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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굴이 Oct 29. 2023

정형외과 의사 만나기

귀하디 귀하신 몸

오른쪽 고관절에 비구순 파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올 4월 말, MRI를 찍고 나서였다. 


거의 2년 반 전부터 불편했었지만 대충 RMT나 manual therapy, IMS 따위를 받으며 대수롭잖게 여겼고, 근육을 더 키우면 통증이 사라지리라 믿으며 고관절에 무리가 될 수 있는 운동을 했었다. 운동을 좀 더 살살했다면 괜찮았을까 하는 늦은 후회는 언제나 들지만, 전직 BC 주 대표 수영 선수로 물살 좀 갈랐던 나의 physio therapist 왈, '네가 해봤자 엘리트 운동선수들처럼 했겠냐, 운동으로 파열이 더 악화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에 겸허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운동선수에 비하면 내가 했던 것은 애교지. 이럴 때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닫는다. 이곳은 캐나다. 우기가 시작되어도 허벅지에서 열을 뿜어내며 달리기에 여념인 사람을 하루 5명은 만날 수 있는 이곳. 신생아를 유모차에 태우고 러닝을 거르지 않는 엄마들을 길에서 종종 마주칠 수 있는 곳. 운동과 웰빙에 대한 관점이 한국과 많이 다른 곳. 


이곳에서도 한국인 한의사 혹은 치료사들이 진료하는 곳을 여러 군데 다녔는데, 내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건강 상의 이슈를 말하면 그들은 대부분 비슷하게 반응했다. 운동을 심하게 하지 말라는 것, 혹은 걷기 운동 정도로 만족하라는 것. 


학교 캠퍼스가 커서 내가 사는 곳에서 연구실까지 걸어간다면 편도 4-50분이 걸리는 마당에, 안타깝게도 걷기는 운동이 아니었다. 운동이란 모름지기 심장 박동수는 좀 올라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하게'라는 단어를 적용하기 민망할 정도로 내 운동 패턴은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운동을 통한 건강 증진 효과 및 기억력 향상 효과 이런 건 모르겠고, 그냥 조금이라도 움직여야 허리가 덜 아프니까 혹은 몸이라도 써야 도비같이 혹사당하는 나의 뇌가 덜그럭 거리면서라도 돌아갈 테니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한국인 의료진(?)에게 '심하게 운동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들으면 더 혼란스럽다. 캐나다 의사 혹은 치료사들 입에서는 어지간해서 나오기 힘든 말이라. 같은 증상이지만 전혀 다른 의견을 들을 때,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지 몰라서 그냥 내가 더 땡기는 쪽의 말을 취사선택했다. 생명에 지장이 있으면 캐나다 의료진들이 발 빠르게 알려주겠지,라는 근거 없는 믿음 하나로. 


그러던 나에게 운동 금지령이 떨어진 것은 올해 2월. 

새로 만난 physio therapist는 내 고관절 통증이 단순히 근육이나 표면적인 이유가 아닌, 조금 더 구조적인 문제 같다며 무려 한 달 동안 운동을 금지시켰다. 스피닝도, 러닝도, 부트캠프도, 필라테스도, 그리고 수영까지도. 전문가의 말을 듣지 않을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찾아가지도 않았겠지만, 다소 극단적인 처방은 예상치 못한 것이라 그의 말을 안 듣고 싶었다. 하지만 불편함은 올해 들어 조금씩 더 심해지고 있었고, 오래 앉아 있기 어려울 지경이 되자 일반의를 찾아갔더니 예상치도 못한 MRI 의뢰서를 써 준 상황이었다. 운동 금지령이 내려졌을 때에는 MRI를 기다리던 중이었고 (referral 넣고 3개월이 채 지나기 전에 촬영을 했으니 그 정도면 빠른 편이었다), 의사도 내게 정확히 통증의 원인을 짚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physio therapist의 금지령을 따르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문제는, 이게 약 2주 정도 넘어가니까 부작용(?)이 와서 약간의 우울감과 에너지 레벨이 급격히 다운되는 것을 느꼈다는 것. 한 달 정도 버티다가 이제는 더 못 참겠다고 나는 그냥 뭐라도 운동을 좀 해야겠다고 와장창 말하려던 찰나, physio therapist가 '이제 슬슬 운동을 해볼까'라고 할 때 정말 수능 끝난 학생의 기분을 다시 느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유일하게 허락(?)된 운동은 수영. 조건은 단순했다. 운동을 한 후 통증이 없어야 한다는 것. 당시에는 몰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MRI 촬영 후 결과지를 받고 나서야 알았다. 할 수 있는 운동에 제한을 둔 것은 매우 잘한 처방(?)이었다는 것을. 파열이 이미 있기에 몸의 하중을 하체에 많이 싣는 운동(예를 들어, 러닝, 점프를 동반한 부트캠프, 고관절에 부하가 많이 걸리는 사이클링, 스쾃 등)은 최대한 피해야 했던 것이다. 파열의 위치에 따라 다르겠지만, 관절 가동 범위를 넓게 가져가는 요가나 필라테스도 특별히 좋진 않았다. 심리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특정 동작은 통증을 동반했기에. 


MRI를 의뢰했던 family doctor는 '비구순 파열이 뭔지 나도 모르겠는데' 라며 솔직함을 과시하더니 자기 선에서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며 정형외과 의사, 더 정확히는 hip surgeon에게 소견서를 넣어주겠다고 했다. 그게 올해 5월 초. 그리고 이름 모를 그 hip surgeon의 사무실에서 referral 잘 받았다고 연락 온 것이 올해 8월 중순. 어차피 내 상태가 위중하진 않으니 한 6개월 기다릴 생각하고 있었는데, 8월 중순에 날아온 이메일은 '6개월에서 12개월까지 기다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임'이라는 담백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흥. 그럼 그렇지.  


9월에 한국을 가야 했기에 이왕 가는 것, 의료강국 대한민국에서 고관절 의사를 만날 요량으로 미리 예약을 잡고 비행기를 탔다. 나름 고관절 비구순 파열로 유명한 의사였고, 이런저런 정보를 대중에게 알리는 데에 적극적인 의사였기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병원 예약을 마쳤다. 한국에서의 일정이 꽤 빠듯했지만, 그 빠듯한 일정을 바꾸지 않아도 될 정도로 병원은 고객 친화적이었다. 오후 6시 늦게는 7시까지 열려 있는 병원이 태반이었고, 바쁜 직장인을 위해 토요일도 여는 병원이 적지 않았다. 예약 없이 당당하게 문을 벌컥 열어젖혀도 환영받는 느낌. 감개무량했다. 분명 내가 한국에서 30년 가까이 누리던 것들인데, 캐나다에 쪼꼼 살았다고 잊고 있었다. 의료강국 대한민국.


내가 방문한 병원은 대학병원급이 아닌데도 매우 컸다. 공장 생산 라인에 서 있는 제품이 포장되기를 기다리는 것 마냥, 진료실 대기자 화면에 내 이름이 뜨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내 이름이 뜨기 전, 간호사는 x-ray와 EOS를 찍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지 뭐. 바글바글한 할머니, 할아버지들 가운데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기도 뭣하고, 고작 한 층 더 올라가는데 기계의 힘을 빌자니 민망하여 비상계단을 열었다. 오가는 발걸음이 없어서일까, 계단 바닥과 손잡이까지 모든 것이 반짝반짝 새것이었다. 위 층의 영상 의학과에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바글바글하고 청장년도 양념처럼 섞여 있었다. 과장 없이 대기 8분, 영상 촬영 2분, 총 10분 만에 모든 일을 마치고 다시 진료실 앞에서 대기했다. 다들 매우 바빠 보였다. 병원이라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저렇게 바삐 말하고 바삐 쏘 다니다가 마스크 속 산소가 부족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포장될 제품이 다음 생산라인에 떨어지는 것 마냥, 진료실 대기자 화면에 내 이름이 뜨자 나는 진료실로 흡입되듯 입장하였다. 마스크 때문에 얼굴의 절반 밖에 볼 수 없었지만 푸근한 인상의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언제부터 아팠는지, 그것만을 물었다. 캐나다였더라면 각오(?)해야 할, 30분 정도 소요되는 문진 따위는 없었다. 뭐, 이미 x-ray 상으로 보니 모든 것이 명확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30분의 문진을 기대한 것도 아니다. 단 5분이라도 좋았다. 캐나다에서 의사를 오래 기다리는 입장이다 보니 답답한 마음도 없지 않았고, 내 상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수술이 필요한지, 비수술적 치료요법은 있는지 등등. 


의사 선생님은 본인과 밴쿠버의 인연을 잠깐 밝히고, 그 전날 본인이 수술하신 2명의 환자가 나와 케이스가 똑같다며 그들의 x-ray 사진을 모니터에 띄웠다. 예상치 못한 일이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내가 아무리 전문의가 아니라 뼈 사진을 보고 누구의 뼈인지 알아볼 길이 없다 하더라도,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람의 하반신 뼈 사진을 보고 있자니 남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 것 같아 조금 불편했다. 그렇다고 그 앞에서 '아니, 선생님, 이것은 의료법 위반에 해당되는 행위가 아닐는지요' 따위의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선생님은 2명의 환자가 나와 비슷한 뼈 구조(?)를 갖고 있다며 별 다른 말 없이 CT와 MRA를 찍어보면 더 정확히 나온다고 했다. 메시지가 너무도 명확했다. CT, MRA를 찍기 전에 나는 이미 수술대에 오를 환자였던 것이다. 전체 진료시간이 5분은 되었던가. 그중 1분은 밴쿠버 이야기를 나눴고, 3분은 다른 환자의 x-ray를 보았으며, 나머지 1분 미만의 시간 동안은 CT/MRA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설명이라 해봐야 돈 이야기가 전부였다. 실비 보험이 있으면 입원해서 찍으면 되고 없으면 생돈을 내면 된다는 말이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아직도 기억난다. 


안타깝지만 진실은 늘 아픈 법. 

나는 곧 밴쿠버를 돌아가야 하니 수술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이번 한국 방문에서는 하기 힘들 것 같다는 사실을 조심스레 전달했다. 마스크 위로 두 눈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워토우를 빼앗긴 푸바오 같았다. 그를 실망시키고 싶진 않았지만, 짧은 검색으로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수술 후 재활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요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짧은 한국 방문에서 고려해볼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는 내가 수술에 적합한 환자인지, 수술이 나에게 필요한지, 아니, 그 이전에 내 상태는 어떤지, 수술의 부작용과 기대효과는 무엇인지, 수술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치료요법이 있을지 등등을 알고 싶었다.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나의 희망이 헛된 것이었음을 깨닫는 데에는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수술은 할 수 없지만, 정확한 진단을 내리는 것이 의사의 소명이니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했다. 단 CT/MRA를 찍어야 정확한 진단이 나온다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전체 85만 원가량인데 실비가 있으면 싸게 찍을 수 있다고. 


다시 보자는 그의 말을 뒤로한 채 진료실을 나왔다. 

담당 간호사는 나의 CT/MRA 스케줄을 잡느라 분주했다. 당일 오후에만 담당 의사가 진료를 보기에 담당 의사가 있을 때 영상 촬영을 하고 진단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다음 일정이 있는데, 그 일정을 마치고 다시 오겠다고 했다. 몇 번의 조정 끝에 오후 3시로 영상 촬영을 잡았다. 


뭔가 내가 이미 출시용 박스에 담긴 과자 봉지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든 것이 너무 휘뚜루마뚜루였다. 실비가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돈이 문제는 아니었는데, 이렇게 처리되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실비 보험 담당 설계사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런저런 사진을 찍어야 할 수도 있는데, 보장 범위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입원할 수 있으면 총비용의 80%가 지급될 것이라는 말만 들었다. 최근 실비 보험 인상률이 높아서 여기저기서 불평이 터져 나온다더니, 쓸데없이 실비 보험료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이 병원을 가는 것을 별로 탐탁지 않아 했던 엄마가 휴대폰 너머로 물었다. "어차피 수술이 필요한 거라면 밴쿠버에서 수술을 해야 할 텐데, 여기서 CT/MRA를 찍는 게 소용이 있을까?" 


필요하다면 85만 원이 아니라 850만 원이 들어도 해야겠지. 하지만 정말 필요한 지에 대한 설명을, 그 설명을 가장 잘해줄 것으로 믿었던 전문가에게 듣지 못했다. 병원을 걸어 나오면서 주위를 둘러봤더니 비슷한 류의 병원이 여기저기 보인다. 과장 조금 보태서, 한 건물 건너 다음 건물에 병원이 있다. 의원 수준의 병원도 있지만, 상급 병원도 적잖이 보였다. 모두가 먹고살아야 할 테지.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환자를 유치하기 위해 새로운 기계를 계속 들여와야 할 것이다. 기계를 쓰기 위해 수술을 해야 하는 경우도 없진 않으리라 생각한다. 수술을 해야 수당이 올라갈 테니, 크게 필요치 않는데 수술을 권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없진 않으리라 본다. 


내가 정말로 수술이 필요한 케이스라면 밴쿠버의 hip surgeon이 똑같은 소리를 하겠지. 어차피 나는 지금 밴쿠버에 생활기반이 다 있으니, 거기서 해결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정말 괜찮으시겠냐며, 오늘이 아니면 영상 촬영 날짜를 잡는 것이 어렵다며 걱정 반, 협박(?) 반으로 묻는 간호사에게 정말 괜찮으니 CT/MRA 예약을 제발 취소해 주십사 거듭 부탁드렸다. 




밴쿠버로 돌아오기 이틀 전, 낯선 이메일이 하나 왔다. 

Hip surgeon 클리닉이었다. 모월 모시로 예약이 잡혔으니 늦거나 노쇼 하면 벌금을 물릴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드디어 진료가 잡혔다는 반가운 소식이 왔다. 다행히 내가 밴쿠버로 돌아가고 일주일 정도 뒤의 일이라 예약을 미루지 않아도 되었다. 구글에서 의사 리뷰 검색도 해보고, 리뷰가 꽤 좋은 것을 보고 약간 안심(?)도 했다가, 지난 4월 MRI 촬영 이후 증상 변화도 정리해 보면서 진료날을 기다렸다.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멀리멀리 찾아간 그의 진료실은 써리의 한 메디컬 타운에 위치해 있었다. 한국 병원의 바글바글했던 진료실 대기 풍경과 사뭇 다르게 이곳은 마치 변호사 사무실 마냥 receptionist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메디컬 타운의 빌딩이 아니었다면 내가 잘못 찾아간 줄 알았을 테다. 


또 다른 x-ray를 찍고 진료실에서 대기 중인데, 옆방에서 의사가 내 사진을 보면서 수습(?) 의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가 웅얼웅얼 들렸다. 곧이어 수습(?) 의사가 내 병력을 들으러 왔다. 몇 가지 테스트를 해보더니 진짜(?) 의사를 불러주겠다며 다시 나갔다. 옆 방에서 다시 웅얼웅얼 소리가 들리다가 얼마 후 그토록 기다리던 hip surgeon이 모습을 드러냈다. 꽤 세련된 옷차림으로 들어오길래 나는 방을 잘못 찾은 다른 환자인 줄 알았다. 의사는 통성명 이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수술을 원하냐고. 


언제 내가 수술을 원하는 환자가 되었더라, 잠시 생각을 더듬다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전문의인 너의 의견이 듣고 싶다고. 내가 수술이 필요한 케이스냐고. 변호사 사무실 같았던 클리닉 전체의 모습이 의사의 취향을 반영한 것인지, 깔끔한 캐주얼 슈트 차림의 의사는 그 이후 한동안 변호사처럼 달변을 쏟아냈다. 10점 만점에 현재의 통증이 얼마인지, 언제부터 아팠는지, 뭐 할 때 아픈지 등을 묻더니, 솔직한 의견을 알려주겠다며, 수술이 '좋은 결과'를 100%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한번 째면, 다시 째기 직전의 상태로는 죽었다 깨도 돌아갈 수 없다며. 내가 수술을 원하면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수술이 만병통치약이라는 "근거"가 자기에게는 없다고 했다. 그의 솔직함에 감화되어 나도 터놓았다. 한국에서 만난 의사는 이미 나를 수술대에 올릴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환자로서 내가 조금 혼란스럽다고. 의사보다 변호사가 더 어울릴 것 같은 surgeon은 한국 의사의 말이 맞을 수도 있는데, 아직은 수술의 실이 득 보다 더 클 수 있음을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게다가 너무 젊은 나이에 수술을 했을 때, 노화에 따른 변화에 대응하기 어려울 수 있음을 간과하지 말라고 했다. 또 하나, 자가면역질환이라는 변수가 어떻게 작용할지 아무도 모른다고도 했다. 결국 그의 결론은 신중, 신중, 또 신중이었다. 그리고 비수술적 요법을 시도해서 일상에 불편함이 없을 수준을 유지한다면 그것이 최선이라고 했다. 굉장히 광범위한 "재활을 위한 필라테스 및 근력운동" 동작이 빼곡히 적힌 템플릿을 출력해 주며, 잘 가라고 했다.  


신중함은 마음에 들지만, 그놈의 재활을 위한 20가지도 넘는 동작을 단 하나도 혼자서 제대로 할 자신이 없어서 (잘못 따라 하다가 더 안 좋은 결과를 낳을까 봐), physio therapist를 찾아갔다. 하도 주기적으로 봤더니 이젠 친구 같다. 태평양을 넘나드는 병원 방문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 광범위한 운동을 내가 집에서 혼자 해도 되겠냐 물었다. 한번 훑어보더니 피식 웃고, '굉장히 아름답고 좋은 이야긴데 지금 너한테 적합한 것 같진 않다'며 출력물을 한쪽에 밀어놓더라. 어떤 동작을 함에 있어 적재적소에 맞는 근육을 쓸 줄 알아야 하는데, 지금 특별히 오지랖 부리는 근육이 있으니 걔를 재교육시켜야 한단다. 그 후에 약해빠진 놈을 강화시켜 줘야지, 그렇지 않으면 오지랖 부리는 애가 계속 오지랖 부리고 소심한 애는 계속 위축되어서 내 몸만 더 불편해진단다. 그리고 당분간은 특별히 다른 운동 욕심내지 말고 수영이나 하면서 "stubborn stubborn tight"한 근육을 좀 풀어보고 다시 이야기하잖다. 


이로써 나는 수술의 늪(?)에서 벗어났다. 만약 수술을 해야 하면 재활이 얼마나 힘들지도 걱정이었고, 그에 맞춰서 학교 일정을 어떻게 조정해야 할지 조금은 막막했었는데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수술이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당장 절체절명으로 필요하지 않는데 수술대에 오르는 일은 막고 싶었다. 장기적으로는 수술이 답일지 몰라도 지금은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의사의 말에 더 신뢰가 갔다. 그의 말대로, 째는 것은 쉽지만 다시 째기 이전의 상태로는 무슨 짓을 해도 돌아갈 수 없으니까. 한국의 신속하고, 싸고, 의사 쇼핑이 가능할 정도로 의사가 많은 의료 시스템도 많은 장점이 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요즘은 어떤 조치가 필요하다 혹은 필요 없다고 하는 캐나다 의사의 말에 더 무게를 두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전문의 하나 만나는 데에도 느려 터져서 가끔 내 속도 터지지만, 과잉진료를 할 이유가 없으니까 불필요하게 수술 호구될 가능성은 좀 더 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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