고난 기질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라서 여전히 예민하고, 목표를 향해 고군분투 중이고,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을 해결하거나 받아들이면서 지낸다. 엄마에게 왜 그렇게 크게 화를 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죄책감으로 힘들었을 나에게, 아픈 내 몸을 보듬어줄 생각은 하지 못하고 할 일도 많은데 왜 아프냐며 스스로를 채근할 정도로 여유가 없던 나에게, 횡단보도에서 빨간불과 바닥의 흰 금을 번갈아 보며 손을 덜덜 떨던 나에게, 참으로 좋았던 여름에 하늘 한 번 못 보고 혼자 힘들어하고 있었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참 많다. 


혹시라도 수많은 영화의 소재처럼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면, 그래서 과거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혼자 울고 있을 그 어깨를 한 번 더 다독여주고 싶다. 

홀로 밤새우다 뜨는 해를 보며 스스로의 가능성에 의구심을 품고 자책하던 나를 마주한 채 이야기를 들어주고, 바쁜 일을 핑계로 식사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다 늦은 밤 김밥 한 줄 사서 집에 가는 나와 나란히 걸어주고 싶다. 

수 없이 많은 날, 그 '중요한' 공부를 위해 위험하고 얼음장 같았던 밤길을 혼자 다니던 내 뒤를 조용히 따라다녀 주고 싶다. 

밥 먹는 것조차, 잠자는 것조차 사치라고 생각하던 나를 앉혀놓고 내 건강보다 우선인 것은 없다며, 언니처럼 혹은 나이 차 얼마 나지 않는 이모처럼 잔소리 하며 밥도 해주고 잘 자라고 불도 꺼주고 싶다. 

무엇보다 오지 않았던 미래에 대한 걱정을 앞당겨 하는 나에게, 내가 원하던 내 모습을 이루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던 나에게, 원하는 것을 이루었으니 너무 불안해하지는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 원하는 것도 이루고 나면 또 다른 원하는 것을 찾게 되니, 미래에 살지 말고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을 조금 더 기쁘게 살라고, 내 몸과 마음을 참으로 소중하게 아껴주라고,


꼭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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