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우리 슬아(첫째)가 12월 생이잖아. 같은 반 애들은 저만치 앞서가는데 슬아만 늦는 거야. 너무 속상해서 둘째는 꼭 1월생으로 낳아야겠다고 결심해서, 결국 서아(둘째)를 1월에 낳았어.'
아이 둘을 키우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아이 낳기도 전부터 주변에서 흔히 들어왔던 말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시험관을 9번이나 했던 나 역시, 시험관 5차까지 연초생을 노리고 시험관 스케줄을 짰을 정도로 연초생을 갈망했다.
2023년 4월 말, 쌍둥이 임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당해 연도 어느 집 아기가 뒤집기를 시도할 무렵, 내 아기들은 1cm도 되지 않은 형태로 심장만 뛸 뿐이었다. 쌍둥이는 36주 0일이 되던 11월에 태어났다. 출산 예정일은 12월이었지만 쌍둥이 특성상 한 달 일찍 나왔고, 그렇게 나는 연말생 아기 둘의 엄마가 되었다.
연말생에 대한 아쉬움은 놀랍게도 금방 사라졌다. 부부가 아기 둘을 종일 보느라 심신이 지치는 날이 많아지면서, 아이들을 하루라도 빨리 기관(학교)에 보낼 수 있음에 감사했다. 연말생은 연초생에 비해 반년~1년 정도 덜 키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 것이다. 일주일의 방학도 어렵다는 양육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연말생이라 정말 다행이다.'
한편,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 알림장에서 '내 아이의 늦됨'을 확인한 순간이 있었다. 같은 반 아이들과 보물 찾기를 하는데, 우리 아이들만 보물을 찾지 못해 울상이었고, 다른 친구가 자신이 찾은 보물을 우리 아이들에게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내 아이가 같은 해 태어난 친구들에 비해 늦다는 걸 알게 된 날이었다.
이런 마음이 들었기에 되도록 아이를 연초에 낳으려고 했던 거구나, 깨달음과 동시에 '내 아이의 늦됨'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 아이는 정말 늦된 걸까 (사실 제 속도다), 도대체 늦되다는 걸 뭘까 (평균의 함정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게 나쁜 일일까 (좋은지 나쁜지는 알 수 없다), 인생에서 속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빠름과 좋음이 동의어가 아닌데), 내 아이의 늦됨이 속상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의 성취가 내 성취가 아닌데)... 떠오르는 질문에 답을 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낸 나만의 답은 '연말생 아기는, 양육자 도야의 기회'라는 것이다. 부모 됨의 여정이란 아이를 향한 부모의 사사로운 욕심을 제거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에, 아이의 느릿함에서 평온함을 찾는 것이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사회가 제시하는 어떤 평균의 이미지를 아이에게 덧대지 말 것, 아이의 제 속도를 평안히 받아들여줄 것, 아이의 미래를 속단하지 않을 것을 연습하기로 했다. 내 아이보다 빠른 아이 친구들의 성취를 진심으로 축하하고 기뻐해 주며, 개인의 다름을 온전히 인정해 주는 연습을 하다 보면, 보다 풍성한 육아를 경험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이제는 연말생 아이를 키우는 것이 '행운'이라고 말한다. 아이 역시 자신보다 두 발 앞서가는 친구들을 보며 기쁘게 배우길, 자신만의 한 발자국을 놀라움으로 바라봐 주길 소망한다. 부모와 아이가 타인과의 비교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만 있다면, 연말생은 그야말로 행운이지 않을까 싶다.
출발부터 늦었다고 생각하는 연말생 양육자에게 감히 전하고 싶다. 연말생 아이를 키우는 기쁨을 우리 함께 누려보자고. 이 기쁨을 절대 빼앗기지 말자고.
끝으로, 인생의 여러 국면에서 자주 떠올리는 말, 류시화 시인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이 말을 선물로 드리며 글을 맺는다.
p.s.
보물을 찾지 못해 울상이 된 친구를 지나치지 않고 제 것을 건네준 내 아이 친구 OO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합니다. 친구를 경쟁상대가 아닌, 함께 할 벗友으로 봐준 아이의 시선이 너무도 고와서 오래도록 기억에 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