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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양파를 안 썰어봤다고 했다

그럼 밥은 누가 하는가

by 애기곰

결혼 14년 차인 지금까지 아직도 의아한 것이 하나 있는데, 왜 시부모님은 아들에게 살림을 가르치지 않았는가 이다.


신혼 초, 나는 시부모님과 통화를 자주 했다.

우리 부모님이 신신당부하신 것 중 하나, '시댁에 자주 전화 드릴 것'을 잘 지키기 위해서다.

(지금은 노선을 변경했다)


그때마다 시어머니는 우리에게 자주 물으셨다.

"저녁은 먹었니?"


이때 대답을 아주 잘해야 했다.


"아욱국이요."

"그거 맛있었겠다. 늬 아빠도 아욱국 좋아하시는데."

기분 좋게 대화가 이어지기도 하지만,


"OO요."

"오늘 대보름인데 나물밥을 먹어야지." 혹은

"우리 아들이 거기에 △△ 넣으면 잘 먹었는데."

"..."

대화가 어색해지기 일쑤였다.


급기야 남편은 상상의 메뉴를 만들어서 돌려 막기 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는데, 은근 효과가 좋았다.


"잡채요."

"오, 너 그거 어렸을 때 좋아했잖아."


"유린기요."

"우리 며느리가 그것도 할 줄 아는구나."





시아버지가 미식가이고, 워낙 식문화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남편이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는 내내 아들이 뭘 먹고 다니는지 별로 관심이 없으셨단다. 남편은 자취방에서 돈을 아끼려고 '초코파이'로 연명했다고 했는데, 아직도 이 사실을 모르시는 듯하다.


아들이 뭘 먹고 다니는지 4년 내내 궁금해하지 않으셨던 분들이, 결혼 후 무척이나 궁금해하셨던 건 남편 옆에 있는 내가 그에게 뭘 해주는지 알고 싶으셨던 것 아닐까.




남편이 첫 직장을 퇴사하고 10년간 집에 있는 현재까지, 나를 가장 힘들 게 한 것은 외벌이의 경제적 궁핍함이나, 여성 세대주의 외로움이 아니었다.


다 큰 성인에게 살림을 가르쳐야 한다는 부담이었다.


돈은 내가 벌면 되고, 형편껏 적게 쓰면 된다.

여성이 세대주라서 별나게 느낄 것도 없다.


그러나 양파 한 번 썰어본 적 없는 사람에게 살림을 가르치는 건, 굉장한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었다.

(부부끼리 운전을 가르치면 안 된다는 말을 나는 살림, 특히 요리에 적용하고 싶다. 운전 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적어도 한 사람은 칼을 쥐고 있다는 면에서)




밥 한 번 지어본 적도, 야채를 다듬은 적도 없을뿐더러 설거지를 한 적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는 말이 내 귀에 들린 건 이미 결혼을 한 후였다.


그가 하루 세 번 자기 밥상을 차릴 정도만 되어도, 백수 남편을 부양하는 일이 그리 고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의 아버지처럼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것도, 그의 어머니처럼 안에서 밥을 하는 것도 다 나였다. 내가 안팎으로 바쁠 동안,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을 보며 심한 무력감에 빠졌다고 했다.




아들에게 밥 지을 몇 날만 허락했더라면,

양파를 까거나 상추를 씻을 날들을 허락했더라면, 우리의 지난 10년이 조금은 더 따스한 날들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가족이란, 식구란,

함께 밥을 먹는다는 말이라는데

함께 밥을 '짓는다'는 말도 될 터이다.

먹는 사람 따로, 짓는 사람 따로 있는 것이 아닐 테니.


서로에게 따스한 밥 한 끼를 차려줄 스킬만 있다면 우리는 이혼 생각을 덜 할지도 모르겠다.


투닥거렸을 때, 뾰족해졌을 때, 날이 섰을 때

손수 지은 밥만큼, 서로를 위해 깎아내는 과일만큼, 우리의 마음을 쉽게 누그러뜨리는 것도 없으니까.




매우 쳐 가르쳤다.

그의 어머니처럼 푸근하고 인자하게 가르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지금까지 미안하다.


그래도 그때라도 가르치길 잘했다.

나는 그의 밥상이 조금은 익숙해졌고, 이혼 생각을 점점 덜 하게 되어 이제는 아주 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의 남편은 채소 중에 양파를 제일 좋아한다.

가장 썰기가 편하다고.

칼질 한 번에 자동 채 썰기가 된다고.


시어머니는 시아버지가 은퇴 후 몇 년 간 많이 힘들어하셨다.

노년에 삼시 세끼를 해드려야 하니 몸도 마음도 어떠하셨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나는 노후가 두렵지 않다.

평균 수명이 길어진 덕에 이 남자와 더 오래 밥을 지어먹고 살아야 하는 세월이 무섭지 않다.


남편은 자기만의 레시피북을 갖고 있고,

이 작고 미약한 책은 갈수록 창대해져가고 있으니 말이다.


20250913_132224.jpg 당시 남편의 레시피북 중 일부 (지금은 디지털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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