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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굴이 Mar 28. 2023

꼭 그렇게까지 힘들어야 했을까 - 2

1월 9일. 

처음 할머니 의사를 만난 날이다. 

오키나와에서 짧은 연휴를 보낸 기간을 제외하고는 이 날짜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팸닥이 리퍼를 넣고 무려 6주가 지나고서야 겨우 만날 수 있었던 터라 당사자인 나는 속이 터질 지경이었으나, 현지 친구들은 그 정도면 빠른 편이라고 했다. 


큰 시험을 무사히(혹은 꾸역꾸역) 통과하고 한숨 돌려도 좋았을 텐데, 다른 수업을 청강하느라 별다를 바 없는 일상을 지냈다. 이럴 땐 내 성격이 참 별나다 싶다. 청강한 수업이 크게 기억에 남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중요한 수업도 아닌데 그냥 놀 걸. 큰 일을 마치고 나면 당시 부족했던 점 혹은 시간에 쫓겨 제대로 하지 못했던 일이 떠올라서 몸을 가만히 두기가 힘들다. 심지어 마감일을 넘기고 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집 청소다. 쓸고 닦고 물건 정리하는 것이 나에게는 찰나의 휴식이다. 잡생각 들지 않고, 바로바로 성과가 나타나는 - 개인적으로는 가장 가성비 훌륭한 마음 챙김 전략이라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내 습관과 상관없이 2달 가까운 기다림의 시간을 걱정 없이 견딜 자신이 없어서 이런저런 쓸데없는 일정을 만들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좋아서 검색만 하면 이름 모를 의학 용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시대다. 정상 범주를 벗어나 버린 지표들을 검색하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검색하고, 무언가를 알게 될수록 '아는 게 병이다'라는 말을 실감하였다. 이럴 때는 어쭙잖은 영어 실력이 또 독이 된다. 각각의 지표가 뭘 의미하는 지를 알게 된다 한들,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혹은 다른 지표랑 어떻게 관련시켜 해석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나는 '사람 잡는 선무당'이 되고 있었다. 차라리 기억 저 편으로 밀어 두고 마냥 놀기라도 했으면 덜 불안하고 덜 고통스러웠을 텐데. 나는 내가 스스로 판 무덤에 착실하게 들어가서 매일 불안을 한 스푼, 아니 한 궤짝 씩 더하고 있었다. 


구글이 내뱉는 '일반인을 위한 의학용어 설명' 따위의 것들은 그야말로 '설명'이라는 역할에 충실하여 백지상태였던 나에게 새로운 정보를 잘 주입시켰다. 이 분야에 대해 1도 몰랐던 나는 단 이틀 만에 의학저널에서 관련 질병을 다룬 논문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역시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행동이었는데, 그때에는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너무도 강했다. 상식적으로 의학 저널에 보고될 정도의 케이스면 극단적일 확률이 높다. 극약 처방을 했다거나, 임상 중인 신약을 써 봤다거나 (즉, 상태가 그만큼 안 좋다는 뜻이다), 혹은 대규모 코호트 연구를 통해 경향성을 발견하거나 (대부분은 사망률/사망시점을 다룬다), 등등. 아직 전문의를 만나기도 전인데 나는 너무도 많은 것을 '알게' 되면서 마음만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습하고 냉한 날이 계속되는 이곳 겨울이 너무도 두려워졌다. 중무장을 하고 나가도 레이노 증후군이 소리소문 없이 나타나 있었다. 불과 2-3달 전에는 매일 발생해도 대수롭잖게 여겼었는데, 이제는 그 얼룩덜룩 하얗게 변해버린 손 끝과, 감각이 무뎌지는 발을 보고 있자니, 그렇게 공포스러울 수가 없었다. 마치 레이노 증후군이 나타나면 당장 내 몸에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공포였다. 이렇게 자리 잡은 공포는 내 심장을 더 빨리 뛰게 만들었다. 볼과 쇄골이 점점 움푹 파이고 있었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속절없이 살이 빠진다는 것을 또 몸소 경험하고 있다는 뜻이다. 악순환의 시작이었다. 




손꼽아 기다린 날이 왔다.

데이트도 아니고, 의사를 만나러 가는 날을 이렇게 오매불망 기다릴 줄이야. 

시내 한 복판에 위치한 일반 사무실 같은 분위기의 병원은, 접수원부터 의사까지 나름 쾌활(?)하고 친절했다. 대기 끝에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반겨준 의사는 호호 할머니였다. 백발이 성성하지만 네일아트에 공을 들인 조금은 귀여운 할머니. 

물론 방문하기 전 의사 이름 정도는 알 수 있었기에 검색을 해보고 갔다. 의사로 일한 세월이 내 나이보다 많았다는 사실에서 묘한 안도감(?)을 가지는 나를 발견했다. 


초진이라 이런저런 질문에 꽤 오랫동안 답을 했고 신체검사를 했다. 이곳에서 전문의를 만나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나는 이 모든 과정이 신기하고 생소했다. 특히나 전자식 체중계가 아닌, 추를 이용해서 몸무게를 잴 때에는 무리해서라도 한국을 들어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거의 1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면담이 이어졌고, 할머니 의사는 조금 더 확실히 하고 싶다며 추가 피검사와 x-ray를 의뢰하였다. 그리고 결과를 논의하기 위해 3주 뒤에 만나자고 했다. 한국이었으면 3일 만에 재진으로 방문할 수 있겠지만, 이곳은 한국이 아니다. 내가 많이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을 아는지, 3달이 아닌 3주 뒤에 만나자고 했다. 크게 생색낸 말투는 아니었지만 '내가 너를 예외적으로 잘 돌봐주겠다'는 뉘앙스를 담뿍 담은 채.    


3주 가까이 의학 논문을 더 열심히(!) 읽으며, 수업을 병행했다. 

듣고 싶었던 수업을 개설해 달라고 교수에게 귀여운(?) 협박을 한 끝에 얻어낸 결과이니 열심히 들어서 뭐라도 건져야 한다.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여 일찌감치 할 생각도 안 했던 요가와 필라테스도 시작했다. 애초에 유연성은 내 DNA에 새겨져 있지 않았고 개인적으로 단 기간에 힘들게 끝내는 운동을 선호했었는데, 워낙 겁을 먹고 있는 상태라 격한 운동을 재개할 엄두가 안 났다. 2차 피검사 결과는 하루 이틀 만에 받아볼 수 있기에 거기 나온 지표를 검색해 가며 3주를 보냈다. 인터넷에는 자칭 전문가도 넘쳐 났고 진짜 전문가의 의견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선무당'이 아니라 '중간급 무당'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마침내 다시 의사를 만나는 날. 

할머니 의사는 자기가 해 볼 수 있는 검사는 다 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케이스인지 잘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A 혹은 B인데 어느 경우이건 예방적 차원에서 약을 먹으면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다. 다만, 나의 단계가 심하지 않고 가벼운 상태이니 굳이 약을 먹고 싶지 않다면 강하게 권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내가 조금만 더 시간을 갖고 지켜보다가 정말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약을 먹겠다고 하니 흔쾌히 그러라고 해 주었다. 그러면서 앞으로 3가지를 조심하라고 했다. 


"흡연, 스트레스, 그리고 여성호르몬 - 주로 경구용 피임약."


첫 번째, 세 번째는 해당 사항이 없지만 두 번째는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을 알렸더니 할머니 의사가 웃었다. 언제 끝나냐고 물었다. 끝날 날이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나도 끝나는 것이 아닌 길이라고 했다. 할머니의 웃음이 잔잔하게 잦아들었다. 




한국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일은 한꺼번에 몰려서 온다고 했던가.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가 전 세계로 서서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향후 3년간 이동의 제한을 겪으면서 온 지구가 몸살을 앓게 될 것이라는 점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여느 때처럼 한국행 비행기를 예약해 두고 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왼쪽 옆구리 아래에 느낌이 평소와 다르면서 뭔가가 만져졌다.

또 걱정회로가 발동했다. 구글링과 함께. 이제는 이 악순환이 지겨울 법도 한데, 이 맘 때의 나는 전혀 그러지 않았나 보다. 만약 이 시기의 나에게 딱 한 마디만 해줄 수 있다면 나는 단연코 인터넷을 끊으라고 말해주겠다. 사서 마음 고생하고 불안에 떨던 시기가 너무도 아깝다. 그로 인해 없던 병도 생길 판이었다. 

급히 찾아간 팸닥은 초음파 검사를 예약해 주었지만, 역시 한 달 남짓한 시간을 또 기다려야 했다. 

"종양인가?" 

해당 부위를 촉진하면서 혼잣말에 가까웠을 의사의 한 마디 때문에 초음파 검사를 받는 날까지, 내 뇌의 사고회로는 그쪽으로 치우친 채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갑상선 관련 호르몬 수치까지 정상 범위를 벗어났다. 

조금만 생각이 내 몸과 관련된 쪽으로 흐르면 심장이 힘차게 자기주장을 해대는 것을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언젠가부터는 밤이 오면 '내가 다음날 눈을 뜰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나를 지배했다. 삽시간에 공포가 밀려오면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지금의 나라면 말도 안 되는 사고 방식 이라며 웃고 넘겼을 텐데, 그 당시의 나는 꽤나 혼자 심각 했었다. 한 번 '죽음에 대한 공포'가 머리속에 자리 잡고 나니, 찰거머리같이 들러붙은 그 생각을 떼어내기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나는 이미 공포와의 싸움을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상태였고, 그 공포는 내가 매일 밤 확대 재생산 하고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침대 옆 테이블에는 비상연락망과 여권, 그리고 내 건강 상태를 간단히 적은 메모를 두고 잠을 청했다. 불을 끄면 극심한 공포가 밀려올 것 같아서 몇 달 가까이 불을 끄지 못하고 밤을 보냈다. 전화기 너머 매일같이 나의 불안을 공유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당시의 내가 정신줄을 부여 잡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종종 감정적으로 격해 졌다가 가라 앉기를 반복했다. 매일을 푸르스름하게 새벽을 알리는 빛이 창문으로 밀려 들어올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잠에 들었다. 

불안이 도를 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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