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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굴이 May 01. 2023

사지 멀쩡하게 응급실 가기

대기 시간은 복불복

예방적 차원에서라도 약을 먹었으면 좋겠다는 할머니 의사의 말을 들은 지 1년이 지났다. 

애초에 병명을 밝히는 것도 힘들고, 증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 경우에는 추적 관찰하며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할머니 의사뿐 아니라, 한국에서 찾아간 대학 병원 의사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으니 어느 정도 의사들끼리 합의(?)를 볼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다만 여기서 상태가 더 나빠지면 발현될 수 있는 병으로 할머니 의사가 의심하는 병명과 한국 대학병원 의사가 의심하는 병명이 달랐다. 마치 내가 동물이 되는 병(...)에 걸린 것에는 모두가 동의하는데 너구리가 될지 라쿤이 될지 의견이 다른 상태랄까. 물론 내가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으니 캐나다 주치의인 할머니 의사의 말을 듣는 것이 더 합리적이겠으나, 어떤 병으로 발현될지 혹은 발현될지 말 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선뜻 특정 약을 먹겠다고 마음먹기가 어려웠다.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있지 않나. 부작용을 감수할 만큼 위중한 상황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더니 할머니 의사도 동의했다. 조금 더 지켜보고 마음이 내킬 때 약을 먹어도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 건강에 대한 불확실성과 그로 인한 걱정이 의식의 저변에 남아 있었던 탓에 내가 과민반응하고 있는 것인지 혹은 실제로 그러해서였는지, 스트레스를 받는다 싶으면 어김없이 증상이라 할 만한 것들이 몸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추적 관찰이라는 이름 하에 할머니 의사 얼굴 5분을 보겠다고 1시간씩 시간을 들여 바깥출입을 하는 것도 1년 정도 하고 나니 조금씩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엄연히 의사와 환자의 관계이니 우리가 만나서 수다를 떨 것도 아니고, 의사 입장에서도 딱히 해줄 것이 없는 환자를 정기적으로 보는 것이 불필요하게 느껴졌을 테다. 본인의 치료 경험을 돌이켜 보건대 (내 나이보다 이 할머니 의사가 의술을 펼친 세월이 더 길다), 자신이 권하는 약의 예방적 효과는 분명히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며 약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권하였다. 할머니 의사의 적극적인 세일즈가 아니었더라도, 자꾸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몸의 변화가 불안하게 느껴져서 이번 면담에서는 내가 먼저 약을 먹겠다고 말할 참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약 복용에 1년 만에 합의에 도달했고, 몇 가지 주의사항과 복용법을 전해 들은 뒤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약간의 식도염 증상이 다시 생기는 것 같았지만 휴대폰 저 너머 할머니 의사는 단호하게 약과 식도염은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환자가 증상을 호소해도 의사가 아니라고 말하면 그뿐이었기에, 그냥 신경 쓸 일이 많아서 위장이 예민해진 것이라 생각하고 더 묻지 않았다. 영양제만 챙겨 먹다가 꼬박꼬박 시간 맞춰 먹어야 할 약이 생겼을 때는 서서히 비가 잦아들고 벚꽃이 피는 3-4월 즈음이었다. 당시 4월 말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시점이었는데, 거의 2달 가까이 밤낮없이 일에 몰두하고 문제가 생기면 닥치는 대로 해결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중요한 서류는 다 제출하고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을 1주일 앞두고 있었다. 요식 행위라고 할 정도로 형식상 절차에 지나지 않은 발표지만 여러모로 신경이 쓰여 자료를 만들고 있었다. 갑자기 양손에 습진이 생겼고 뽀글뽀글하지만 매우 작은 수포가 보이는 부분을 중심으로 가려움증이 시작되었다. 한국에 있을 때 환절기를 앞두고 비슷한 습진을 겪은 적이 있어 이번에도 비슷한 일인 줄 알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가려움증은 저녁 나절이 되자 더 심해졌고 항히스타민 연고도 소용이 없었다. 


불과 24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손에서 시작된 가려움증은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정말로 마른 들녘에 성냥불을 붙이면 불길이 이렇게 번져나가겠구나, 상상이 될 정도로 팔, 가슴, 배, 등, 허벅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종아리까지 발진이 번지는 데에는 4-5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제는 열감도 느껴졌고 피부가 전반적으로 부풀어 오르다 보니 몸이 뭔가 뚠뚠 해졌다.


다음날 오전 7시로 잡혀있던 일정을 취소했다. 얼굴을 제외한 피부의 모든 부위가 화끈거리고 의자에 닿는 허벅지와 엉덩이는 가려워서 진득하니 앉아 있지를 못했다. 할머니 의사 진료실로 이메일을 보냈다. 의사가 진료실에 나오는 날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빠르게 답변을 받았다. 일단은 복용하는 약을 중단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지만 해결책에 대한 말은 일언반구 없었다. 나는 메일을 받고 바로 근처 학교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다행히 응급실 시스템에 대해 잘 아는 선배에게 물어보고 간 덕분에 내가 가는 그곳의 대기시간이 다른 병원 응급실보다 짧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문제는 내가 너무 사지 멀쩡하게 응급실로 왔다는 점이었다. 

사실 drug rash (약물 부작용으로 발진이 나타나는 현상)는 충분히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다. Anaphylactic shock (아나필락시스 쇼크)라도 오면 정말로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에 약물 부작용은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가까운 예로 '슬기로운 의사 생활'에서 장겨울이 생리통 진통제를 먹고 아나필락시스 쇼크가 와서 입술이 붓고 결국 기도까지 부어올라 기절한 장면이 있다.


다행히 나는 얼굴을 제외한 전신에 발진이 돋아 있었지만 입술과 기도는 매우 멀쩡했고, 아직 4월 중순이라 날이 추운 관계로 꽁꽁 싸매고 있어 약물 알러지로 뚠뚠 해진 내 피부는 내가 옷을 훌렁훌렁 벗지 않는 이상 보여줄 길이 없었다. 코로나 의심 증상이 없음을 확인한 간호사는 내 병력을 간단히 기록하더니 자리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렇게 1시간, 2시간, 그리고 3시간 반이 지날 때까지 나는 1시간에 한 번씩 간호사를 붙들고 '아직 멀었느냐'를 시전 했다 (이럴 때에는 정말 어쩔 수 없는 한국인임을 증명한다). 


3시간 반 만에 병동에 겨우 입성하고도 추가로 1시간여의 기다림 끝에 귀여운 의대실습생이 나타났다. 간호사에게 했던 이야기를 한 번 더 반복하는 것은 괜찮았다. 다만, 여기도 의대의 군기는 한국의 그것과 유사한지 병아리 같은 의대실습생은 당직 의사가 나타나자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그의 말을 우러러 경청하고 열심히 노트필기를 했다. 나는 내 약물 알러지가 한 명의 훌륭한 의사를 키우는 밑거름이 될 수 있음에 내심 뿌듯해졌으나, 푸른색 가운 한 장만 걸치고 쌀쌀한 병동에서 1시간 반 가까이 방치된 이후였고, 간호사와 의대실습생에게 반복했던 병력을 당직 의사에게 또 해야 했던 시점에서 묘하게 말이 사무적으로 나왔다. 


이들은 약물 알러지가 맞는 것 같다고 하면서도 조금 더 검사를 해야겠다며 다른 병동의 베드로 나를 안내했다. 30분 더 떨면서 누워있으니 이제는 다시 나타난 머리 떡진 당직 의사가 너무 반가웠다. 또 다른 알러지 반응을 일으킨 적이 있냐고 묻길래, 정확히 알러지는 아니지만 벌에 처음 쏘였을 때 이유 모를 2차 감염까지 왔었다고 했다. 벌 독에 알러지가 있는지 당시에는 검사를 해보지 못했기에 만일을 대비해 에피네프린을 상비약으로 가지고 있다고 했더니, 나를 본 이래 처음으로 당직 의사의 눈이 눈동자가 다 보일 정도로 크게 떠졌다. 에피네프린은 왜 갖고 있냐고 다시 묻길래 나도 다시 한 번 예방 차원에서 갖고 있는 거라고 말했더니, 병아리 의대 실습생에게 "이 아가씨 아주 용감한 아가씨로구만"이라는 말을 날렸고 실습생은 격하게 끄덕이며 동의했다. 내 생각엔 당직 의사의 권위에 격하게 끄덕이며 동의한 것으로 보였다. 


(참고로 에피네프린은 의사 처방 없이 구입했기에 180불 정도(한화 18만원)를 지불했다. 의사처방이 있다면 보험이 적용되어 조금 더 저렴했을 것이다. 에피네프린의 성분은 아드레날린인데 주로 아나필락시스 쇼크 같은 응급상황에서 교감신경계를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주사기 캡을 열고 환자 허벅지에 직접 근육주사한다). 


하지만 용감하다는 미사여구와 다르게 그의 처방은 나를 약간 힘 빠지게 만들었는데, 일단은 약국에서 over-the-counter 항히스타민제를 사 먹고 지금 복용하고 있는 약을 중단하면 좋겠다고 했다 (over-the-couter 약제는 의사 처방 없이 살 수 있는 약을 말한다. 한국어로는 일반의약품 정도로 번역하면 되겠다). 나는 담당 의사랑 연락이 닿아서 당일 오전부터 해당 약 복용을 중지하였고, 항히스타민 연고를 발랐지만 지난 48-60시간 가까이 큰 소용이 없었다고 말했다. 당직 의사는 다시 나를 한 번 더 보더니 그럼 over-the-counter 항히스타민제를 2일 정도 시도해 보고 family doctor를 만나서 의논을 하라고 했다. 


응급실에 오기 전 부터도 약물 알러지일 것이라 나름 짐작만 했지만 나는 의사가 아니니 함부로 자가 진단을 할 수는 없었다. 여하간 의사를 보긴 봤고 일단락되어 덜 찝찝하긴 했지만, 중요한 발표를 3-4일 앞두고 이렇게 일에 집중을 못하는 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 문제는, 항히스타민제를 먹었더니 엄청나게 졸려서 그 후로도 2-3일은 병든 닭처럼 졸며 꾸역꾸역 발표 준비를 해야 했다. 발표 준비를 차곡차곡 하고 싶었는데 인생은 참 예측 불가능한 일의 연속이구나. 


응급실을 다녀오고 이틀 후 family doctor를 만날 수 있었다. 의사는 복용약을 끊고도 독성이 빠져나가는 시간이 좀 필요하기 때문에 온몸을 뒤덮은 발진은 며칠 더 갈 것 같다고 했다. 많이 가려우면 연고를 바르고 계속 항히스타민제를 먹으라고 했다. 딱히 별다른 처치는 없었고, 할머니 의사도 원래 예정대로인 6월 말에 만나기로 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면 얼굴에는 발진이 나타나지 않은 점이라고 해야할까.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날 까지도 나를 허벅지와 팔이 가려서 은근슬쩍 몸을 의자에 비볐다. 또한 Zoom으로 진행된 프레젠테이션이라 아무도 내가 몰래 팔 다리를 긁고 있는 줄 모를 것이다. 멀쩡한 얼굴만 쏙 내놓고 발표는 그럭저럭 잘 진행하였고 나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몇 가지 정보 공유]

1. 이제 막 Vancouver에 오신 분들 중 (특히 유학생들), 응급실에 가면 몇 천 불은 우습게 청구된다는 비용 괴담을 듣고 '내 차라리 끙끙 앓다 죽을지언정 응급실만큼은 가지 않으리'라는 마음으로 버티시는 분들이 많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의료보험이 있는 경우 응급실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Vancouver가 속해있는 British Columbia 주는 거주민들에게 Medical Services Plan (MSP) 가입을 의무화하고 있다. 유학생들도 이 MSP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데, 가입은 BC 주에 실제로 거주하게 된 날짜부터 가능하다. 즉, BC주 밖에서 미리 가입하고 BC주로 이사 오는 날짜에 맞춰 의료보험 효력이 시행되게끔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보통은 유학을 오자마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MSP 가입과 은행 계좌 개설을 꼽는다. 문제는 MSP가 신청하는 날 아름답게 발급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유학생들은 BC에서 거주하는 첫 3개월 동안 iMED라는 한시적 의료보험의 적용을 받는다. 보통은 3개월 안으로 MSP 가입이 완료되며 Health Care card가 우편으로 배송된다. 이 MSP제도는 2020년 1월 1일부터 약간의 변경을 거쳤는데, 유학생들은 International Student Health Fee라는 별도의 의료보험 제도로 관리된다. 보험료는 종전과 같이 월 CAD75이며 보험 피가입자 입장에서는 MSP나 International Student Health Fee나 똑같이 느껴진다. 보장범위에 변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세세하게 변동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내가 받은 안내문에는 별로 변하는 것이 없음을 줄곧 강조했다), 의무적으로 의료보험에 가입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서론이 길었는데,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본인이 위에서 언급한 International Student Health Fee라는 명목으로 매달 돈을 내고 있다면 두려워말고 응급실을 방문해도 괜찮다는 것이 요지였다. 여기는 Walk-in clinic도 대기시간이 너무 길고, family doctor도 내가 필요할 때 '롸잇 나우' 만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급할 때에는 차라리 응급실을 가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물론 엄청난 대기시간은 감수해야 할 부분 (특히 두 다리로 온전히 걸어들어갔는데 뇌나 심장에 관련된 일이 아닐 경우)... 


2. 혹시 Vancouver에 거주하시는 분들 중에 응급실을 갈 상황에 처하신 분들, 아래의 웹사이트에서 가장 대기시간이 짧은 곳을 확인해 보고 가시길: 

http://www.edwaittimes.ca/WaitTimes.as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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