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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굴이 Apr 04. 2023

꼭 그렇게까지 힘들어야 했을까 - 3

Why is that important to do what I want to do?




새해의 첫 달을 온갖 걱정과 멘붕으로 보낸 후 오랜만에 만난 자리였다. 처음 몇 분간은 거의 녹음된 음성파일을 틀어둔 것처럼 나 혼자 떠들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으며 언제 누구를 만났고 앞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며 누가 무슨 말을 했고 등등. 한참 인내심 있게 들어주던 상대방이 이만 하면 되었다 싶은지 공상과 상상의 세계에서 허우적대는 나를 다시금 현실로 끌어내렸다. 


걱정, 불안, 공포가 나를 잠식할 때, 그로 인해 심장 박동이 빨라질 때, 각종 몸의 시그널을 힘껏 부인하지 말고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아, 너 또 무섭구나', 혹은 '아, 또 불안이 올라왔구나'라고 인정해 버리면 손쉽게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며. 어느 정도 인지가 되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고 했다. 마음이 안정될 수 있게 좋아하는 음식을 먹거나 차를 마신다든지, 잠깐 산책을 통해 주의환기를 시킨다든지, 좋아하는 운동을 하러 나가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등등. 지금은 꽤나 많은 서적/온라인 매체에서 불안을 잘 다스리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에 이러한 내용이 크게 새롭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에게는 상당히 신선하고 혁신적인 접근법이었다. 내 불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것. 그 말을 듣고 보니 나도 모르게 나의 불안을 부정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마치 인정하는 순간 정말로 큰 문제가 생긴다는 듯이 내 뇌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외면하고 있었다. 


표정으로 '아하'를 외치는 나를 보면서 상대는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길래, 크게 뜸 들이지 않고 '건강히 내가 원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아마도 내가 질문을 100% 정확히 이해한 것이 아니었던 듯하다. 푹신한 소파만큼이나 친절한 목소리와 태도였지만 그 내용은 취조에 가까운 추가 질문이 이어졌고, 돌고 돌아 '왜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 나에게 중요한지'에 대한 답을 요구받았다.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세운 목표를 성취하는 것은 당연히 중요한 것 아닌가? 딱히 다른 답이 생각나지 않았지만 이것 역시 정답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이 대화에서 '정답'이란 없다). 


"질문을 바꿔볼게. 뭐가 그렇게 무서워?" 


크게 슬픈 질문도 아닌데 약간의 눈물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찬찬히 단어를 골라냈다. 


"건강하지 않은 내 모습을 보는 게 미친 듯이 두려워. 내가 당연히 여기는 일상이 어려워지고, 지금 당연하게 할 수 있는 일들을 못하게 될까 봐 무서워. 읽고 쓰고 걷거나 뛰는 일이 힘들어질까 봐 공포스러워."


"그런 활동이나 일들이 너한테 왜 중요한데?"


"잘 모르겠어... 모르긴 몰라도 그런 일들이 나의 일부를 규정하기 때문에 아닐까?"


상대의 얼굴에서 약간의 만족감이 얼핏 스치는 것 같았다. 곧 분석이 이어졌다. 


"그런 외부의 것들은 너를 규정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일이나 인간관계로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착각이야. 너한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지만 나는 의학적 판단을 내리는 사람은 아니라 확답을 주지 못한다는 건 미리 밝힐게. 하지만 만약 네가 많이 아프게 된다고 하더라도 너는 영원히 너 자신이야. 정도에 따라 약간의 한계가 있겠지만 지금 네가 하고 있는 활동들을 계속 이어나가겠다는 '선택'은 네 스스로 할 수 있단다."


그랬다. 나는 내 선택의 폭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이 와도 인간이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는 이유는 '선택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의 경우에 적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나를 통제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할지 선택할 수 있는 주체라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불안을 이해하는 나의 시각이 180도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불안은 그 특성상 현재와는 접점이 하나도 없다. 불안은 모두 미래를 향한 것이며 '만약'이라는 가정법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즉, 실재하지 않는다. 불안은 현재에 속하지 않으며, 나는 나를 통제하는 주체가 아니라 내 선택의 주체라는 사실을 결합하면 나는 불안이 나를 좀먹지 않도록 '선택'할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동양 철학에서 그렇게 부르짖는 열반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오롯이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만이 남는다. 



"어쩌면 지금이 무너졌던 삶의 균형을 바로잡을 최적의 기회가 아닐까?"


나도 온 마음으로 공감했다. 그간 불규칙적인 수면과 식습관, 작은 일에까지도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으며 완벽하게 해내고 싶어 하는 욕심 등을 내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는 단계에 왔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 결과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이라면, 나는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엄중히 돌아보고 내 행동과 사고방식에서 잘잘못을 가려내야 한다. 열심히 살려는 발버둥이었고 잘해보려는 욕심의 발로였다 하더라도 방법이 잘못되었다.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하는 순간이 계속된다면 내가 아무리 목표를 이루고 원하는 곳으로 나아간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렴풋하게 머리로만 알던 것들을 정말로 실천하지 못하고 내가 영원히 젊고 팔팔할 것이라 믿으며 스스로를 방임한 대가는 이렇게 컸다. 이제는 정말로 내 삶의 균형을 찾아야 하는 시점이 왔고, 그 어떤 것도 삶의 균형을 희생해서 얻고자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뼈에 새기고 있었다. 아주 정신이 번쩍 드는 "wake-up call"이었다. 



돌고 돌아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왔다. 왜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나에게 그토록 중요하냐고. 

나는 내 직업을 특정군으로 설정해놓지 않았다고 답했다. 다만, 최근에 들어 내가 받는 훈련이 버겁긴 하지만 꽤나 재미있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이를 통해 무언가를 '성취'해 나가는 것 혹은 더 나아진 나를 보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일 것이라 답했다. 1년 전의 나보다는 조금은 나아졌겠지. 그렇다면 1년 뒤에도 지금보다는 조금은 나아지겠지. 그렇게 조금씩은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과 설렘.


Paula는 '성취'나 '성과'라는 단어보다는 '성장'이라는 단어를 쓰자고 제안했다 (아마도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한국어의 '성장'과 더 가까웠을 텐데, 영어로는 '성취'나 '성과'에 가까운 단어를 말했었다). '성취', '진보', '업적', '성과'와 같은 말은 지금의 내가 부족하다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으니 '성장'이라는 단어를 쓰자고. 조금은 가치평가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미래지향적인 의미를 주지 않나며 흡족해했다. 나도 '성장'이라는 단어가 더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단순히 내가 하는 일이 익숙해서가 아니라, 나의 성장을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 스스로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는 오늘이라면, 그것이 마지막 날이 된다 해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이제 모든 대화의 퍼즐이 맞춰졌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기 위해 건강을 지켜야 하고, 삶의 균형은 건강을 되찾기 위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는 가치이다. 내가 추구하는 일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 일이 나를 규정해서가 아니라 그 일이 내 성장의 일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시간이 무한하지 않음을 이번 기회를 통해 정말로 깨달았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나의 에너지와 시간이 무한하리라는 잘못된 믿음은, '오늘 끝내지 못한 일'은 오늘 밤을 새워 끝내면 된다는 잘못된 신념으로 이어졌다. 그렇지 않았다. 오늘 끝내지 못한 일은 사실 오늘 끝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지 못했다면 내 밤을 희생시킬 것이 아니라 다음날 끝마쳐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우를 범할 수도 있지만, 나는 오늘만 살다가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는 내일이 있지만 그 내일을 힘들게 맞이할지 상쾌하게 맞이할지는 내 선택인 것이다. 숱한 내일이 있다고 믿지 않음으로써 오늘을 더 벅차게 느끼고 집중해서 살아보려는 노력 역시 내 선택인 것이다. 


안경 너머 인자하지만 천리안 같은 눈이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많은 경우, '성장'은 고통을 동반하면서 온다고. 아마도 너도 같은 것을 경험하고 있을 거라고. 


이유 모를 눈물이 퐁퐁 샘솟다가 줄줄 흘러내렸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던 말이지만, 사실은 마음 한 구석에서 내 삶이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길 바랐다. 조금은 건방진 생각일 수 있겠지만, 이미 충분히 힘들여서 여기까지 왔고, 이제는 버겁지 않게 조금은 쉽게 내 손에 주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험난한 일들이 예기치 못하게 삶의 궤적 앞에 털썩 털썩 떨어질 때마다, 내가 갖고 있는 능력에 비해 너무도 큰 것을 바란 탓에 힘든 것인가 하는 생각도 숱하게 했다. 모든 일을 처음 겪어서 어찌할 바 몰라 아프고, 나를 잘 몰라 절망스럽고, 영원하지 않을 젊음만을 믿고 나를 몰아붙인 밤들도 머리카락만큼이나 숱하게 쌓였다. 


그리고 그 기억의 끝에 '꼭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 선택의 결과들이 나를 괴롭히는 쪽으로 작용해버렸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진심으로 삶을 대하는 태도를 획기적으로 바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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