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굴이 Mar 25. 2023

꼭 그렇게까지 힘들어야 했을까 - 1

It didn't have to be that difficult

나름 시험에 대한 구력이 꽤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었다.

 

나의 10대 후반과 20대는 큰 시험들로 점철되었고, 그 시험과의 '싸움'에서 내가 제패한 적도 있고 패배한 적도 있었다. 시험이란 마치 한 고비를 지나고 나면 다음 고비가 나타나는 형국과 같아서, 한 관문을 넘었다고 해서 다음 관문도 잘 넘는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늘 결과에 집착하며 초조하고 불안하게 살았다. 화장기 없이도 그저 싱그러움과 예쁨이 샘솟는다는 20대를, 나는 햇빛도 잘 들지 않는 독서실과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하느라 다 흘러 보냈다. 지금 돌이켜보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게 할 소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마음가짐이지만, 그 당시에는 결과가 나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했다. 결과가 좋으면 나는 성공한 사람, 결과가 나쁘면 내 인생은 실패의 구렁텅이. 심할 때는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다면 죽어야겠다고까지 생각했다. 나의 시야는 점차 좁아졌고 나에게 적용하는 잣대 또한 어딘가 모르게 비뚤어져만 갔다. 


큰 중압감을 안고 보낸 세월이 짧지 않았고 나름의 대응방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종류의 시험이 와도 예전에 하던 대로 접근하면 된다고 믿었다. 시험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그 오랜 세월을 부담감, 불안함, 그리고 초조함까지 상대해 온 내 몸과 정신력을 무의식 중에 조금 뿌듯하게 여겼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이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도 견뎌본 사람이야'라는 자의식 과잉의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말 사력을 다해야 하는 기간에는 자는 시간 먹는 시간 죄다 줄여서 하루 18시간까지 공부한 적도 있긴 하다. 하지만 나는 그 '경험' 한 자락을 쥐고, 건방을 떨었던 것이 틀림없다. 책상 앞에 앉아 그깟 책만 읽고 글만 쓴 게 뭐 대수라고. 


그런데 이번 시험은 조금 달랐다. 내 무의식 저변에 깔린 자의식 과잉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 시험은 요식행위와 다름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주변에서 나를 안심시키는 말을 해 주었지만, 내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만약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겠지만, 거기서 통과한다는 보장이 없다. 만약 두 번째 기회마저 날린다면 얄짤없이 짐을 싸서 나가야 한다. 게다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케이스가 있었다. 그게 내 일이 아니 된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불안이 점점 커져갔다. 


운이 조금 없었던 것 같다. 

보통은 이 시험에 필요한 수업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첫 2년 동안 정말 필요한 수업이 개설되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인지, 예전보다는 시험 과목 수가 줄어들어 3과목만 준비하면 된다고 하지만, 수학 시험처럼 답이 떨어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엄청난 양의 책을 읽고 내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 과거 시험에 가까웠던지라 과목 수가 줄었다고 해서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시험 과목과 직접 관련된 수업은 다시 내용을 복기하고 책을 읽으면 되지만, 내가 수업을 들을 수 조차 없었던 그 1과목이 너무도 묵직하게 다가왔다. 한 학기에 걸쳐 수업으로 다뤄야 할 내용을 1달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독학을 해야 한다. 물론, 과목의 성격상 내용이 내게 아주 생소한 것은 아니라고 하나, 어느 조직이나 자기 만의 방식과 양식이 있지 않은가. 이 조직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시험을 내는지 어떻게 굴러가는지 아직 알기 어려웠다. 흔쾌히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시험의 특성상, 누가 도와주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이건 내 모국어로 치르는 시험이 아니다.  


여름 내내 준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하필 각종 일은 또 한꺼번에 몰려왔다. 이 시험과는 상관없는 시험도 쳐야 했고, 7월에 이사도 예정되어 있었다. 시험을 위한 사전작업(?)도 꽤 품을 들여야 하는 시험이라, '요이땅' 하며 바로 책을 읽고 암기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실질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2달에서 2달 반 남짓. 그 좋은 여름 날씨를 맘껏 누리지 못하고 시간은 어느새 7월을 향해가고 있었고, 이사를 하고 났더니 시험이 코 앞에 다가온 느낌이 들었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수업을 들었던 1 과목은 점차 머릿속에서 윤곽이 잡혀가고, 2번째 과목은 규정 상 가능한 글쓰기로 대체하기로 하였다. 여전히 마지막 과목이 문제였다. 시험 날은 다가오는데 어디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게다가 쓸데없는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하고자 하는 고집이 발동되었다. 좀 내려놓고 요령 있게 덤벼들어도 될 것 같은데,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게 잘 안 된다. 


8월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이 확보된 달이라 막판 벼락치기를 하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정말 후회하는 일이지만 밤도 많이 새우고, 카페인도 많이 들이부었다. 몸이 못 버티면 잘 다독여서 쉬게 해줘야 하는데, 나는 그걸 배우지 못했다. 나의 20대는 내 몸을 몰아붙이는 데에 다 쏟아부었고, 내 뇌는 그쪽으로 방향설정이 되어 있어 아예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게다가 이런 패턴은 이번 시험 준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시험을 치던 해의 연초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수업을 들어야 했는데 또 운이 나빠서였는지, 수업을 담당하던 강사의 성향으로 인해 그 수업의 학생 모두가 불필요하게 고통을 받았었다. 강사도 해당 수업을 처음 가르쳐서 좌충우돌이었겠지만, 이전 수업과 내용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던 구조적 문제와, 타인의 무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강사의 소시오패스적 성향이 맞물리면서 수업은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나를 포함하여 다른 학생들도 2주에 한 번씩 과제를 하다가 목 놓아 울기까지 했던 악몽 같은 수업이었다. 


그렇게 진이 빠지는 학기를 마치고, 남아있느냐 쫓겨나느냐를 결정하는 시험을 마주하자니 얼마나 부담스러웠겠는가. 수업이라도 잘 제공되어서 믿을 구석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맨땅에 헤딩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고 있었다. 


시험을 준비하던 과정이 자세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다만 한 장면이 아직도 어제 있었던 일처럼 눈앞에 선하다. 한낮 도서관에서 20oz 커피를 마시며 공부를 하는데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심장 뛰는 소리는 원래 의식하지 않는 한 들리지 않는 것이 정상이라고 알고 있다. 그 박동을 인지하자마자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이 심장은 더 빨리 뛰기 시작했고, 손이나 발을 가만히 두기가 어려워졌다. 미세하게 떨리거나 혹은 작은 벌레가 몸 안의 모세 혈관을 기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집중하기가 힘들어졌다. 한 번 들불 번지듯이 일어난 흥분은 심호흡 몇 번으로 가라앉지가 않았다. 고요한 열람실 안에서 나 혼자 100미터 달리기 출발선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애써 몸의 신호를 무시하고 버티다가 심장이 흉곽을 뚫고 나올 것 같아 몇 시간 뒤에 귀가했다. 


이상한 일은 또 있었다. 

주로 도서관이 마치는 시간에 귀가하곤 했는데, 도서관과 내가 살던 곳은 걸어서 5분도 채 되지 않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때는 8월 말 - 9월 초였으니 밤바람이 조금은 서늘할 때였지만 그렇게까지 춥지는 않을 때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언젠가부터 그 짧은 거리를 거쳐 집에 오면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마비까지는 아니지만 약간의 무감각함을 동반한 채. 처음 몇 번은 대수롭잖게 생각하다가 구글링을 해 봤다. '레이노 증후군'이 나왔다. 무언가 내 손에서 나타나는 변화와 비슷해 보이지만 의사가 내린 진단은 아니니까,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흘러 시험 전 날이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복습을 하고, 필요한 부분을 외우는데 며칠 잠을 줄여서 더 이상 졸음을 참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잠깐 집으로 가서 소파에 몸을 뉘이는데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한낮의 햇빛이 거실 창문으로 들어오는데 그 햇빛을 몸으로 받아본 지가 오래된 느낌이었다. 20대의 큰 시험을 준비할 때처럼 나만의 프로토콜을 소환하여 시험날 필요한 것을 준비해 놓고, 두 번 세 번 확인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물론 숙면을 취하진 못했다. 


시험은 내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준비한 것을 미친 듯이 빠르게 타이핑했다. 간간히 나의 시험장 전용 초콜릿도 씹으면서. 평소에는 입에 잘 대지도 않는 초콜릿인데 시험을 칠 때는 이게 필요하다. 그날 하루 혈당이 솟구쳐도 어쩔 수 없다. 눈앞에 닥친 시험이 더 중요해서. 


그렇게 4시간의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데, 크게 기쁘지 않았다. 크게 후련한 마음도 들지 않고 오히려 약간의 눈물이 찔금 나온 것도 같다. 왜 그랬을까. 뭔가 나중에 있을 일에 대한 전조였을까. 물론 구술시험이 2주 내로 예정되어 있어서 시험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만, 일단 큰 불은 끈 것이니 조금 안심해도 되었으련만 나는 왜 그렇게 가라앉은 채로 집에 돌아갔을까? 



구술시험도 끝나고 정말로 홀가분해져도 좋을 무렵, 나는 꽤 오래전 예약을 잡아둔 병원으로 향했다. 이곳은 원할 때 병원을 마음대로 갈 수 있을 만큼 병원 문턱이 낮진 않아서 필요할 때마다 예약을 해야 한다.  

늘 병원을 찾을 때마다 통과의례처럼 피검사를 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며칠 뒤 의사에게서 다음 진료가 필요하니 병원에 들르라는 연락을 받고 꽤 놀랐다 (그런 일이 드물다). 내 개인 병력을 조회할 수 있는 사이트에서 피검사 결과를 봤더니 알 수도 없는 전문 의학 용어 옆에 빨간 마크가 따라와 있다. 정상이 아니라는 소리다. 


의사는 자기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전문의를 연결시켜주겠다고 한다. 빨라야 3주, 길면 2-3개월도 걸리는 이곳에서 내 상태가 어떤지도 모른 채, 기약 없는 기다림의 세월이 시작되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을 내가 처음 겪고 있기에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존재의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