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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하고 싶을 때는, 글을 쓰자

내 삶을 뒤집는 글쓰기

by 애기곰

그 시절에만 쓸 수 있는 글이 있다고 한다. 글쓰기의 위력을 몰랐을 때에는 '시절'이 야속하기만 해서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수험생의 지난한 시절이 어서 끝나기만을, 끝이 보이지 않는 난임 투쟁이 곧 결실을 맺기만을, 그리고 10년 간 무직인 남편이 일터로 나가기만을 바라며 나의 시절을 견뎠다.


시절을 지날 때는 그 시간이 영원토록 지속될 것만 같지만, 시절이란 찰나 같아서 지나고 나면 마술쇼의 자욱함만 남는다. 어떤 지난함인지, 무엇을 위한 투쟁이었는지, 품었던 희망의 정체는 무엇이었는지, 안갯속에서 모호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우연히 난임 여정을 기록으로 남기는 @온 아무 작가님의 글을 보며 퍼뜩 깨달았다. 나도 이런 시절이 있었는데, 아주 길었는데, 죽을 것처럼 힘들었는데, 왜 나는 남겨 놓질 못했을까. 시험관을 아홉 번이나 진행하는 동안 겹겹의 마음을 써 내려가지 못했을까. 내 삶의 가장 고유했던 아홉 계절을 뾰족하게 깎은 연필로 세밀하게 기록해 두었더라면 오늘의 나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괜히 야속해졌다.


그래서 결심했다. 당장 '이 시절'을 기록하기로. 지난날의 회한을 글쓰기 동기로 탈바꿈시켰고, 지금 나를 찌르는 가장 큰 아픔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백수 남편을 향한 원망'과 '이혼에의 욕망'이었는데, 두 달 동안 15편의 글을 적어 내려 가며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뭉뚱그려 '아픔'이라고 여겨왔던 감정은 보다 복합적인 것이었고, 나는 진정으로 이혼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두 달 동안 사람이 완전히 변했다. 내 글을 향해 @큐원 작가님은 '감정의 밑바닥'을 보는 것 같아서 좋다는 평을 남겼는데, 나는 정말로 감정의 굴을 파고 또 팠다. 밑바닥에 있는 시커먼 것들의 정체를 알고 싶었고, 이것이 정말 밑바닥이 맞는지 몇 번이고 확인하는 작업을 글로 해냈다. 그리고 살아났다.


고작 몇 편의 글이 나와 남편의 삶을 뒤집어놨다. '시절 글쓰기'는 그 어떤 독서나 영상, 상담 보다도 효과가 좋았고, 이제는 그 효력을 말하고 싶어졌다. 매일 밤 이혼을 부르짖던 한 사람이 호떡 뒤집어지듯 홀라당 뒤집어진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 나의 또 다른 시절 글쓰기가 지금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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