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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굴이 May 25. 2023

종교 대통합과 가치 있는 삶

May 2023

Cultus Lake를 다시 찾은 것은 5월 초순이었다. 

지난달 그곳에서의 첫 Cabin camping 기억은 좋았지만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이라 조금 아쉬웠다. 다행히 두 번째 방문이 이뤄졌던 날은 본격적인 여름을 알리는 주의 주말이었기에 (아니, 때 이른 폭염) 이전에 보지 못했던 햇살이 호수에 비치는 풍경을 원 없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봄을 맞이하여 새끼들을 데리고 산책에 나선 캐나다 구스 가족에게 "오리야!"라고 부르며 쫓아다니는 만행을 저질렀다. 나도 누가 내 이름 잘못 부르는 것 참 싫어하는데, 미안해 친구들...).  


이번에는 이왕 내륙으로 가는 김에 Kelowna까지 가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Winery도 가 볼 겸. 


계획에 있었던 것은 아닌데 어쩌다 보니 와이너리에서 식사도 하고 예정에도 없는 와인 구입을 왕창 했다. 묵직한 병을 집으며 살까 말까 고민할 때, '그래, 언제 또 여기까지 운전해서 오냐', '코로나 때문에 몇 년 못 왔잖아' 하는 마음으로 턱턱 집었더니 생각보다 지출이 많았다. 아 몰랑. 오늘의 내가 저지른 일은 미래의 내가 감당해 주겠지 뭐. 


경치는 눈으로, 음식은 입으로 넣으며 호사를 누리고 있자니, 와이너리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매일 이렇게 멋들어진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인가, 좋겠다, 하는 생각에 이르렀으나, 다들 생업으로 하는 일이니 풍경 아름다운 것도 길어야 3일 가겠구나 싶었다. 뭐든 밥 벌어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은 '노동'일 테니까. 


오로라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안고 자정이 넘도록 캠핑장 근처를 돌아다녔지만, 아쉽게도 오로라와는 연이 닿지 않았다 (결국 유콘까지 가야 볼 수 있단 말인가!). 대신 북두칠성과 오리온 별자리가 BBC 다큐에나 나올법한 화질로 머리 위에 떠 있었다. 목이 떨어져라 그렇게 밤하늘만 올려다보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가벼운 라면과 무거운 하이킹으로 다음날 아침을 시작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있는 한국식 절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이래저래 지리 탐방에 관심이 많은 내 짝꿍이 한참 전부터 가보고 싶어 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오늘에야 겨우 인연이 닿았다. 


절인지 과장 조금 보태 버려진 공장인지 모를 입구를 지나니 허허벌판 주차장이 나왔고 각종 농기구와 픽업트럭, SUV가 차례로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이 없길래 조용히 한 바퀴 둘러보고 가야겠다 싶던 찰나 경운기(?)를 몰고 홀연히 나타난 한 분이 아무래도 이 절의 주지스님 같았다. 어떻게 왔냐고 물으셔서 절이 있어 그냥 왔다고 말씀드렸더니 사진은 찍지 말라고 하셔서 그러겠다고 하고 걸음을 옮겼다. 부지가 꽤 커서 걸음을 한참 옮겼는데, 언제 오셨는지 우리 뒤에서 뿅 나타나 말을 걸어 주셨다.  


이 절의 사연은 퍽 기구했다. 마음의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과 신도를 위해 좋은 마음으로 절을 개방하였는데, 몇 차례인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도둑이 들어 CCTV와 철제 바리케이드를 설치할 수밖에 없었단다. Langley 지역을 주름잡는 갱단, Hell's Angels라는 조직이 주차장에서 하룻밤 묵고 간 적도 있고, 다른 갱단과 서로 총질하겠다고 남의 절에서 대치한 적도 있고, 절을 둘러보는 척 하면서 사찰 물품을 미리 파악하여 야밤에 트럭으로 몇 대나 실어 나르는 부지런한 도둑들이 수차례 방문했다고 하셨다. 심지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이른바 '땅밟기'라는 미명하에 조용한 이곳까지 굳이 찾아와서 그들의 신을 믿을 것을 시끄럽게 설파하고 가는 일도 부지기수란다. 한국식 절을 짓기 위해 모든 기술자들과 건축자재를 한국에서 실어온 일, 목재 건물에 못을 쓰지 않고 건축물이 완성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캐나다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아 수년에 걸쳐 종이조각 하나 받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던 일, 그렇게 지어놨더니 도둑이 들어서 너무 무거워서 옮기기 힘든 불상 빼고 다 훔쳐간 이야기 등등... 웃으면서 말씀하셨지만 퍽 고달프게 들렸다. 


그러다가 우리에게 종교가 있냐고 물어보셨다. 내 짝꿍은 군대에서 초코파이를 받기 위해 종교 대통합을 이루는 마음으로 모든 종교를 찾아다닌 기억을 내놓았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한 때 천주교 신자였다. 짧지만 성당에서 봉사한 기간도 있고 혼자 미사를 꽤나 열심히 드리러 다닌 세월이 내 20대에 자리하고 있다. "신자였다"라는 과거형으로 문장을 마무리 한 이유는, 나의 정체성을 설명함에 있어 종교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게 된 것이 꽤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냉담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주말마다 느껴졌지만, 그 느낌이 마음에서 흐릴 대로 흐려져 이제는 인지조차 하지 않게 된 지 오래다. 습관처럼 몸에 착용하던 성물 역시 보석함에서 곱게 잠들어 있다. 별다른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도, 딱 간사한 인간의 그 마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마음으로 종교를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을 뿐이다. 내가 정말 급할 때, 예를 들어, 고속도로에서 타이어가 터졌을 때, 엄마의 수술실 앞에서 대기 중일 때, 몸의 어딘가가 미친 듯이 아파서 숨을 쉴 수 없을 때, 등등 그때만 반짝 '신'을 찾는다. 그리고 이 때 내가 찾는 신은 특정 종교의 신이라기 보다, 만약 정말로 존재한다면 있을법한 그 초월적 존재인 '신'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종교에 마음을 더 이상 붙이지 못하는 이유는 10가지도 넘겠지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종교적 색채가 가미되지 않은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을 생각하면서 내가 한낱 미물에 불과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대답이 그렇게 궁금하지는 않으셨는지, 스님은 짝꿍의 초코파이로 얼룩진 종교관을 듣고는 웃으시더니 '가치 있는 삶'에 대해 설파하셨다. 어차피 인간은 동식물의 희생을 바탕으로 먹고사는 마당에, 이왕 사는 것 나와 타인에게 좀 더 도움이 되는 인간이 되면 좋지 않겠냐고. 다람쥐의 도토리를 허락 없이 빼앗아 먹고, 농사를 짓기 위해 꿀벌을 착취해야 하고, 고기를 얻기 위해 살생을 저질러야 하는데 어차피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굴레라면 남에게 피해 주지 말고 내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부터 챙기려고 노력하며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냐는 말씀이셨다. 그 삶이 가능하다면 불교를 혹은 종교를 믿지 않아도 괜찮다고. 종교를 믿는 사람 중에 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고, 각종 인면수심의 행태가 이어지고, 내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차별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지키는 일에 함부로 신의 이름을 들먹이는 꼴은 우리 모두 많이 봐오지 않았는가. 내 짧은 성경 지식이 정확하다면 신은 그렇게 함부로 불러도 되는 존재가 아니다. 아니, 종교까지 들먹일 필요 없이 사람은 그렇게까지 이기적이고 간악하게 살면 안 된다.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저지르는 잘못도 살면서 반성하고 살아야 하는데, 알면서 저지르는 잘못은 그 죗값을 어떻게 치르려고 그러나.   


이 넓은 절을 혼자 돌보신다기에 스님도 인간인데 외롭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던 찰나, 목 뒷덜미가 따끔따끔했다. 이 날이 태양이 무척 뜨거웠던 관계로 대웅전 안에서 말씀을 나눠 주셨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무래도 스님의 눈에 우리는 '잠재적 도둑'이 될 소지가 있는 사람이니 대웅전까지는 보여주지 않으셨다. 2톤 트럭으로 여러 대, 그것도 여러 번 절이 털렸으면 나라도 그렇게 할 것 같다. 짝꿍이 조심스레 여쭤봤다. 곧 석가탄신일인데 행사에 참석해도 되겠냐고. 주변 사람들 절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하기만 하면, 그리고 법당에 불 지른다는 협박만 안 한다면 와도 된다고 하셨다. 도시락 정도는 줄 수 있다고. 


그 길로 역시 지척에 자리 잡은 성당을 찾았다. 이 역시 짝꿍이 궁금해해서 (정식 미사를 꼭 같이 참석해보고 싶어 한다) 들렀다. 이곳도 성당 앞마당에 있는 큰 동상을 누가 Dolly로 돌돌 끌어서 훔쳐갔다는 슬픈 역사가 있는 곳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십자가와 성모상이 있었다. 성당은 행사 준비로 조금 북적였지만 조용히 기도할 수 있게 신부님이 배려를 해 주셨다. 가만가만 내 마음을 더듬어봤다. 독실하게 신을 믿는 마음이 넘쳐서 나도 같은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 그 사람이 기댈 곳이 종교밖에 없어진 상황이 슬펐지만 의지할 곳이 아주 없는 것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했다. 가족의 마음에 대못을 박다 못해 피칠갑을 하고 떠난 사람도 잠깐 소환했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평생 만나지 않기만을 바란다고, 똑똑한 사람이니 알아서 잘 먹고 잘 살겠지만, 죄는 짓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옆에 있는 짝꿍을 위해 기도했다. 내가 이기적으로 보일만큼 (보이는게 아니라 그냥 내가 이기적인 거야) 마음이 착한 사람과의 인연에 감사했다. 사람은 모두 언젠가는 죽고 모든 인연은 만나면 헤어진다는 것은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누구든 피해 갈 수 없는 숙명이라고 하지 않나. 나도 오늘의 인연이 영원할 것 같은 착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 모든 일은 유한하다는 것을 너무 까맣게 잊지는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나에게 어떤 종교가 있든 없든, 어떤 성과를 냈든 내지 못했든, 어떤 행동을 하든 하지 않든,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지 못했던 그 긴 터널에 혼자 서 있었던 나에게 미안함을 보냈다. 다른 사람 탓할 것 없이 나조차 나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다. 가만히 한참을 십자가 앞에 앉아 있었다.  


 


한국식 절이 밴쿠버에 있다니, Paula가 궁금해했다. 

단청, 동기와, 향로 등등을 설명할 단어가 퍼뜩 떠오르지 않아 우물거리다가 끝났지만, 대충 좋았다는 느낌은 전달했다. 


문득 왜 그 절에 가볼 생각을 했냐고 물었다. 글쎄. 

스님과 대화할 때 어떤 느낌이 들었냐고 물었다. 글쎄... 

가치 있는 삶에 대해 알려주실 때 나도 공감하는 바가 컸다고 했더니, 왜 크게 공감이 갔냐고 물었다. 아니, 정확히는 what did you notice라고 물었다. 뭐 그렇게 매 순간 내 느낌과 감정을 알아채는 건 아니라서, 이렇듯 Paula의 질문은 가끔 생각을 오래 하고 대답해야 한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를 향한 눈에 편견이 느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굳이 얘네를 우리 신자로 만들어야겠다는 절박함이나 들이댐도 없고, '왔냐? 잘 있다 가라' 하는 정도의 관심이 편안했다. 그렇게까지 독실한 종교인이 아니라는 것은 한눈에 알아채셨을 텐데, 이케저케 '해야 한다(should)'는 것도 없고, 심지어 가치 있는 삶을 역설하실 때에도 '당신들도 그렇게 살아!'라는 강압적 태도가 아니라 '그렇게 살아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라는 청유형 태도였기에 우리로 하여금 공감할 여지를 더 많이 남겨주셨던 것 같다. 무엇보다 편견 없이, 비판 없이, 그리고 판단 없이 그저 궁금해하는 태도 (no bias, no judgment, no shoulds, and just be curious). 아마도 내가 스스로에게 가져보면 좋을 태도 아닐까? 내 혼잣말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Paula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며 뭔가를 받아 적는다. 


시간이 흘러 흘러 석가탄신일 행사를 하는 날이 되었다. 반농반진으로 생각했는데 짝꿍은 벌써 갈 채비를 한다. 지난번에 허허벌판이었던 절이 사람들과 차로 북적였다. 예불을 드려본 적은 정말 없었기에 눈치껏 방석을 하나 차지하고 끈으로 묶인 책을 하나 손으로 집는다. 모두들 반가운 얼굴을 오랜만에 보는지 절 하는 사람 반, 인사하는 사람 반으로 법당이 가득 찼다. 처음 들어와 보는 대웅전의 향내가 좋았다. 이 절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땀과 마음을 썼을까. 흔들림 없이 울리는 스님의 목소리로 전달되는 불경 염불은 장장 1시간에 달하도록 끊이지 않고 지속되었다. 산스크리트어를 음차로 기록한 책은 뜻 모를 언어로 가득했다. 스님은 수많은 경전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자신과 마주했을까. 언젠가부터 눈앞에 보이는 사람의 앞모습이 아니라 뒷모습에 대해 자꾸 생각해 보게 된다. 외롭지 않았을까. 좌절감은 들지 않았을까. 끝이 보이긴 했을까. 일진이 사나운 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을까. 공기조차 낯설었던 날은 없었을까. 


잔칫날이라 예불이 좀 더 길다는 친절한 설명과, 또 '가치 있는 삶'에 대해 설파하시는 스님의 목소리를 배경음악으로 한 채 불상을 올려다보았다. 창문이 열린 것도 햇빛의 방향이 바뀐 것도 아닌데, 부처님 왼쪽에 앉아 계신 분의 이마에 박힌 보석이 갑자기 쨍 하니 빛나더니 그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내 자리에서만 보이는건가, 뭐 그렇다 한들 혹은 그렇지 않다 한들 아무런 의미는 없겠지만, 보석이 빛나주니 마음이 좋았다. 


절에서 키우는 고양이 두 마리가 있었다. 지난 번엔 대웅전까지 들어오지 못해서 보지 못한 모양이다. 잔디 위에 배 까고 드러누워 있는 걸 궁디 팡팡 해줬더니, 또 홀연히 나타난 스님이 '오늘 이쁨 많이 받고 노났네' 하셨다. 사진이라도 찍으면 좋았겠지만, 절도 문제로 사진을 허락하지 않는 곳이라 고양이는 눈에만 듬뿍 담아 왔다. 사람 손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야생성이 그대로 남아있는 고양이였다. 우리끼리 '절냥이'로 부르기로 했다. 관족식을 한 탑을 돌아 나가려고 하니 흰양말을 신은 고양이 한 마리가 더 나타났다. 잘 가라고 인사해 주러 왔나 보다. 흰 양말을 신은 네 발이 너무 귀여워 악수를 청했다. 거절하지 않고 내 옷에 흰 털을 듬뿍 묻히더니, 연신 석탑 다리에 자기 냄새를 묻혔다. 잘 있어, 또 보러 올게. 


이 날은 여러 일정으로 몹시 바쁜 하루였다. 오래전에 예매해 둔 공연을 보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Kyohei Sorita라는 일본 피아니스트인데 2년 전 쇼팽 콩쿠르에서 공동 2등을 차지한 젊은 예술가였다. 당시 콩쿠르를 실황으로 봤었는데, 이 친구의 연주가 꽤 감명 깊었고 못해도 top 6에는 들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2등을 했었다. "그런 젊은 거장의 연주를 직접 볼 수 있다니!! 밴쿠버 최고야!!" 라며 몹시 흥분해서 티켓을 예매한 것이 한참 전인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 


늘 Downtown의 Orpheum 혹은 UBC Chan Centre만 다녔기에 Vancouver Playhouse는 처음이었다. 아담한 공연장 크기 덕분에 피아노 현 소리가 더 큰 울림을 전달하며 귀에 와닿는 곳이었다. 행운 가득이라고 느꼈을 만큼 프로그램도 내가 좋아하는 작품으로 꽉 차 있었다. 보통 피아노 연주를 보면 그 사람 성격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내가 들은 것이 정확하다면 굉장히 섬세하지만 폭발해도 좋을 만큼 격정적인 내면을 갖고 있는 사람 같았다 (난 전문가가 아니지만 Kyohei Sorita가 이 글을 볼 일이 없으니 일단 마음대로 지껄여보자). 현 하나는 끊어먹어도 남을 것 같은 몰아침이었는데 피아노가 잘 버텼다. 관객 매너가 많이 아쉬웠는데 기침소리도 리드미컬하게 들리고 코를 푸는 사람도 있었지만 (처음 봤다, 계속 코 푸는 사람), 5월의 선물 같은 시간이었기에 거듭 허리를 숙여 관객에게 인사를 보내는 그에게 나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연주 중간중간 선율에 따라 같이 요동치는 감정선을 날 것 그대로 느끼면서 눈을 꼭 감은 채 따라가 보다가, 피아노에 몸을 내던지다 못해 반동으로 튕겨 나오는 연주자의 감정을 놓칠세라 귀담아 들었다. 원하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한 소절을 10시간 넘게 연습하는 경우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또 순간 누군지 모를 저 사람의 뒷모습이 그려졌다. 나와 피아노만 있는 공간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 홀로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 나가야 했을까. 4면으로 둘러싸인 연습실은 나에게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 힘든 곳이었다. 밤을 새워 손톱에서 피가 나도 내가 원하는 소리는 잘 나오지 않았고 긴장이 나를 좀 먹어 내 마음에 대한 통제를 잃기 일쑤였다. 내 짧은 경험도 그러한데 평생을 바쳐 그 모든 실수를 빠짐없이 다 거친 뒤 마침내 거장의 반열에 오른다는 것은 얼마나 고독하고 막막한 삶일까. 아니, 거장이니 천재이니 성공한 사업가니 그런 수식어는 접어 두자.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어떤 일을 꾸준히 하여 마침내 익숙한 경지에 오른다는 것은 숱한 좌절과 자괴감,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자기혐오와 같은 시간 이후에나 오는 찰나의 영광이 아닌가. 


문득 몇 주 전 수영장에서 1시간을 꼬박 쉼 없이 랩을 돌던 백발의 노인이 떠 올랐다. 주변의 몸 좋고 기골이 장대한 청년들 틈에서 느리지만 쉬지 않고 계속 본인의 운동에 집중하던 할아버지가 마침내 수면 위로 떠 올랐을 때, 나도 모르게 말을 걸 뻔했다. 수영장 다니면서 그런 사람 한 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선수들 훈련 시간에 넋 놓고 쳐다본 것이 어제 오늘 일도 아닌데, 왜 그날 그 할아버지가 유독 눈에 밟혔을까. 잘하지 못해도, 빨리 가지 못해도, 지치지 않고 자신의 갈 길을 나아가는 그 단단한 마음에서 뭔가 울림을 느낀 걸까. 여러 번 생각을 해 봐도 왜 그 장면에 마음이 울렸는지 잘 모르겠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무용해 보이는 그 숱한 것들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 가며 살아내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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