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GQ 인터뷰 원본을 다시 꺼내어 보다.
몇 해 전 GQ 에서 요청하여 적어 보냈던 '유행' 에 대한 생각.
언젠가 지면상에 실린 편집본이 아니라 원본을 정리해서 올리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3년이 걸릴줄은 몰랐다.
그때의 심사가 단단히 꼬여 있었던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군데군데 묻어나는 저 시니컬함 마저도 유행의 산물이 아니었을까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올리기 위해서 다시 읽어보니, 유효한 부분도 있지만 나의 생각이 바뀐 부분, 또한 다소 편협했던 바도 있는것 같다. 그래야 '유행' 아니려나, 그런 의미에서 수정 없이 매체에 전송했던 그대로 업로드 해본다.
1. 도대체 유행이란 무엇일까요?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모르는 열병처럼 왔다가 가는 것, 종식되었다고 생각할때쯤 새로운 변종을 가지고 나타나기도 하는것도 비슷하다.
2. 어떤 사물이나 사람, 경향과 풍조가 그 시대의 유행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무엇일까요?
미디어가 다른 모든 조건에 앞선다고 생각한다.
다만 미디어의 역할이 다소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전 시대에는 미디어가 유행 그 자체라고 얘기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근래엔 더욱 넓어진 네트워크를 통해 기저에 축적된 문화와 담론을 수면으로 이끌어내는 티핑 포인트로서의 역할에 더 무게가 더욱 실리고 있는 것 같다. 또한 그 역할 역시 이전의 주류 미디어가 독점하고 있던 부분을 소셜미디어 등의 채널과 분담하게 되며 미디어 권력 자체가 이전보다는 수평화 되어가는 재편과정에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한다.
3. 지금 현재 가장 유행하는 것, 딱 하나만 고른다면?
소셜미디어를 통한 개인 취향의 큐레이션
4. 누가 또는 무엇이 그 유행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나요?
소셜미디어의 보급, 그중에서도 인스타그램이 가장 큰 계기라고 생각한다. 사진을 쉽고 빠르게 자신의 취향에 맞게 편집해서 곧바로 포스팅 하고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팔로워들과 직관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는데 그 과정에서 몇 년전까지만 하더라도 허세라고 취급받던 개인의 감수성들이 이제는 취향으로 격상된 대접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5. 무엇을 보고 그것이 유행임을 단번에 깨달았나요?
얼굴사진 한장없이 감성 넘치는 사진만으로 수천, 수만의 팔로워를 몰고 다니며 인스타그램 셀러브리티로 불리우는 계정들과 그에 열광하며 그들과 비슷한 느낌의 컨텐츠를 재생산 하는 팔로워들을 보았을때.
6. 유행을 가늠하기 위해 참고하는 게 있나요?
직업의 특성상 잡지, 소셜미디어, 블로그 등을 참고하며 유행을 가늠하고 예측해보려고 애쓰지만 유행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가로수길 혹은 명동을 가끔 나가면 별천지 처럼 느껴질때가 많다.
7. 당신이 생각하는 그 유행이 당신의 취향과도 잘 맞나요?
좋은 흐름이라 생각하지만 그저 보여주기 위해 소위 말하는 감성팔이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 봐주기 힘들때도 있다. 팔로워수가 권력이 되어가는 상황도 보기 불편하고.
8. 만약 그렇다면 당신도 그 유행에 동참하고 있나요? 어떤 식으로 시도해 봤나요?
집에서 가끔 요리를 하는데 요리한 사진을 올릴때 특정 해시태그를 정해서 올리고는 한다. 요리는 눈으로 처음 먹는거라고 하는데 찍어서 포스팅할 생각을 하니 혼자 해먹을 때도 프레젠테이션에 신경을 쓰게 되었는데 파스타면 가지런하게 말아서 사진찍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있자면 조금 청승맞은 것 같기도 하다.
9. 과거의 어떤 유행을 분명한 호감이 없는 채, 단지 유행이라는 이유로 당신도 시도해 본 적이 있나요?
중학생 즈음, 40인치 바지에 헐렁한 티셔츠로 대표되는 힙합룩이 한창 유행이었다. 이동네 저동네 모두 입는 유행에 나 역시 동참하게 된 적이 있다.
10. 그 결과는 어땠나요.
힙합패션과 더불어 힙합/R&B 음악까지 함께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음악에 대한 취향 덕분에 다양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꽤나 많이 가질 수 있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그 친구들의 영향이 꽤나 컸으니 나한테 그 당시의 힙합패션이란 스쳐 지나가는 유행보다는 조금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일인듯 하다.
11. 우리가 알만한 근래의 유행 중 과대평가된 게 있나요?
혁오의 무한도전 출연 이후 활화산처럼 터져 나와서 자신들의 스타를 뺏겼다고 성토한 음지의 힙스터들. 언제부터 그렇게 많은 힙스터가 한국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스스로를 비주류라 칭하지만 옆에서 보기엔 그저 그들 나름의 유행에 굉장히 충실한 트렌디한 마이너들 일 뿐 인듯하다.
12. 반대로 과소평가된 유행도 있었겠죠? (마땅히 유행했어야 했는데 의외로 조용히 지나간 것)
2000년대 초,중반에 있던 홍대와 압구정의 수많은 소규모 로컬클럽들. 더 많은 사람들의 서포트 속에 자리잡게 될 줄 알았는데 슬프게도 세월 속에 그 이름을 찾아보기 힘들게된 곳이 대부분이다.
대형 페스티벌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때의 즐거웠던 기억과 지금보다 조금은 어렸던 내가 종종 그립다.
13. 당신이 기억하는 과거의 유행 중 가장 짧았던 유행은 어떤 건가요?
10년 전쯤 불닭이 한창 유행이었던 적이 있는데 조금 과장해서 두집 건너 한집 있을정도로 많았던 불닭집들이 어느 순간 자취를 싹 감추었다. 짧은 유행 기간 동안 친구들 손에 이끌려 불닭집에 가면 도대체 이걸 왜 먹나 싶을 정도로 매웠던 기억이 있다. 내가 기억하는한 가장 짧고도 가학적인 유행이다.
14. 반대로 가장 오랫동안 이어진 유행은요?
나이키의 에어포스 원, 아디다스의 슈퍼스타, 컨버스의 척 테일러.
15. 당신은 유행에 민감한 남자인가요? 5점이 최고로 민감한 점수라면 당신은 몇 점?
4점.
16. 유행을 따라가는 편인가요? 아니면 이미 유행인 것은 일부러라도 피하는 편인가요?
패션에 국한해서 얘기한다면, 직업 때문에 유행을 민감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나한테 어떤게 어울리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에서 벗어난 유행을 따라가는 편은 아니다.
17. 이제서야 유행이 됐지만, 난 이미 오래 전부터 그걸 취하고 있었다 하는 게 있나요?
이게 유행이 된적이 있나 싶지만 7년째 입고있는 A.P.C의 쁘띠 스탠다드, 가난한 학생시절 어렵게 산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마르고 닳도록 입고있다.
18. 돌고 도는 유행. 과거에 유행이었고 지금은 잊혀졌으나 다시 돌아와줬으면 하는 게 있나요?
남자셋 여자셋, 논스톱 같은 하이틴 시트콤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19. 바로 얼마 전까지 맹렬한 기세를 떨쳤으나 이제 점점 시들해지고 있는 유행은요?
스트릿 패션의 영향을 받은 하이엔드 브랜드들의 컬렉션. 신선한 시도들도 많았지만 스트릿 컬쳐가 가지고 있는 근본에 대한 존중 보다는 그 이미지의 소모로 그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20. 당신이 유행을 만들 수 있다면, 지금 서울에서 함께 살고 있는 남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사물이 있나요?
New York, Paris, London 그리고 Tokyo 까지, 도시의 이름 자체가 아이콘이 될 수 있었던건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로컬문화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자부심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조금 단순한 생각이겠지만 SEOUL 이라는 글자와 그를 상징하는 것들이 가슴팍에 새겨진 티셔츠가 서울에서 조금 더 많이 보이면 좋을 것 같다. Support Your Local!
전체 기사는 http://www.gqkorea.co.kr/2015/09/02/유행이-뭐예요-2/ 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