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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굴이 Apr 11. 2023

정형외과 병동의 이상한 가족 - 1

골절상만큼은 절대 겪고 싶지 않습니다

평소라면 한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Paula를 만나지는 않을 텐데, 이번은 예외였다. 

오히려 만나는 날을 고대했고, 어떤 말을 꺼내놔야 할지 조용히 단어를 고르며 생각을 정리하는 나날을 보냈다. 


돌아오고 꼬박 3주 반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누군가를 병원에 입원 시키거나, 간병을 하는 꿈을 꿨다. 

내 집에 돌아온 그날부터 시도 때도 없이 잠이 몰려왔다. 이튿날은 자다 말고 깨어 목놓아 울었다. 

먹고 싶은 음식이 하나도 없었다. 이틀, 사흘, 일주일을 지나면서 조금씩 '커피라도 마시면 좋겠다'라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Paula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내일이면 출국을 앞두고 있어 평소보다는 조금 일찍 자려고 누웠다. 

한 달 반 정도의 한국 방문은 여러모로 바쁘고 빠듯한 일정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돌아가면 바로 학과 일을 소화해야 하고, 몇 가지 계획 수정도 있었다. 


설핏 잠이 들려고 하는 찰나, 엄마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슬리퍼를 찰찰 끌면서 거실을 걷는 소리가 났다. 늘 그랬듯이 내 방 앞에 있는 화장실을 가려는 발걸음이겠거니 생각했다.  


그 이후 채 5초도 되지 않을 참으로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 5초는 무수히 많은 조각들로 쪼개어져 내 기억 속에서 슬로우 모션처럼 저장되었다. 무언가가 둔탁한 부분에 걸려 넘어지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만 해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엄마 또 부딪혔네'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생각이 채 뇌를 떠나기도 전에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절대 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고통에 울부짖는 소리. 정말로 고통이 극에 달하면 저렇게 단전에서 소리가 올라온다는 것도 처음 깨달았다. 반사적으로 튀어 나갔다. 


엄마는 그렇게 크지도 않은 거실에서 화장실 가는 길목에 엎어져 있었다. 왼 골반이 바닥에 닿고 오른 허벅지가 90도로 접혀 있어 외관상으로는 큰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엄마 자력으로 일어날 수도 없어 보였고 넘어지면서 어딘가에 부딪힌 통증이 꽤 커 보였다. 


아빠도 화들짝 뛰쳐 나왔고, 엄마는 오른 허벅지가 몹시 아프다며 주물러 보라고 하였다. 아빠가 최선을 다해 힘껏 주무른 것이 오히려 더 독이 되었던 것일까. 더 큰 통증을 호소하며 엄마가 멈춰 달라고 속삭였다. 통증이 너무 심해 목소리가 잘 안 나오는 것 같았다. 듣지 못했던지 아빠의 주무르는 손이 멈출 줄을 몰랐다. 그 손을 우악스럽게 잡아떼 버렸다.


주변 소파 팔걸이나 날카로운 의자 모서리 등에 머리를 찧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아빠에게 119에 연락을 해달라고 말했다. 통증이 심하면 의식을 놓기도 한다. 엄마는 '아이고, 아이고'만 반복하며 엎어져 있었다. 엄마의 머리통을 붙잡고 나도 모르게 슬피 울었다. 




우리 엄마는 키도 작고 많이 말랐다. 

한 번도 엄마가 살집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처녀 시절 사진이나 나를 낳고 얼마 되지 않은 모습을 담은 사진에서는 볼살이 나름 통통했다. 엄마와 볼살이라니, 양립 불가능할 것 같았는데. 


서울에서 살 때에도 부모님 댁을 자주 가지는 않았다. 그래도 1년에 1-2번은 갈 수 있었는데, 외국에서 살게 된 이후로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2년에 한 번씩밖에 가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큰 어려움 없이 엄마의 갱년기가 넘어갔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엄마가 먼저 말해주지 않았으면 엄마의 폐경을 몰랐을 정도였다. 다행히 환갑을 맞이하던 생신달에는 한국에 있었던 덕분에 자식 된 도리를 한답시고 생색을 낼 기회가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의 건강에 큰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 원래 마른 사람이었으나 꾸준히 운동도 하고, 별다른 대사증후군이 없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3년 전 늦봄 한국을 갔을 때에는 나 자신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에 부쳐 부모님의 작아진 등을 애써 무시 했었다. 엄마는 매일 같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아마 기도를 간절히 했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나를 살리는 밥상을 차려냈다. 내 몸무게가 얼마나 늘었는지 며칠 간격으로 조심스레 물어왔다. 500g 늘었다 그러면 좋아하고, 늘지 않았다고 말하면 조금은 시무룩한 얼굴로 식단에 더 신경을 써야겠다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때의 나는 불안으로 인해 팔자에도 없이 살이 빠질 때였는데, 엄마는 마치 본인이 차려내는 밥상으로 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처럼 성심을 다 했다. 지난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될 만한 결과를 듣게 되었고, 나는 하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비행기를 탔다. 돌이켜보면 그때 두 사람은 내가 아닌 본인들을 먼저 챙겼어야 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아빠는 암 진단을 받게 되었다. 지나간 후회는 소용이 없다지만 조금만 더 공격적으로 나섰다면 내가 출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암세포를 발견할 수도 있었을 일이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수술로 해결이 가능한 단계였고, 그 분야에서 권위자라는 사람이 집도를 맡기로 하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코로나가 그 도시를 휩쓸던 그 시기 두 사람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암 수술을 앞두고 걸린 코로나라니 참으로 비통하게 들렸지만, 정작 수술 당사자는 독감을 앓듯이 지나갔고 평소 기관지가 좋지 못하여 폐렴도 앓았던 엄마는 고통에 몸부림 치며 '죽을 것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아빠의 수술은 3-4주 미뤄졌다. 


우여곡절을 겪고 드디어 확정된 수술 일정에 맞춰 한국에 들어왔다. 내가 집도의도 아니고, 나 하나 들어온다고 대세에 지장은 없겠지만 그 무섭고 떨릴 것이 분명한 시간만큼은 그들과 같은 공간에 머무르고 싶었다. 구체적인 상황은 달랐으나 부모님이 겪고 있을 그 시간이 무엇인지 조금은 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었다. 죽음을 생각해 보게 되는 그런 시간. 내 인생의 의미와 남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는 시간. 정말 내일 당장 죽음을 앞두고 있는지와 별개로, 나의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계기를 마주해 버렸다는 것은 상당히 큰 감정의 요동을 불러일으킨다. 덤덤하게 마주하고 있지만 일상에서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마음의 불안과 공포를 겪을 그들이 안쓰러웠다.  


코로나로 인해 환자를 제외한 간병인은 1명밖에 들어갈 수 없다 하였다. 

내가 들어갈 생각으로 입국을 한 것이지만, 두 사람 모두 자식에게 간병의 짐을 지우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결국 엄마가 아빠와 같이 병원을 갔다. 수술을 받을 병원이 하필 집에서 많이 떨어진 곳에 있어서, 아침에 세 가족이 버스를 타고 긴 침묵의 시간을 지키며 병원에 도착했다. 때 마침 라디오에서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 입니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30이 훌쩍 넘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전하는 사연이었다. 본인도 썩 살가운 아들이 아니고, 아버지도 그런 성격이 아니었지만, 사연에서 밝힌 일을 계기로 오늘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꾹 참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 사랑합니다'를 외친다는 귀엽고도 뭉클한 사연이었다. 두 라디오 진행자가 사연자를 연신 칭찬하며, '지금 부모님께, 혹은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씀을 하시라'고 하였다. 아빠는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엄마가 병원에서 쓸 침낭을 안고 있었지만 한 손이 자유로웠다. 찰나였지만 손을 뻗어 아빠의 손을 잡을까 말까 길고도 길게 고민했다. 장난처럼 툭, '사랑합니다'라고 하면 될 텐데, 천금을 달아놓은 것 마냥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마치 지금 그 말을 지금 해서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그래서 가슴 벅차게 따뜻한 그 말을 내게서 듣고 이제 되었다며 아빠가 홀홀 떠나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비이성적인 걱정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수술을 앞둔 마음이란 이토록 조심스러워서 마치 내가 하는 모든 행동과 말, 그리고 생각 끝자락조차 길흉이 되어 수술에 작용할 것만 같았다. 


외부인 출입금지라 병원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자동 출입문을 사이에 두고 인사를 했다.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였던 아빠는 그 특유의 사투리로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하며 손인사를 했다. 두 사람이 집에 없는 기간 동안 밥을 잘 챙겨 먹으라는 말에(암수술을 앞둔 와중에도 그놈의 밥), 혼신의 힘을 다해 입꼬리를 올려 웃어주고, 뒤돌아서자 마자 어금니를 깨물며 눈물을 쏟아냈다. 날은 맑은데 걷는 내내 자꾸 눈이 흐려져서 선글라스 밑으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렇게 다시 1시간을 버스를 타고 집을 왔다. 이 상황을 잘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병원에 가는 길 라디오 방송에서 멍석까지 깔아줬는데 그놈의 '사랑한다'는 소리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다며 목놓아 울었다.  


도저히 내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아 며칠에 걸쳐 창고방을 정리하였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고 고관절이 벌어지는 것 같았지만 그렇게 몸을 힘들게 놀려야 생각이 조용해질 것 같았다. 어차피 내 짐이니 내가 있을 때 정리하자는 마음으로 영겁의 시간을 보내며 아빠의 수술 및 회복 소식을 실시간 보고 받았다. 어느 정도 안정 되었으니 엄마가 잠시 집에 들렀다 가겠다고 했다. 필요한 것을 잔뜩 챙겨 엄마를 만나러 나갔다. 챙기다 보니 너무 무거워 엄마가 들기 힘들 것 같았다. 병원으로 같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멀리 횡단보도에 서 있는 엄마의 모습이 참으로 작았다. 햇빛에 눈이 부셔 눈을 가늘게 떠서 그런가 했지만, 점점 엄마의 가까워 올 수록 마음 어딘가가 조금씩 잘게 쪼개지는 것 같았다. 극도로 큰 감정의 변화를 겪은 사람은 저절로 살이 빠지고 볼이 파인다. 엄마는 불과 4-5일 만에 많이 시들어있었다. 


근처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며 엄마는 오는 길에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질 뻔하였다고 했다. 2년 전에 비해 엄마는 눈에 띄게 다리를 절었다. 이런저런 병원을 시도해 봤지만 그 때 뿐이고, 차도가 없다고 하였다. 아빠 입원 전에 집 근처 통증의학과를 모시고 갔지만, 간단한 신경 주사는 별다른 역할을 못한 듯싶다. 종종 허벅지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터질 것 같다고 했다. 심지어 지난해 가을에는 걸음이 아주 힘들 정도의 통증이라 당시 예정되어 있던 아빠의 퇴임식에서 추한 꼴을 보일까 걱정스러웠다 고도 한다. 천만다행으로 당시 다니던 도수치료 덕분에 많이 호전되어 그래도 지금은 다리를 덜 저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모두 아빠의 수술에 너무 집중을 하고 있어서 엄마를 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 마음에는 걸렸지만 일단 큰 불을 끄고 나서 해결하자는 생각이었다. 더 큰 불이 있는 줄은 모른 채. 


어쩌다 나무뿌리에 걸렸다고 물었더니, 순간 누가 뒤에서 무릎을 발로 차는 것처럼 힘이 빠지며 양 무릎이 앞으로 꺾인다고 했다. 몇 가지 증상으로 검색을 해 봤지만 썩 시원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도로에 넘어지지 않았으니 다행으로 생각하자며 집으로 돌아왔고, 하룻밤을 지낸 엄마는 다음날 병원으로 향했다. 


한사코 같이 가겠다는 나를 말렸다. 셔틀버스가 있다고. 짐이 너무 무거우니 내가 가겠다고 했지만, 엄마는 셔틀만 타면 바로 앞에서 내린다고 했다. 그 바로 앞에 병원 정문은 아닌 것을 알면서도, 나는 또 엄마에게 지는 척을 했다. 내가 같이 갔어야 했는데. 이럴 때는 그렇게 자기주장 강하고 고집 센 내가 왜 끝까지 고집을 안 부리는지. 뼛 속까지 이기적인 자식.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병원에 도착해서 그 무거운 짐을 들고 정문을 통과하다 QR코드를 찍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는 순간 다시 한번 다리가 꺾이고 말았단다. 두 무릎을 바닥에 크게 찧어 아픈 와중에도 정신없이 일어나서 짐을 챙겼지만, 부딪힌 부위가 너무 아파서 결국 회복 중인 아빠에게 짐을 가지러 내려오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채 2주가 지나지 않아 엄마의 다리는 부러졌다. 내가 출국 하기 대략 12시간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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