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굴이 Apr 24. 2023

정형외과 병동의 이상한 가족 - 3

외상후스트레스장애

항생제 알러지, 발열, 수혈 등을 겪으며 두 번째 수술을 마음 졸여 기다렸고, 수술이 끝났다. 정말 진 빠지는 과정이 조금씩 조금씩 지나가고 있었다. 


비상구 계단에서 몇 번 남몰래 울던 장면을 들킨 걸까. 묘하게 간호사들이 친절해졌다. 

우리 엄마는 정말이지 까다로운 환자라서 약을 쓰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을 매일 목격했다. 오히려 암 수술이라는 큰 일을 치른 아빠는 본인이 먼저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무던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에 반해 엄마는 치료하기 까다로운 케이스였다. 괜스레 의사의 눈치가 보였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엄마가 다시 두 다리로 건강하게 걸을 수 있을까. 휠체어에 태우고 다시 침대로 올리는 과정도 이렇게 버거운데 그럴 날이 올까. 어느 날은 위액을 쏟아내는 엄마를 뒤로 하고 환자용 식사를 취소하러 접수부에 갔다가, 나도 모르게 홀연히 물었다. 다들 수술 후에 잘 걸으시냐고. '네, 다들 잘 걸으세요'라는 그 한 마디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절로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병원에서 갇혀 지낸 지 2주가 넘었다. 아침마다 상처를 소독하러 오는 선생님들과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로 내가 여기 오래 있었다. 그 사이 2인실 환자였던 엄마 옆으로 3-4명의 환자가 지나갔다. 80명 가까운 환자가 입원한 이 자그마한 병동에서 나에게도 낯익은 얼굴이 생겼다. 하루에 2-3번 물건을 전달해 주러 오시는 아빠를 잠깐 만나러 입구에 나갔다가, 담배를 피우러 나온 같은 층의 할아버지 환자가 나를 먼저 알아보는 일도 있었다. 우리가 오래 있긴 있었구나 싶었다. 2주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긴 한데, 우리에게는 영겁과 같았다. 하루는 지루하고 정해진 루틴의 반복이었지만 밤이 빨리 찾아왔고 아침도 빨리 찾아왔다. 새장에 갇힌 새처럼 창문 너머 저 아래 지나다니는 차들과 종종걸음으로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속한 세상이 어디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안부 인사를 전해 온 몇몇 지인과 친구들에게 엄마의 갑작스러운 수술로 출국이 늦어졌다는 말을 전했다. 누군가는 '엄마가 너랑 좀 더 같이 있으려고 이런 일이 생겼나 보다'라는 위로를 건넸고, 누군가는 혼자 있을 아빠의 회복을 위해 영양식품을 보내주는 것으로 마음을 전했다. 말로 다 할 수 없이 고마웠다. 메신저나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는 몇몇 사람들 덕분에 이 모든 일도 곧 지나갈 것임을 인지할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발바닥이 불에 타는 것 같았다. 족저근막염이 의심되었다. 

입원 병동이 정형외과였던 덕분에 오늘은 내가 환자가 되어 진료를 보고 올라왔다. 체외충격파 치료를 몇 번 받아보란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치료실에서 10톤짜리 전기 망치로 발바닥을 때리는 '충격'을 5분간 경험하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엄마의 병실로 돌아갔다. 충격적이어서 '충격파'라는 이름이 붙은 것 같다고 말해줬다. 엄마 어깨의 석회화건염에는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아픔을 잘 참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아팠다. 끙끙대면서도 순간 생각했었다. 체외충격파도 이렇게 아픈데 다리가 부러진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그러다가 곧 분리불안으로 이어졌다. 30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엄마가 보조기구를 이용해서 걷다가 미끄러지거나, 화장실 문고리에 걸리거나 등등 말도 안 되는 상상이 자꾸 펼쳐졌다. 


어느 날은 하늘이 핑 돌았다. 

평소 같으면 그냥 쉬고 말 일이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선제적으로 의사를 찾았다 (2급 병원이었던 덕분에 각종 진료 분과가 있었다). 나는 아직 보살펴야 할 사람이 있다. 영양제와 수액을 섞어 맞으며 조용히 울었다. 


수술 후 와병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엄마의 꼬리뼈에 욕창이 생기기 일보 직전이었다. 

매 주말마다 일이 생기니 이제는 토요일 아침이 되면 몸에 긴장이 들어갈 지경이었다. 다른 병실의 간병인 아줌마를 붙잡고 물었다. 나보다는 많이 아실 테니까. 욕창 방지용 에어매트를 구입하란다. 그리고 통풍을 자주 시켜줘야 한다며 민간요법을 몇 가지 전수해 주셨다. 너무 감사하다는 마음을 먹은 것도 잠시, 노인들만 바글바글한 이 병동에 모녀가 3주째 있으니 퍽 관심의 대상이 되었나 보다. 새벽에 기저귀를 버리는 것을 유심히 봤다는 둥, 엄마가 보조기구를 사용해서 걷는 것을 봤다는 둥 몇 가지 질문을 하면서 '이 처자는 하는 일이 뭔데 이 병원에서 3주째 이러고 있을까' 하는 눈빛을 보냈다. 웃으면서 대충 대답을 피했다. 어떤 병동의 할아버지는 굳이 우리 엄마 병실 앞에서 다른 환자랑 큰 소리로 떠들며 이렇게 말했다. 

'부모가 돈이 있어야 돼. 돈이 있으면 간병을 하고 돈이 없으면 이렇게 팽개쳐 놔'. 


나는 우리 엄마아빠의 재력 여부와 나의 간병 여부를 연결시켜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당연하게 한다고 생각했던 '자식 된 도리'가 자본주의 논리로 간단히 설명되는 것을 보고 순간 웃음이 나왔다. 아니, '자식 된 도리'라서 한다는 생각조차 할 겨를 없이, 나는 그냥 했다. 당연히 내가 와야 한다고 생각했고, 아빠의 수술도 내가 들어가려고 13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고 굳이 한국을 왔다. 왜 돈을 언급하는 걸까. 엄마와 조용히 속닥거렸다. '엄마, 왜 다들 남의 일에 그렇게 관심이 많지?'


학교 일을 더 이상 미루기가 어려웠다. 이미 3-4주 늦어졌는데, 주제를 조금 바꿔야 한다는 결론이 났기 때문에 돌아가서 처리할 일이 꽤 있었다. 내 마음도 급했지만, 아직은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다만, 첫날 응급실에서 급하게 미뤄놓은 비행기 표를 다시 바꾸려면 비즈니스 석에 준하는 금액을 추가로 지불해야 했다. 이미 한국을 올 때도 비행 편을 3-4번 바꿨고, 돌아가는 비행기도 1-2차례 변경을 한 터라 추가 지출이 부담스러운 지경에 이르렀다. 엄마아빠도 내가 오래 머무를수록 학교 일은 괜찮냐며 걱정을 내비치었다. 


엄마가 어느 정도 보조기구로 거동을 하는 일에 익숙해져 갈 무렵, 간병인을 구해달라고 했다. 내가 일을 미루고 있는 모습을 보기 힘드니, 나가서 아빠를 조금 보살펴 드린 다음 예정대로 출국하라고 했다. 엄마의 재활은 시간이 한참 걸리겠지만 퇴원은 보고 출국하고 싶었다. 엄마는 한사코 말리며, 내가 말라가는 꼴을 더 이상 두고 보기가 힘들다고 했다. 자식에게 부담을 주는 일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어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새벽마다 눈도 못 뜨면서 기저귀를 갈고 버리러 가는 나를 보면서 혼자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했다. 이제는 큰 고비를 넘겼고 회복 상황에 따라 퇴원이 곧 결정될 것이니 간병인을 쓰자고 한다. 아주 강하게 반대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곧 출국을 해야 했고, 차라리 엄마가 퇴원해서 집안일에 신경을 덜 쓸 수 있도록 몇 가지 준비를 해놓고 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3주 가까이 혼자 지낸 아빠의 상태도 걱정이 되었다. 


간병인 아줌마에게 전달할 상황을 A4 4장이 꽉 차도록 자세하게 적었다. 엄마가 2번째 수술을 한 날 병실에 들어온 옆 침대 환자와 보호자가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퍽 신경이 쓰였다. 우리 엄마도 할 말은 참지 않는 성격이라고 하나, 심신이 많이 지쳐있고 예민한 사람이라 내가 눈치껏 상황을 살피며 이것저것 조치를 취하는 편이었다. 내가 없으면 엄마가 사소하게 신경 쓸 일이 많아질 것 같아 그 부분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엄마는 1주일 내로 퇴원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주저하는 나에게 손사래를 쳤다. 



나는 그렇게 엄마를 병원에 두고 나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 짐을 챙겨 간호사 선생님들께 인사를 하고 간병인 아줌마와 같이 내려왔다. 어차피 출국 전까지는 나랑 아빠가 매일 필요한 물품을 전하러 병원을 올 테니, 간병인 아줌마가 아빠 얼굴을 알아두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엄마는 간병인 아줌마가 나를 정문 앞으로 바래다주고 돌아갈 그 몇 분 동안 병실에서 혼자 있었을 것이다. 눈치 없는 옆 침대 환자와 보호자의 선을 넘나들며 묻는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을 했을지, 아니면 아예 질문도 안 받았을지는 모르겠다. 기억은 참으로 선택적으로 남는 것이어서, 간병인 아줌마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가방을 싸서 떠나는 나에게 애써 웃어주고 몸을 돌려 침대로 향한 엄마의 앙상한 등이 아직도 선명하다. 가장 작은 환자복도 헐렁하게 만들 만큼 마른 그 등을 3주 동안 수도 없이 쓸어내렸다. 골절상이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도 아닌데, 간병을 지척거리에서 하다 보니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이 한참 떨어졌던 것 같다. 금방이라도 툭 치면 부러져서 죽어버릴 것 같은 엄마. 입맛도 없었지만 그런 엄마를 두고 밥을 밀어 넣을 염치가 없었다. 하루에 2번 필요한 물건을 건네주러 오던 아빠는 언젠가부터 내 얼굴을 보고 걱정하기 시작했지만, 그도 걱정되긴 매 한 가지였다. 수술을 하고 회복에 전념해야 할 당사자인데, 우리를 병원에 넣고 다시 그 사고가 난 집으로 돌아가 밤을 보내는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워낙 무던하고 감정 표현이 없는 사람이라 자기 걱정은 말라고 했지만, 엄마의 두 번째 수술 전후 즈음하여 한밤 중 혈뇨를 봤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전해주었다. 급히 달려간 병원에서 집도의가 걱정하지 말라고 있을 수 있는 일이라 하여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긴 했지만... 세 가족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죽을 힘을 다해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바뀐 일정으로 정말 출국하는 날. 혹시라도 엄마의 상태가 많이 좋아져 내가 출국 전에 엄마가 퇴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두 번째 수술을 마치고 10일 정도는 병원에서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결국 출국 전날 병원으로 가 만남의 장소에서 엄마를 잠깐 보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걱정 말고 잘 가라고 했다. 애써 웃어 보였다. 


출국 전까지 엄마가 하던 대로 음식을 준비해 놓으려고 노력했다. 아빠도 먹어야 하니까. 평소 같으면 엄마가 다 했을 일을 내가 오며 가며 봐온 눈짓으로 흉내 내어 음식을 하고 쌀을 씻었다. 아빠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걸 몰라서 하는 게 아니다. 조금이라도 상대가 덜 힘들었으면 하는 마음 그 뿐이었다. 곧 퇴원할 엄마가 집에 왔을 때 너무 아무것도 없으면 힘들 것 같아서, 그 날만을 상상으로 그리며 계속 나물을 볶고, 국을 한 솥 끓이고, 과일을 깎아 통에 나눠 담았다. 발바닥이 터질 것처럼 화끈거렸다. 나는 괜찮았다. 돌아가서 쉬면 되니까 괜찮았다. 내가 비행기를 탄 후 이들 두 사람이 지낼 삶이 걱정되었다. 나는 금방 괜찮아질거다.   


출국 날 아침, 나를 역으로 데려다 주면서 아빠가 울먹였다. 세 가족 모두 너무 감성적으로 변했나 보다. 웃으며 아빠를 안아주고 늘 그랬듯이 뒤돌아 걸어가며 조용히 울었다. 나는 이 기차역을 마른 눈으로 들어온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기 전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울지 말고 네 탓이 아니니 마음 무겁지 않게 돌아가라고 했다. 입을 열 수가 없어 어금니를 꽉 깨물고 '응', '아니'만 반복했다. 눈물 콧물이 흐르는데 숨을 코로 쉬면 우는 소리가 상대에게 전해질까 봐 입으로 숨을 쉬었다. 코가 꽉 막혀왔다. 전화를 끊고, 이 모든 상황을 처음부터 다 알고 기꺼이 자신의 출국 일정까지 바꿔 준 상대를 붙잡고 그제야 꺼이꺼이 울었다. 내가 엄마를 버리고 온 것만 같았다.  




Paula가 물었다. 요즘은 어떤 꿈을 꿨냐고. 


내 꿈에서는 계속 정체불명의 사람이 병원에 누워 있다. 내가 간병을 해야 할 사람이다.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같은 내용이었다. 꿈에서조차 무력했다. 정확히 엄마 간병을 한 3주만큼의 시간이 흐른 다음, 서서히 꿈이 옅어졌다. 한국에서 잠이 많이 모자랐던 것일까. 신생아처럼 자는 날이 한동안 이어졌다. Paula는 내가 PTSD를 겪고 있는 것이라 말했다. 정교한 진단 기준을 따르면 또 이야기가 조금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일단은 내가 겪고 있는 모든 감정과 증상은 외상후스트레스를 의미한다고. 게다가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을테니 알게 모르게 충격이 클 것이라며. 


"Do you think it was your fault?"


아니라고 대답했다. 내 잘못이라고 하기에는 엄마의 병증이 너무 오래전부터 진행되었고 골다공증 약을 처방한 의사도, 여기저기 전전한 숱한 병원의 의사들도,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 더 큰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아직 잘 모르겠다.


이곳으로 돌아와서야 조금씩 먹고 싶은 음식이 생각나고, 식욕이 조금씩 돌아왔다. 아주 천천히 조금씩 몸을 움직이며 심장 박동수를 올렸다. 내 옆에 항상 있어주는 사람이 있어 어딘지 모를 '동굴'에 빠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혼자 있을 때면 계속 그 때 생각이 난다. 엄마에게 전화도 자주 하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못하겠다. 그 후 바뀌어 버린 우리의 관계가 버거워졌다. 동시에 그 부담감이 죄스러웠다. 이 마음이 정확히 무엇인지 계속 찾고 있는데 잘 모르겠다. 

 

여전히 그 날이, 엄마가 쓰러져있던 그 장면이 생각난다.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기울여도, 최선을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무력했던 그 3주가. 

매거진의 이전글 정형외과 병동의 이상한 가족 -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