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으면 6주 길면 3개월
나는 캐나다에 살고 있다.
겨울이 우울하고 춥다는 것을 제외하면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가 퍽 마음에 든다. 자연경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이 도시의 가장 큰 장점인데, 지척거리에 해변이 있고 차로 1시간 거리에 쉬운 코스부터 전문 산악인만 가능한 코스를 겸비한 산이 즐비하다. 공기가 청정한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그 덕분에 높고 푸른 하늘을 언제든 누릴 수 있다. 다만, 이곳은 캐나다에서는 가장 따뜻한 도시이지만 차라리 폭설이 내려 도시가 마비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겨울 내내 비가 온다. 한국에서도 비를 참 싫어했는데,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도시로 올 줄이야... 그깟 비가 대수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10월부터 3월까지 (요즘은 기후변화로 4월, 길면 6월까지) 정말 매일 비가 온다. 서머타임이 끝나면 오후 3시에 해가 지는 이 도시에서 우기가 시작되면 계절성 우울증은 너도 나도 한 번씩 앓고 넘어가는 '감기'가 되어 버린다. 그 때문인지 이 도시에 위치한 대학의 심리학, 심리상담, 우울증 연구 수준이 꽤 높은 것으로 알고 있다.
성질 급한 한국 사람들에게는 삶의 흐름이 너무 느려 불편할 부분이 많겠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이건 느리고 저건 느리고' 하며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을 많이 봤지만 (그럴 때는 한인타운을 가면 된다. 세련되진 않았으나 90년대 한국 분위기로 오밀조밀 다 갖춰져 있다), 사실 적응해서 지내다 보면 크게 불편하지 않다. 게다가 팬데믹을 겪으면서 Uber Eats, Door Dash, Skip the Dish 같은 배달앱이 엄청나게 빠르게 성장한 덕에 필요한 음식을 배달시켜 먹을 수 있게 된 이후로 생활이 급 편리해졌음을 느꼈다. 팬데믹 전에는 Domino Pizza를 제외하면 '음식 배달'이라는 개념이 크게 통용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물론 지금도 이곳이 서울처럼 밤에도 도시가 환하다든가 새벽 2시에도 편하게 갈 수 있는 식당이 널린 것은 아니다. 게다가 배달앱 기사들의 광폭 질주로 운전하기가 점점 까다로워지고 있다는 단점도 있다. 여하간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은, 팬데믹이 아니었으면 느리고 평화로운 이 도시가 이렇게 단기간에 급속도로 변했을 리 없다는 점이다.
사실 한국 음식을 엄청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한국어가 크게 그립지도 않았으며, 한국에서 누릴 수 없는 마음의 평화와 심신의 밸런스를 갖추기에 최적의 환경이라고 생각하여 한국을 그다지 마음에 품지 않았었다. 내가 절실하게 병원을 갈 일이 있기 전 까지는... 단언컨대, 의료 시스템만큼은 한국이 최고였다. 물론 의료계 종사자들은 다른 견해를 갖고 있겠지만, 환자의 입장에서는 진입장벽 낮지, 빠르지, 싸지, 돈이면 다 되지, 정말 천혜의 환경이었다. 어쩌다 보니 캐나다의 의료 시스템을 경험할 일이 꽤 있었는데,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잘 모르고 처음 겪을 때에는 정말로 속도가 느린 것 그 하나 때문에 미치고 팔짝 뛰는 줄 알았다.
한국에서는 환자가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필요한 진료 과목을 골라서 간다. 콧물이 나고 기관지가 좋지 않으면 이비인후과를, 위장이 아프면 내과, 당뇨나 고지혈증 등 관리해야 할 항목이 있어도 내과, 배변 활동에 문제가 있으면 내과 혹은 항문외과 등등. 한국의 의료 시스템은 환자의 자체 판단 능력을 매우 존중해 준다. 하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 마트 가듯 드나들던 전문의 병원은 몇 단계 검증을 거친 후에야 갈 수 있는 어려운 곳이었다. 일단 몸이 아프면 무조건 'family doctor'를 만나야 한다. 한국어로는 '일반의'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이 일반의가 환자를 만나 자기 수준에서 처리할 수 있는 증상이면 약제 처방이 나간다. 하지만 대부분은 관련 분과의 추가 진료가 필요하기 때문에 '전문의 연결 (specialist referral)'을 받아야 한다. 문제는 이 과정이 겁나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이 '연결'을 위한 신청도 환자는 할 수가 없고, 일반의가 관련 전문의 클리닉에 연락을 하면 환자 증상의 경증에 따라 수주에서 수개월 뒤 연락이 온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문의를 보기 전에 병이 자체적으로 낫는 경우도 있다.
내가 처음 전문의를 만나야 했을 때는 정확히 6주 반을 기다리고 나서야 겨우 의사 사무실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내 캐네디언 친구는 그 정도면 빠른 편이라고 했다. 하지만, 한국의 빠르고 신속한 의료 시스템에 길들여져 있던 나는, 어떤 증상이 있는데 그걸 하루 이틀 내로 처리하지 못하고 1달 반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기다려야 한다니 딱히 방법은 없어 기다렸지만, 과하게 불안을 키워 몸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6주로 기억한다. 한국보다 피검사에는 관대한지 일반의를 만나러 가면 거의 2번에 1번 꼴로 피검사를 시키는데, 그 피검사 결과도 환자가 웹페이지에서 직접 볼 수 있게 된 것이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그전에는 다시 의사를 만나 결과를 들을 때까지 환자는 모른 채 기다리는 시스템이었다는 이야기다.
한 번은 피부에 수포가 생겨 피부과 의사를 만나야 했는데, 당연히 귀한 피부과 의사는 내가 직접 보러 갈 수가 없었다. 팸닥/일반의 혹은 전문 간호사 (여기는 간호사도 어느 정도 레벨이 되면 제한적이지만 약을 처방할 수 있다)를 전전하며 여름이 다 지나갔다. 수포는 5월에 처음 생겼는데, 가라앉다 재발하길 반복하였고 간호사가 처방해 준 연고는 별 소용이 없었기에 종류가 다른 연고를 3차례 처방받았다. 이 과정도 썩 귀찮은데, 한국처럼 약국에 처방전을 넣고 5-10분 기다리면 약이 나오는 신속함은 여기서 기대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처방전을 넘기면 당일 저녁 혹은 다음날 찾으러 와도 좋다는 연락이 온다. 그전에 가 봤자 약은 준비되어 있지도 않고 (약을 현장에서 만드나?), 헛걸음만 하여 짜증만 솟구친다. 3개월 가까이 이어진 피부과 의사를 향한 나의 일방적인 구애는 전문 간호사 수준에서 철저히 거절당했는데 그 이유는 '심각하지 않을 때 전문의를 연결시킬 경우 의료진에게 과도한 부담을 야기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팬데믹 기간이었기 때문에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직접 의사가 환자를 보지 않는 분위기가 만연했을 때였기에 내가 운이 조금 좋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대신 해당 기간에는 원격진료가 대면 진료를 대체했는데 그 덕분에 지금도 원격진료가 상당히 많이 진행되고 있다). 5월부터 여름 내내 수포가 생겼다 말았다 하며 시달렸던 내 발바닥은 8월 말이 되어서야 겨우 피부과 의사를 영접할 수 있었고, 그 이후에도 각종 피검사며 균검사를 하느라 10월까지 지지부진한 과정이 이어졌다. 수포가 생기자마자 구글링을 해 봤더니 한포진 같던데, '예, 한포진입니다'라는 의사님의 진단은 병이 발생하고 4개월이 지난 다음에 들을 수 있었다. 참고로 나의 한포진은 이듬해 여름 한국에서 예약 없이 당일 접수(!!)로 피부과 의사를 만나고 나서야 필요한 약을 처방받음으로써 일단락 지어졌다. 심지어 당시에는 한포진 증상도 없었고 의사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캐나다였다면 증상이 있을 때 다시 오라고 했을 것이 뻔하다.
일반의를 만나는 것도 한국에서처럼 환자가 주체적으로 병원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생각하면 곤란하다. 무조건 예약이 필요하다. 정말 급할 때는 당일 의사를 만날 수 있는 'walk-in clinic'도 있지만 드물다 (대기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4시간이 될지 6시간이 될지). 그래서 정말 급한 증상은 그냥 응급실로 뛰어가는 것이 낫다. 물론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기 시간은 최소 3시간이다.
어디에 살든, 한국의 의료 시스템과는 인연을 계속 유지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의료보험은 바라지도 않는다. 필요한 검진을 (비싸지 않은) 돈으로 내가 원할 때 할 수 있는 자유.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았는데, 전혀 당연하지 않은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