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타이베이
3개월이란 참 애매한 시간이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짐을 풀자마자 짐을 다시 싸는 느낌.
그렇지만 통상 3개월 동안 할 수 있는 경험치고는 굉장히 넓은 스펙트럼을 겪고 왔다고 자부한다.
2월부터 5월까지 대만의 겨울 (밴쿠버보다 추운 실내)과 초여름. 지진과 개미, 열대 바퀴벌레, 그리고 각종 날아다니는 것들. 분명 여행으로는 보지 못했을 것들이 단기거주자의 눈에 쏙쏙 들어왔던 3개월이었다.
4.3 대지진 이후 끊임없는 여진과 떡대 있는 바선생, 그리고 당최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책 없이 늦어지는 행정처리로 시달릴 때는 '이 눔의 나라, 다신 오나 보자'라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래도 3개월 동안 먹고 자고 한 곳이라 그런지, 밴쿠버로 돌아온 이후 들려오는 각종 대만 소식에 예전보다 더 귀를 기울일 정도의 애정은 생긴 것 같다. 뉴스도 찾아보고, 대만식 우육면도 찾아 먹으러 갔으니. 아, 어쩌면 대만에서 3개월 지냈던 나보다 1주일 여행한 짝꿍의 대만 애정도가 더 높아서 끌려다닌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차에 별로 시달리지 않는 나와 달리 짝꿍은 늘 시차의 지배를 받는 편인데, 밴쿠버로 돌아온 이후에도 본인이 대만에 머물렀던 기간인 1주일만큼 꼬박 밤잠을 설치며 새벽 1-2시마다 거실로 뛰쳐나가곤 했다. 이상허다... 쟤는 분명 1주일 있었고 나는 3개월 있었는뎁...
짝꿍은 대만에 대한 애정을 부지런히 증명하였다. 그는 밴쿠버에서 대만인이 운영하는 우육면 집을 알아냈다는 내 말에 그날 당장 우육면과 만두, 볶음밥을 먹겠다며 그곳으로 달려갔고, 대만식료품을 파는 곳을 알아내어 굳이 구경을 가고, '샹창'이라는 대만식 소시지를 취급하는 곳을 알아내어 배달을 시키고 (무슨 초등학교 자선행사 바자회의 일환인 것 같았는데), 대만의 총통 취임을 앞두고 진보정당인 민진당과 보수정당인 국민당이 입법원(한국의 국회)에서 몸통 박치기를 하는 뉴스를 보여주었다. 짝꿍이 대만에 왔었던 마지막 1주일도 내 일이 많이 몰렸던 터라, 여행다운 여행의 느낌은 마지막 이틀밖에 내지 못했다. 그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짝꿍의 음식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1주일 동안 딘타이펑을 두 번이나 가서 만두를 종류별로 작살내고 (내가 말리지 않았다면 하루에 한 번씩 갔을지도), 평소 밴쿠버에서도 환장하는 야시장을 현지에서 참새 방앗간 가듯이 드나들어 매일같이 고구마볼을 사 먹고 (작게 만든 찹쌀도넛 같은 스낵인데 은근 중독성 있다), 망고 맛있다며 매일같이 망고망고 먹어대고, 만한대찬(우육면 컵라면)을 밴쿠버로 싸 갈 수 없다면 매일 먹겠다며 이틀에 한 번 먹어댔다 (소고기 분말과 건더기가 있어 밴쿠버 반입금지). 둘 다 떨어져 있을 동안 각자의 삶으로 약간은 피골이 상접했었는데, 대만에서 조우한 지 만 48시간이 되지 않아 두 사람 모두 얼굴 살이 포동포동하니 올라왔다. 급히 살을 찌워야 하는 분들께 망고와 우육면 추천드립니다.
내가 일찌감치 숙소를 중심지에 있는 호텔로 옮겨둔 덕분에 짝꿍은 대만의 좋은 면만 보고 떠날 수 있었다 (팔자가 좋군). 귀에 피가 나도록 듣던 바선생은 물론이고 오래된 기숙사 건물에서 있을 수 있는 모든 일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오래된 기숙사 건물에서 겪을 수 있는 일이란, 사실 그렇게 대단하진 않다. 방음이 되지 않아 아침마다 동네 사원에서 꽹과리 치는 소리가 들리거나, 이웃 아줌마 아저씨들이 새벽 4시부터 가게 문을 열면서 건네는 아침인사를 듣거나, 비둘기인지 참새인지가 에어컨을 뚫고 방으로 들어올 것만 같은 자연의 소리를 듣는 것 정도이다. 이 기숙사는 건물 가운데에 잔디로 허허벌판이 있는, 마치 도넛모양 같은 특이한 건물구조를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건물 내부에서는 복도에서 방문으로 갖가지 새가 날아와서 헤딩을 하고, 건물 외부에서는 비둘기와 참새가 에어컨을 뚫고 들어오려는 일이 잦다. 갖가지 종류의 벌레는 이미 디폴트인지라 매일 새로운 종류의 벌레를 방 안에서 만날 수 있다. 오래된 매트리스가 늘 그렇듯이 아침엔 어딘가 얻어맞은 것 같은 피곤함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도 추가. 냉장고는 30분에 한 번씩 굉음을 일으키며 자신의 존재를 알려오는데, 그 소리에 놀라 가위에 눌리길 서너 차례. 아예 귀마개를 끼고 헤드램프를 켜놓고 잤다.
아참, 건물이 오래되어서 인터넷 연결 상태는 좋지 않다. 특히 사용자가 몰리는 저녁시간에는 그냥 모바일 데이터로 살아야 하는데, 그 조차 산간지대라 그런지 연결이 원활하지 않다. 유튜브 프리미엄도 소용없다. 인터넷이 되어야 광고를 넘기든 보든 하지. 자정이 지나면 거짓말처럼 인터넷이 되기 시작한다. 밤새서 일하라는 건가보다. 아, 그리고 온수도 잘 안 나온다. 2월 어느 이른 아침, 일찍 나갈 일이 있어 샤워를 하려는데 냉장고에 넣어둔 물과 같은 온도의 물이 15분째 나오는 것 아닌가. 너무나도 성질이 나서 '누가 이기나 보자'는 심정으로 샤워기 물을 아예 틀어놨었다. 체온보다 조금 낮은 온도의 물이 나오는 데에 30분이 걸리자 나는 몹시 부아가 치밀었는데, 40분째 물을 틀어두니 그제야 쓸 만한 온수가 나와서 욕을 더 바가지로 했던 기억이 났다. 그 이후론 아침에 수영장을 가거나 (수영장도 상황은 비슷했다 젠장), 사람들이 활동을 하는 시간대가 되면 샤워를 했다. 다행히 날이 금방 더워져서 온수가 그렇게 절실해지진 않았지만 (그리고 날이 더워지니 온수가 아니라 뜨거운 물이 쓸데없이 잘 나왔다), 2월에는 훈련 후 냉수로 5분 안에 샤워를 마쳐야 했던 어느 군인의 감정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무튼, 오래된 기숙사에서 단 하룻밤도 체험하지 않게 된 짝꿍의 팔자는 얼마나 좋은 것인가. 옛말에 팔자 좋은 놈 이길 재간 없다더니... 밴쿠버로 출국하기 이틀 전, 기숙사 열쇠를 반납하러 학교를 가야 했을 때가 짝꿍과 오래된 기숙사의 첫 만남이었다. 이 기숙사에 대해 내가 늘어놓은 불평불만/험담/저주를 지난 3개월 동안 들은 짝꿍은 '대체 얼마나 상태가 안 좋은지 보자'는 표정으로 건물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는 위에서 언급한, '오래된 기숙사에서 생길 수 있는 일' 중 단 하나도 겪지 않았기에 '이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닌가'란 표정을 짓다가 나에게 혼이 났다. 떽.
심지어 짝꿍이 타이베이를 방문했던 5월 초는 봄 우기가 시작되던 시점이라 날이 그렇게 습하지도 덥지도 않았다. 우라이(Wulai)로 온천여행을 갔던 주말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숨 막히는 날씨가 아니었던지라, 짝꿍의 대만에 대한 첫인상은 긍정적이었고 "다음에 대만에 또 오게 되면..."을 계속 시전 하였다. 나도 뭐, 다시 안 간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바선생의 트라우마를 극복한 것은 아니라 그저 건성으로 끄덕끄덕하고 넘겼다. 다만 짝꿍은 밴쿠버로 돌아와서도 종종 "아휴, 요즘 대만은 정말 덥겠다"를 가끔 중얼거리는데, 그럴 때면 집에서 나선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땀 뻘뻘 흘리던 나의 찐 경험이 생각나서 "네가 뭘 알아!!" 하고 핀잔을 준다.
밴쿠버는 참 신기한 곳이다. 사는 동안은 '그렇게까지 좋은지 잘 모르겠어'라는 복에 겨운 소리를 자주 하지만, 다른 나라/도시를 다녀오면 잘 보이지 않았던 밴쿠버의 장점이 보인다. 마트를 가면서 파랗게 비친 밴쿠버의 하늘과 건조하면서도 청명한 기후에 얼마나 감탄사를 보냈는지 모른다. 곳곳에 잔디와 나무가 무성한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도, 꼭 어딜 다녀오고 나서 느낀다. 도로와 인도가 분명하게 나뉘어 있고,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마음의 평화를 주는가. 길바닥에 들러붙은 흔적도 잘 없거니와 그 흔적이 과거에 어떤 생명체였을 가능성이 낮다는 것도 새삼 아름답다. 밴쿠버에 도착한 다음날, 30분에 한 번씩 '아, 밴쿠버 좋아'를 내뱉으며 다운타운에서 Five Guys 버거로 첫 끼니를 시작했다. 타이베이는 식도락으로 유명하지만, 달디단 땅콩버터에 버무려진 소고기패티가 들어간 버거는 내게 너무 충격적이었다. 버거다운 버거를 먹고 싶어서 버거킹에서 주문을 했지만 육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말라서 조각조각 바스러지는 소고기패티와 내 새끼손가락만 한 치킨너겟에 대단히 분노한 나는, 밴쿠버에 가자마자 버거를 먹겠다고 짝꿍에게 노래를 불러댔었다. Five Guys에서 육즙이 흘러넘치다 못해 빵을 흥건히 적시는 것을 입에 구겨 넣으며 "이게 버거지"라고 중얼거렸다.
땅콩버터 발린 버거는 그립지 않았으나, 마트 진열대에서 망고랍시고 나온 애들이 전부 말라비틀어진 육포같이 보여서 적잖이 실망했다. 아, 내가 먹던 대만 망고는 이제 사치품이 되었구나. 짝꿍은 우육면 컵라면인 만한대찬을 찾기 위해 온/오프라인을 쥐 잡듯 뒤졌지만, 대만에서는 개당 50위안 (CAD 2)하던 것이 아마존에서 개당 CAD 17인 것을 보고 전의를 상실했다. 사실 그는 전의를 상실하지 않았고 오늘이라도 당장 배송시킬 기세이지만 내가 말리고 있다... 그 돈이면 차라리 '왕 씨 아저씨네' 우육면을 먹으러 가는 게 낫다고.
대만에서의 3개월은 내가 comfort zone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한국을 떠나 밴쿠버에 온 지도 어언 7년째라 이곳에서의 삶이 편안하다고 느끼던 중이었다. 완벽하게 캐나다 사회에 흡수될 순 없겠지만 어느 정도 내가 지내는 이 작은 동굴에서는 더 이상 위협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원어민처럼 영어를 자유로이 구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부터 또라이를 마주친다면 맞다이 뜰 정도의 의사소통은 된다는 느낌이 들자, 내가 괜찮게 버티고 있다는 안심 내지는 착각도 들었다. 게다가 나와 내 부모님 각각이 겪어야 했던 건강 문제와 코로나의 콜라보로 인해, 도전과 모험보다는 현상유지가 더 생존에 유리하다는 가치관 쪽으로 정신이 점점 기울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comfort zone에 머무르는 내 선택을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타이베이의 산자락에 던져졌으니 (물론 내가 선택해서 갔지만), 내 뇌는 이를 적잖은 위협 내지는 해결해야 할 문제로 인식했을 것이다. 당장 실생활에 사용하는 중국어를 익히는 것, 이들의 문화를 어느 정도는 눈치껏 빠르게 흡수하는 일, 인터뷰를 위해 사람을 알아가고 네트워킹에 뛰어들어야 하는 일 등등. 아주 활발하게 매년 지구를 한 바퀴씩 돌아다니며 비행기 안에서 자신의 family doctor가 될만한 의사를 섭외해 오는 지도교수와 달리, 나는 그 정도로 적극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성격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학생이라는 신분에 오래 매여있다 보니 '아직 뭘 잘 몰라서'라는 자체검열을 늘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무슨 자리에 나서는 일도 부담스럽고, 어쩌다 나서야 할 일이 생기면 열심히 밤낮으로 준비해서 겨우 해치우는 수준. 네트워킹도 마찬가지였다. 지도교수가 누군가를 소개해줘도 상대가 나 같은 일개 대학원생에게 관심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나 스스로 '아직 나설 때가 아니다'라는 생각에 묶여 있으니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이 부족했을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조언을 구한다면 "언제 어디서든 적극적으로 임해라" 같은 허울 좋은 소리로 답변하겠지만, 정작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런데, 어쩌면 소극적으로 혹은 "겸손"하게 있어도 일이 그럭저럭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머물러 있을 수 있었던 것 아닐까. 대만에서는 나를 도와줄 지도교수도 없고 (물론 그는 늘 세계를 돌아다니기 때문에 잘 없다), 영어나 한국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도 없다. 유창하지 않은 중국어로 더듬더듬 말해야 할 때, 혹은 그 조차도 여의치 않아서 구글 번역기를 써야 할 때, '아직 잘 몰라서요'라는 겸손으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식당에서 주문조차 못하는 상황이 되다 보니 염치 불고하고 적극적으로 묻고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모르면 물어야 했고 상대가 내 발음을 못 알아들으면 여러 번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라도 내 발음을 고쳐달라고 해야 했다.
인터뷰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처음부터 맨땅에 헤딩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마침 대만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던 지도교수가 나서준 덕분에 어느 높으신 분과 연이 닿아 첫 인터뷰를 했다. 하지만 지도교수는 곧 유럽으로 떠났고, 다른 교수가 소개해준 사람들은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땐 몰랐다... 대만에서는 이메일보다 Line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더 빠르다는 것을... 이메일을 보내면 평균 답신 기간이 1주일이었다. 게다가 이메일 주소를 2-3개씩 사용하면서 잘 확인을 안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연고가 있으면 일이 빠르게 성사되겠지만, 있지도 않은 연고를 기다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3개월이란 참으로 짧아서 (한국으로 2번이나 인터뷰를 갔으니 실질적으로 대만에 머문 기간은 2개월), 대만의 문화를 좀 즐기면서 연락을 기다리고, 그러다가 인터뷰가 성사되면 신나게 하러 가고 - 그런 식의 여유는 그야말로 사치였다.
거의 마구잡이로 연락을 취했던 것 같다. 연구소, 기자, 학자, 팟캐스트 게스트 등등. 정부 관료는 그냥 부딪혀봤자 답이 안 나오니까 처음 뵈었던 높으신 분께 염치 불고하고 도와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이메일, 링크드인, 가리지 않고 메시지를 보냈다. 물론 답이 오지 않는 콜드 이메일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현지조사에서 인터뷰라는 것은 결국 '당신의 지식과 경험을 나에게 무상으로 나눠주세요'라는 요청과 같아서 거절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또한, 보안상의 이유 혹은 소속된 단체의 까다로운 규칙 등등의 이유로 인터뷰를 거절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어찌 되었건, 인터뷰 거절은 속상할 필요가 하등 없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며, 누군가가 친절하게 인터뷰에 응한다면 거기서 시작하면 되는 것이었다. 다음 사람을 소개받고, 또 다음 사람을 소개받는 snowballing 형식으로 정신없이 진행하고 났더니, 밴쿠버에 돌아올 즈음에는 20건에 가까운 인터뷰를 마친 상태였다.
대만에 체류하는 동안 온/오프라인으로 한국케이스에 대한 인터뷰도 진행했다.
한국에서의 사정도 연고라고는 1도 없는 대만과 다르지 않다. 내 국적이 한국이라고 해서 이름도 성도 모르던 사람에게 인터뷰를 해 줄 이유는 만무하다. 2년 전 처음 인터뷰를 시작할 때는 아무것도 모른 채 정부 관료부터 시작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인터뷰를 해줄 의향이 있는 사람인지를 대충 파악하고 연락을 할 눈치는 생겼다. 주로 실명을 내걸고 일하는 기자, 연구소 및 대학교에 적을 둔 학자들이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주셨다. 세상이 넓은 것 같아도, 지엽적이고 전문적인 분야로 들어가면 갑자기 세상이 좁아져서 서로가 서로를 아는 단계가 되나 보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인터뷰를 요청한다고 할 때는 대부분 인터뷰가 성사되었던 것을 보아, 내가 아직은 알지 못하는 어떤 역학이 작용하는 것이 분명했다.
대만의 한인 커뮤니티에 올라와 있는 '영한/한영 통역사'를 구한다는 글을 보고 무작정 지원한 적도 있었다. 한국의 어떤 NGO에서 내가 너무 가고 싶었던 대만의 단체를 방문하는 일정이었는데, 도저히 내가 개인 연구자로 연락해서는 그 단체의 문을 뚫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전문 통역사가 아니지 않은가... 밴쿠버에서였다면, '에이, 내가 전문 통역사도 아니고 민폐만 될 거야'라면서 잊었을 텐데, 대만에서의 나는 그렇게 배부른 소리를 할 여유가 없었다. 정해진 시간 내에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가야 했다. 딱 1시간 고민하고 이메일을 보냈다. 그 행사에 꼭 참석하고 싶은데 일반인에게 공개된 행사가 아닌 것 같으니, 통역 서비스를 무보수로 제공하겠다고. 전문 통역사로서의 훈련을 받은 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캐나다에서 공부하고 있으니 통역은 무리 없을 거라고.
원래 일은 아귀가 잘 맞아야 한다고 했던가.
너무 감사하게도 한국 NGO에서는 내 언어 능력보다 내 연구분야를 더 마음에 들어 했다. 내용인즉슨, 전문적이고 지엽적인 분야라 전문 통역사도 동시통역이 어려울 수 있는 분야인데, 이 쪽을 아는 사람이 통역을 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판단했단다. 무보수인 대신 내가 가고 싶었던 단체뿐 아니라 1박 2일간의 일정을 동행하면서 대만에서 필요한 네트워킹을 해도 좋다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이게 웬 떡이냐. 얼른 물어야지. 암냠냠.
내가 대만에서 깨닫고 돌아온 것은 결국 사람의 힘이었다.
뭐 어디 대기업 광고 카피처럼 '사람이 전부다'라는 거창한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중국어도 못하고 대만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내가, 20건에 달하는 인터뷰를 2개월 내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행운과 그 행운에 기꺼이 동참해 준 사람들 덕분이었음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적지 않은 거절을 당했지만, 이를 상쇄하고도 남을 엄청난 빚을 각각의 사람들에게 지고 왔다.
늘 도움을 청했을 때 기꺼이 다른 사람을 소개해주셨던 모 대학 A 교수님. 살다 보니 사람을 소개해 준다는 일이 생각만큼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연결을 기꺼이 도와준 분들께 진 빚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밴쿠버에서 알고 지내던 대만 외교관이 도와준 덕분에 막판에 중요한 인터뷰가 2건이나 잡혔다. 어느 사회나 높으신 분의 도움이 있어야 일이 수월해지는 것은 매 한 가지 일터. 그들에게 나는 그야말로 nobody였을 텐데, 그 높으신 분의 전화나 이메일 한 통으로 다음 인터뷰가 성사되었을 때의 감사함이란. 그들이 나에게 무슨 유무형의 보상을 바라고 그리 했겠는가. 대만의 국제적 지위를 고려했을 때 '최대한 아군을 많이 만들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나타난 것이다'라는 해석도 있지만, 나는 그저, 인간에게 조금 더 애정을 가진 누군가와 운 좋게도 연이 닿은 것, 정도로 해석하련다. 아군도 어느 정도 힘이 있는 애랑 편 먹어야 생기는 것이지, 어느 곳에서나 일개 대학원생은 그저 '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을까.
그 아무것도 아닌 학생에게 주말의 귀중한 3시간을 할애해 준 모 대학 B 교수님. 정부에서 일하고 있기에 숨 쉴 틈도 없이 바쁘다고 들었는데, 놀랍게도 인터뷰에 응해주셨다. 한 시간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는데, 무려 3시간을, 그것도 장소까지 옮겨가며 본인의 경험을 나눠주셨다. 심지어 그날은 다른 호텔로 이동하는 날이라 짐가방을 3개나 끌고 다녔었는데, 첫 인터뷰 장소였던 카페가 일찍 문을 닫는 바람에 옆 카페로 이동을 해야 했다. 처음 만난 인터뷰이에게 짐가방까지 끌게 하고 음료까지 얄짤없이 다 얻어먹은 나는, 약 3시간에 걸친 인터뷰 끝에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다가 끝없이 허리를 굽히는 것으로 갈음하고 말았다. 대만 인터뷰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해 주신 B 교수님, 이 글을 보실 일은 절대 없으시겠지만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하나 더. 조금 더 proactive 하게 행동해도 괜찮다는 것.
'아직 잘 몰라서', '아직은 제가 학생이라'... 이런 마인드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너무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는 없었다. 잘 모르니 현지조사를 하러 갔고, 잘 모르니 나보다 훨씬 더 구력이 높은 학자들을 만나러 간 것이다. 어디까지 알고 어디까지 모른다는 것만 명확히 인식하고 있으면 될 일이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대충 얼버무리지 않되 아는 것을 제대로 전달할 용기만 있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