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2023
안경점과 같이 운영되는 특이한 형태의 카페인데, 라테를 시켰더니 선글라스가 따라왔다. 이 안경점에서 일하던 사람이 디자인한 선글라스가 마침내 출시되었다며 프로모션으로 나눠주고 있단다. 고마워라. 이런 소소하지만 기분 좋은 일을 마주칠 때, 삶이 몽글몽글해지는 것 같아 입꼬리가 올라간다. 딱딱하다 못해 꽉 뭉쳐있지 말고 계란찜처럼 계속 몽글몽글하면 좋겠다.
나는 조용하다 못해 잔잔한 호수처럼 지내고 있는데, 내 주변은 각자 인생의 큰 획을 긋는 묵직한 변동을 여러 가지 형태로 알려왔다.
작년 가을부터 갑자기 주변에서 아기가 줄줄이 태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선배는 쌍둥이 아들이 이어 막둥이가 태어났다고 소식을 전해 왔다. 덕분에 태어난 지 한 달 밖에 안 된 아기를 실물로 볼 수 있었다. 내 지인 중 한 사람은 올 초 No. 5를 품에 안았고, 내 베프들과 한국의 내 친한 후배 역시 순서를 앞 다퉈가며 각자의 첫 아이를 품에 안았다.
밴쿠버에서의 내 베프는 작년 10월 말 첫 아이를 출산 후 부랴부랴 원서를 넣는 기염을 토하더니 올 9월부터 같은 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한다. 내가 알기로만 세 번째 도전이었는데 마침내 결과가 있어서 그 아이의 마음에 더 이상 미련은 없겠구나 싶었다. 육아와 공부(그것도 박사 공부를)를 병행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주변을 통해 익히 봐 왔던 터라 (오지랖이지만) 걱정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내 걱정이 기우에 그칠 수도 있고, 또 어차피 본인이 선택한 길이기에 겪어야 한다면 겪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터라 그 앞에서 말은 아꼈지만, 무언가 눈 코 뜰 새 없는 삶으로 접어든 것은 확실해 보인다.
집이 가까워서 서로 추억을 함께 쌓다가 많이 친해진 또 다른 베프 커플은 며칠 전 첫 아이를 품에 안았다. 아이를 적잖이 기다려온 터라 순산 소식이 참으로 반가웠다. 이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정착의 문제가 늘 불분명한 변수라 그들도 꽤 많은 고민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세계에서는 불문율처럼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먼저 묻지 않는다. 본인이 먼저 말할 때까지 그저 기다릴 뿐. 모르긴 몰라도 첫 아이가 태어났으니 최소 1년은 더 이 도시에 있을 예정인 것 같다. 위에서 말한 내 베프네 부부도, 지금 이 부부도, 늘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고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부모가 되면서부터 이 도시에 (혹은 최소한 캐나다에) 더 머물러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아이를 키우기에는 이곳이 더 나은 선택지인가 보다.
약 1년 반 전, 결혼과 동시에 벽을 맞대고 사는 진짜 이웃이 되었던 또 다른 친구는 여름까지만 여기 머물러 있는단다. 한 동안 두문불출하더니 졸업을 할 수 있게 되었나 보다. 남편과 장거리 생활을 하는 기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2년짜리 계약이지만 8개월만 다른 도시에 머물렀다가 돌아오려 한단다. 남편의 고향이 이곳이니 최대한 이 도시에서 정착해보고 싶다고 했다. 뭐, 우리 모두가 그렇지만 밥벌이를 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 숙명이니 장담은 못 하지만, 그래도 방향성이 있으면 종래에는 원하는 대로 이뤄지긴 하더라.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예전 기숙사에서 알게 된 콜롬비아 출신 부부도 지금 같은 건물에 산다. 거기도 남편이 곧 졸업을 하게 되었다며 기쁜 소식을 전해 왔다. 코로나 때문에 계획에 차질이 생겨 뒤엎다시피 하며 여러모로 고생을 했다는 바를 들은 터라 정말 내 속이 다 후련할 정도로 기뻤다.
주변에서 졸업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을 보니 내가 이곳에 오래 머물렀구나 싶다. 내 친한 대만인 친구도 작년 12월 졸업을 하고 올 초부터 일을 시작했다. 보통은 학위를 받은 도시에서 계속 머물며 직장생활을 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암묵적으로 '졸업 = 이사'로 생각하게 된다. 이 친구는 굳이 특정 직업군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친구의 파트너도 이 도시 사람이라 여기서 직장생활을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연구소에서 알게 된 한국인 친구는 작년 여름에 졸업을 하고 약 8개월 정도 학교에서 일을 하다가 이제 Edmonton으로 가게 되었다며 소식을 알려왔다. 졸업 전까지는 졸업을 할 수 있을까 없을까에 대해 고민하지만, 졸업을 막상 하고 나면 직업을 구할 수 있을까 없을까로 엄청난 고민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숱한 거절과 좌절을 겪다 보면 자신의 하찮은 몸뚱이와 멘털이 지구 밑으로 끌어내려지는 경험을 하게 된단다(아직 겪지도 않았는데 알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이 친구도 내심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지난 7-8개월이 그렇게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도시로 정착하기 위해 각종 준비로 분주한 모습을 보면서 정말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내 중국인 친구도 곧 졸업을 앞두고 있다. 몇 년 간 친하게 지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던 터라 그간의 고생이 만만치 않았음을 잘 안다. 몸도 약하고 나처럼 예민한 친구라 ER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모든 세월을 이겨내고 마침내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점이 퍽 고무적이었다. 분야도 비슷하고, 고민사도 많이 겹쳤기에 좀 더 남의 일 같지 않게 와닿는 것 같다. 무엇보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피부에 와닿는 조언을 해준 친구라, 그녀의 졸업이 정말 감개무량하다.
기쁜 마음으로 각자의 인생에 펼쳐진 마침표와 느낌표에 다양한 축하를 보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익숙했던 이들과 보냈던 시간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와 내 짝꿍은 부모가 될 생각이 없기 때문에 부모가 된 친구들의 세계를 100%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졸업한 자들은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날아갈 것이고 남은 사람들은 졸업의 부담을 조금씩 일상에 더할 것이다. 나는 항상 어디에서든 날아가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이 곳에서는 내가 남아 있는 사람이 된 경우가 더 많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졸업을 하는 등 각자의 삶에서 굵직한 이정표를 만드는 사람들로 주변이 북적인다. 그에 비해 내 삶은 꽤 조용하다. 이렇게 조용해도 괜찮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조용하다. 나는 숨 쉬는 법을 다시 배우고 있고, 몸이 편안한 상태를 찾기 위해 의식적으로 삶을 단조롭게 혹은 흥미롭게 만들고자 노력 중이다. 내가 예전처럼 빠르게 달릴 수 없으니 조금 느리게 달려도 괜찮다는 '허락'을 받기 위해 또 여러 가지 절차를 거쳐야 할 것 같다. 마음이 바쁘지는 않은데 조금 공허하긴 하다. 단순히 친한 친구들이 졸업을 하고 이사를 가고 부모가 되어서가 아니라, 주변에서 벌어지는 굵직한 일들에 내 조용한 삶이 반사되면서 이 잔잔함이 더 부각되어 보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어차피 빨리 시작한 것도 아니고 빨리 끝낼 수 있는 단계도 아니니 나 만의 속도로 가자고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가끔은 조급증이 난다. 조급해져 봤자 나만 손해라는 것을 머리로는 잘 알기에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려본다. 수영장에서 일주일 전보다, 한 달 전 보다, 더 힘차고 빨라진 내 속도에만 집중하던 느낌을 떠올려봤다. 옆 레인에서 누가 어떻게 하든지 크게 중요치 않다. 수영장에서는 자칫 잘못하면 코로 입으로 물을 먹기 마련이다. 아무리 숙련된 수영인이라 하더라도 잠시 잠깐 리듬을 놓치면 물을 먹기 십상이다. 늘 깨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몸에 들어간 힘을 인지하는 순간 힘을 의식적으로 뺄 수 있어야 한다. 물에 내 몸을 맡기고 떠 있을 때 역설적으로 더 빠르게 나아갈 수 있다. 몸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뒤로 밀리기도 한다.
무언가 한 가지 일을 깊이 파고드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다. 일정 단계에 도달해야 보이는 것들이 있고, 그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 또 배움의 깊이를 더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정 단계가 되기 전에는 절대 느낄 수 없는 희열이 있다. 그리고 그 단계를 넘어서면 다시는 예전의 무지로 돌아가지 못한다. 아무도 나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는 무형의 자산을 평생 몸과 마음에 새길 수 있다는 것은 삶을 매우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다재다능한 삶을 꿈꿨던 적도 있지만, 소수의 천재가 아니고서야 진실로 다재다능한 사람이 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일찍이 깨달았다. 끈기가 부족한 것은 아닌가 늘 스스로에게 의구심을 가지기도 한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궁극적으로 선택하는 혹은 선택하고자 하는 것들은 모두 그 영역에서 고도의 숙련도를 요하는 일이었다. 그래, 숙련도가 중요하지 숙련되는 데에까지 도달하는 속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제 와서 올림픽에 나갈 것도 아닌데 뭐. 나의 Paula도 언젠가 그랬다. 'how fast'가 아니라 'mastery'로 초점을 바꿔보자고.
행여나 내가 겪는 일들이 나에게 너무 과하게 느껴진다면, 그 모든 것들이 내 계획을 의미없는 것으로 만들고 나를 주저 앉히는 것 같다면, 내가 가진 행운에 집중해 보기로 한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해변이 보이는 카페에 가고 싶어서 들른 곳에서 커피와 선글라스를 선물로 받았다면 꽤 괜찮은 행운 아닌가? 춥고 공허한 도시가 아니라, 총기 사고가 일주일에 한 번씩 나는 도시가 아니라, 여름이면 사람들이 미쳐서 날뛸 정도로 청아한 도시에 산다는 것도 큰 행운이다. 실제로 나도 자전거를 들고 같이 날뛰게 되는데, 이 도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 같다.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하고 같은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짝꿍과 함께 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도 엄청난 호사다. 깃털처럼 자유로운 우리는 언제든 어디든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을 갈 완전한 자유가 있다. 이 시간을 미래에서 돌이켜보면 몹시 그리울 것이다.
내일은 오늘 선물 받은 선글라스를 들고 Cypress Mt. 을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