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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굴이 Apr 17. 2023

정형외과 병동의 이상한 가족 - 2

골다공증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내가 아닌 가족을 태우고 응급실을 가보기는 처음이었다. 

구급차 안에서 내 이름 석 자를 말하는 순간 내가 보호자가 되었음을 자각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엄마는 들것에 실려 조금의 움직임이 전해질 때마다 몹시 고통스러워했다. 골절이 의심스러웠다.  


구급대원은 이 상태로 대학병원을 가 봤자 대기만 길어지니 정형외과 전문 병원으로 가겠다고 했다. 주저하는 아빠와 나를 두고 코로나로 모든 상황이 어려워져 베드가 있는 곳이면 일단 가야 한다고 했다. 아빠가 주변의 모든 인맥을 동원해 수소문했지만, 때는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자정이었기에 연락이 닿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혹여 된다 하더라도 비슷한 말을 반복했다. 사실 골절 환자는 생명에 지대한 위협이 있는 단계가 아니기에 대학병원 응급실을 가는 것이 최선이 아닐 수 있다. 대학병원 응급실은 중대한 교통사과 환자, 뇌 혹은 심장에 문제가 생긴 환자들을 최우선적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엄마처럼 다리가 부러진 경우로는 '대접'을 못 받을 가능성이 컸다. 


일단 구급차를 타고 간 2급 병원 응급실에서 우리는 엄마의 절규를 여과 없이 들어야 했다. 부러진 곳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정 자세로 누워 CT를 찍어야 하는데, 조금의 움직임만 가해져도 울부짖는 엄마의 부러진 다리를 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고통에 힘겨워 간호사를 잡아 뜯는(죄송합니다, 선생님) 엄마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면서 아빠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진통제를 최대치로 맞고서야 겨우 CT 스캔을 마친 엄마는 의식이 점점 흐려지는 것 같았다. 


이 병원에 입원하기로 결정을 하고, 간병인으로 들어갈 내가 필요한 물품을 집에서 챙겨 와야 했다. 아빠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5분간 머릿속이 매우 차분해짐을 느꼈다. 준비해야 할 물품, 비행기 예약 변경, 학과 연락 등 해야 할 일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재빠르게 짐을 챙겨 병원으로 돌아왔다. 


코로나로 절차가 까다로워져 입원 첫날은 1인실에서 지내고, PCR 음성 결과가 나와야 다른 병동으로 옮길 수 있다고 했다. 1인실에 대퇴골이 부러진 채 깁스에 의지하여 누워있는 엄마는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았다. 환자의 보호자라 그렇게 상황을 과하게 받아들인 부분도 없잖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덩치도 작고 몸에 붙은 살이라고는 피하지방 밖에 없는 것 같은 엄마의 몸이 이렇게 큰 충격을 견딜 수 있을지 정말로 의심스러웠다. 새벽 2시가 넘어 들어온 병실에서 엄마는 진통제의 힘으로 잠깐 눈을 붙였고, 나는 엄마가 숨 쉬는 소리를 듣고서야 눈을 감았다 다시 숨소리를 확인하려 귀를 기울이길 반복했다.  

 

다음날이 일요일인 탓에 우리는 의사를 만나지 못하고 2인실로 옮겨야 했다. 거동이 불가능한 엄마를 간호사 여러 명이 다른 베드로 옮기는 과정에서 엄마의 깁스가 비뚤어졌던 것 같다. 아프다는 엄마에게 참으라며 몸을 조심성 없이 옮기는 간호사를 보고 내 화가 폭발했다. 그들의 손을 매몰차게 내치며, 내가 옮기겠다고 했다. 식은땀이 바짝바짝 났지만 엄마는 여차저차 아래층 병실로 내려왔다. 하지만 병실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엄마는 부러진 다리의 발등이 터질 것 같다며 엄청난 고통을 호소했다. 당직 의사라고는 응급실 의사 밖에 없어서 진통제도 사정사정해서 겨우 맞고, 그 마저도 듣질 않아 깁스 사이 틈으로 내 손을 짚어넣어 아프다는 곳을 밤새 주물렀다. 내 전화를 받고 아빠는 응급실로 항의하러 오셨다. 응급실 당직 의사가 내릴 수 있는 최대한의 진통제를 맞았지만 다음날 오전 9시 출근한 담당 의사를 만날 때까지 엄마는 약 12시간 동안 고통에 몸을 떨어야 했다. 의사 말로는 깁스에 비골 신경이 눌린 것 같다고 했다. 그로 인해 생겨버린 비골 신경통은 엄마가 퇴원을 하고도 몇 달이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아 추가로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지금도 대학병원을 가지 않고 이 병원에 머물렀던 것이 잘한 선택인지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 병원에서 수술을 결정했던 이유는 (원하면 대학병원으로 옮길 수 있었겠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고통을 호소하는 엄마를 또 구급차에 태워 이런저런 베드를 전전하게 할 자신이 없었다), 담당 의사의 첫 질문 덕분이었다. 


"양다리가 다 아프세요?"


"네..."


"아이고, 이거 큰일 났네"


의사는 단번에 엄마의 병증을 파악해 내었다. 우리가 그렇게 통증의학과며 한의원이며 여기저기 쏘다니며 답을 찾고자 했지만 찾지 못했던 엄마의 증상은 골다공증 약의 부작용 때문이었다. 


엄마는 폐경 후 골다공증 진단을 받게 되어 5-6년 전부터 비스포스포네이트 계열의 약을 먹고 있었다. 이 약은 최대 5년까지만 복용하게끔 권고되어 최근에는 주사 치료제로 바꿨다지만, 엄마는 4년 정도 해당약을 먹었다고 한다. 의사 말로는, 골흡수억제제인 이 약을 복용하는 환자의 약 10%에게서 '비정형 골절'이라는 부작용이 나타난다고 했다. 골흡수억제를 통해 골밀도를 높이는 것이 기전인데, 골흡수억제가 과하다 보니 골피질이 두터워지고 과도한 골흡수가 일어나 뼈가 필요 이상으로 딱딱해진다고 한다. 흔히 뼈는 단단하기만 한 조직이라 생각하는데, 근육이 커지고 작아지는 것처럼 뼈도 골흡수를 반복하는 유연한 조직이란다. 유연성을 잃은 뼈는 대나무가 잘 부러지듯이 생활에서 받는 작은 충격에도 미세한 금이 가게 되고, 그런 일이 반복되다가 엄마처럼 대퇴골 골절을 겪는다고 한다. 


병원 보호자용 침대에서 관련 논문을 수없이 찾아봤다. 어떤 일인지 알아야겠기에. 의사 말만 듣고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는 없었다. 뭐라도 해야 내가 무너질 대로 무너진 엄마한테 위로든 답이든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사는 듬직한 스타일이었지만 자세한 설명을 세심하게 해 주는 성격은 아닌 듯 싶었다. 목마른 내가 우물을 파야했기에, 오전에 한 번 의사를 만날 수 있는 회진 시간에 고르고 고른 질문을 조심스레 던졌다. 회진 시간이 부족하여 보호자로서 면담을 따로 드릴 순 없냐고 물었더니 외래 환자로 접수하고 일반 진료시간에 내려오란다. 다른 환자들은 다들 엄마보다 더 연로하시고 자식이 간병을 하는 경우도 없어 우리 집 같은 케이스가 드물었던 모양이었다. 아빠도 따로 외래 환자로 접수하고 의사 앞에서 수술을 잘 부탁드린다며 눈물을 보이고 갔다고 한다. 별난 가족이라는 생각도 하셨을 법 한데 자식은 외국에 살고 아빠는 최근 암 수술을 받았다는 우리집 사정을 들은 의사는 최대한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노력하는 듯 보였다. 


비정형 골절은 양 대퇴골에 대칭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엑스레이 결과 부러지지 않은 왼 다리에도 미세한 금이 많이 가 있는 상태라, 일단 부러진 다리를 먼저 수술하고 1주일 뒤에 왼 다리도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한꺼번에 수술을 하기에는 환자의 체력이 좋지 않아 보이고 출혈도 꽤 있을 것으로 예상되어 따로 하자고 한다. 


생각보다 침울하게 있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병원의 하루는 바빴다. 아침 회진 전에 물수건을 적셔 엄마의 얼굴을 닦고 침상에서 양치를 할 수 있게 물컵을 준비해야 한다. 일어날 수도 없는 엄마의 입에 밥을 떠 넣고, 그 마저도 못 먹어서 물에 만 밥을 흘려 넣었다. 식사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토해내면 간호사 데스크에 가서 증상을 설명하고 따로 약 처방을 부탁하는 것도 내 일이었다. 자력으로 화장실도 갈 수 없으니 대소변도 기저귀로 해결해야 했다. 중간중간 각종 사진을 찍고 피검사를 해야 해서 그때마다 식은땀을 흘려가며 엄마의 이동을 돕는다. 돌아서면 다음 식사 시간이 돌아오지만 내 식욕이 달아난 것은 물론이고 엄마도 입이 깔깔하여 밥은 늘 냉장보관이었다. 밤은 그 어느 때 보다 빨리 찾아오고 병실의 불은 일찍 꺼졌지만, 나는 새벽에도 2-3번씩 일어나 엄마의 기저귀를 갈아야 했다. 기저귀도 몇 번이고 갈다 보면 그렇게 빨리 소모가 된다. 자신도 아직 퇴원한 지 채 2주가 되지 않아 보살핌을 받아야 했던 아빠는 매일같이 우리의 생필품을 사서 병원으로 나르기 바빴다. 


수술을 앞둔 엄마는 심적으로 많이 약해져 있었다. 평소에는 교회나 종교에 관련된 이야기를 엄마와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였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뭐든 엄마를 붙잡아줄 수 있는 것이라면 다 상관없었다. 수술이 있는 날 아빠는 수술실로 가는 엄마의 손을 잡고 울었다. 나는 환자인 엄마를 챙김과 동시에 심신이 고달파져 있을 아빠에게도 보호자가 되어 드려야 했다. 그래서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눈물이 넘어올 것 같은데 엄마 아빠 앞에서 차마 울 수가 없었다. 휴게실과 비상구계단은 내 눈물 해우소가 되었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수술 대기실 보호자의 모습이 우리가 되었다.  2시간 남짓 걸리는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아빠와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인간으로서 아빠를 볼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동시에, 그런 시간을 꼭 수술 대기실에서 보호자로 나눌 수밖에 없었나 하는 회한이 몰려왔다. 각자 큰 수술을 겪는 모습을 보며 내 부모라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그들의 모습이 마음 아리게 다가왔다. 그간 편하게 인생을 살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누군가는 말하겠지만, 한 번도 힘든 일을 두 번이나 동시에 겪어야 하는 이 상황이 슬펐다.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매일 그저 무력했다. 


수술을 마친 엄마는 척추 마취가 풀릴 때까지 꼼짝도 없이 누워있어야 하는 시간을 참으로 버거워했다. 정해진 시간이 끝나고 식사를 좀 해야 할 텐데도 그 마저 넘기지 못했다. 꿀을 젓가락에 조금 찍어 입으로 흘려봤다. 엄마는 진통제 패치 때문에 먹은 것도 없는 말간 위액을 토해냈다. 수술이 잘 되었다는 안도감도 잠시, 그 이후부터 2차 수술을 앞둔 일주일은 또 다른 투병의 시작이었다. 


위장이 약했던 엄마는 항생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먹는 족족 토해냈다. 식욕이 원래도 없는데 더 없어진 바람에 엄마의 얼굴은 해골처럼 말라갔다. 결국 수액으로 영양분을 공급하기로 했다. 약을 몇 차례나 바꿨음에도 불구하고 항생제는 엄마에게 너무 독했나 보다. 온 전신으로 피부 발진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너무 가렵단다. 항생제 알러지였지만 수술한 직후라 약을 안 쓸 수는 없었다. 외출증을 받아 피부과로 뛰어갔다. 환자의 상태를 보지 않고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내가 몰라 뛰쳐나간 것이 아니었다. 백방으로 전화를 돌리고 간신히 말이 통할 것 같은 의사를 찾아내어 사정을 간곡히 설명했다. 원칙은 안 되지만 사진도 가져왔고 환자 사정이 딱하니 연고를 처방해 주겠다고 했다. 병원 이름처럼 그 의사가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어렵게 구해 온 피부과 연고는 별 소용이 없었다. 그저 피부가 짓무르지만 않길 바랄 뿐이었다. 


어느 날은 엄마의 입술이 하얗게 변했다. 수간호사를 불렀다. 빈혈이 의심되어 피검사를 하고 수혈을 준비하겠다고 한다. 다만 코로나로 혈액원 사정이 좋지 않아 주변에 수혈을 요청할 사람이 없겠냐고 했다. 최근 암 수술을 받은 아빠와 자가면역질환이 있는 나는 이럴 때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혈액원에 요청하기로 하고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모를 시간을 기다렸다. 흘러가는 시곗바늘을 야속하게 바라봐도 원하는 혈액이 빨리 오진 않는다는 걸 알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 인생에서 이토록 무력했던 시간이 또 있었던가. 


열이 내려야 수혈이 가능하단다. 

물수건을 몇 번이고 빨아서 엄마의 몸을 닦았다. 간신히 온도가 내려가고 나서야 수혈을 받을 수 있었다. 두 팩이 다 들어가고 나서야 엄마의 입술 색이 조금 불그스레하게 돌아왔다. 


수술을 한 차례 더 받아야 하는데, 아직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더 있는데, 갈 길이 너무 멀었다. 

매일같이 엄마가 조금이라도 먹을 수 있을 만한 음식을 준비해서 넣어주느라 아빠도 병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출입이 금지되어 매일 문 앞에 필수품을 맡겨놓고 우리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매일 새벽에 두 번씩 깨어 엄마의 기저귀를 갈아 주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매일 바쁜 간병의 하루를 보내느라 앉을 시간도 없어 족저근막염이 생겼지만 힘들지 않았다. 

매일 예상치 못한 일에 보호자로서 대처하느라 조용히 앉아 있을 틈이 없었지만 괜찮았다. 내 학교 일도 손 놓을 수가 없어 휴게실에서 밤늦게 작업해야 했지만, 견딜만했다. 

매일 아빠의 상태도 걱정이 되어 신경을 두 배로 써야 했지만 나는 괜찮았다. 나는 아직 젊고 오늘을 위해 운동을 그렇게 했었나 보다 라며 농담으로 아빠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엄마가 밥을 먹지 못하고 위액만 뱉어낼 때, 환자와 보호자용 식사를 취소하면서 남몰래 비상구 계단에서 목 놓아 울었다.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가져온 피부과 연고가 큰 소용이 없었을 때 조용히 화장실에서 흐르는 물 소리에 눈물을 씻어 보냈다. 수혈을 해 줄 수 없는 상태라 이름도 모를 사람의 혈액만을 오매불망 기다려야 했을 때, 가슴이 답답해서 터질 것만 같았다. 


나도 안다. 말기암 병동도 아니고 정형외과 병동에서 정말 유난이라는 것을. 그렇지만 몸도 성치 않은 엄마가, 저렇게 작은 엄마가 앞으로 한 차례 더 수술과 재활을 이어나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많이 쓰라렸다. 엄마의 내일이 지금껏 살아왔던 삶과 많이 달라질 생각을 하니 그저 안타깝고 불쌍했다. 살면서 그동안은 어떤 결과를 얻지 못하면 내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노력을 더 기울이면 당장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하루하루 발전한 내 모습을 보답으로 삼아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내 노력이 통하지 않는 세상. 내 힘으로 어쩔 수 없어 초월적인 존재라도 붙잡아 보고 싶지만 그 마저도 마음같이 되지 않는 세상.  


자꾸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장면을 곱씹어 본다. 

출국 전날, 평소처럼 내 방에서 밤늦게까지 수다라도 떨고 가지. 

그러면 오밤중에 다시 나와 화장실을 갈 일은 없었을 텐데. 


거실에 작은 불이라고 켜고 다니지. 그러면 걸려서 넘어질 일은 없었을 텐데. 



 


Paula가 물었다. 

엄마는 왜 넘어진 거냐고. 


처음으로 목구멍을 보이지 않는 손이 막고 있는 느낌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내 심장 박동만 벌어진 입 사이로 조용조용히 느껴졌다. 


"엄마는 내가 거실에 둔 여행용 가방에 걸려서 넘어졌어"


"이 모든 일이 네 잘못이라고 생각하니?"


"잘 모르겠어. 한동안 다리를 절고 있었다니 골다공증 약의 부작용은 이전부터 있었던 것 같아. 골절은 언제 일어나도 일어났을 거라고 생각해..."



Paula에게 한 말이 진심인지 잘 모르겠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건 내 방어기제 아니었을까. 

여전히 마음 한편에는 내 잘못임을 알려주는 목소리가 있다. 엄마도 아빠도, 모두가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과연 사실일까...? 


엄마의 단말마 같은 비명 소리가 들리고 내가 방에서 튀어나왔을 때, 문제의 가방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거실 바닥에 엎어져 있는 엄마의 머리를 가슴께 끌어당기며 슬피 울었다. 가방을 저기 둬서 미안하다고. 엄마는 늘 두던 자리에 두지 그럼 어딜 두냐고 힘없이 말했다. 병원에서 짐을 챙기러 집에 잠깐 들렀을 때 분노를 참지 못하고 문제의 가방을 발로 걷어찼다. 정말 내 다리가 부서져라 힘껏 걷어찼다. 아빠가 나를 안아가며 말렸다. 이미 벌어진 일, 이렇게 무너지지 말자고.   

 

그 일이 있고 1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내가 혼자 있을 때면 엄마가 거실에 넘어져 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엄마의 비명소리를 떠올리기만 해도 피부가 아닌 내장기관에서 털이 쭈뼛 서는 것 같다. 그 이후 부모님 댁을 가본 적은 없다. 이전과 달리 엄마랑 자주 통화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왔는데, 전화를 하기가 너무 어렵다. 


내 기억의 일부분은 아직도 그날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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