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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산일기 Oct 30. 2015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워킹맘

나는 하이힐을 신지 않는다. 키가 큰 편인 까닭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발이 못생겼기 때문이다. 내 발은 마치 오리발처럼 볼이 넓고 발가락도 벌어져있어, 코가 좁은 구두나 가느다란 모양의 힐을 신을 때면 이내 발이 아파와 금세 벗어버리게 된다.

난 데 없이 내 못생긴 발 모양새를 한탄하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힐은 일하는 여성의 상징과 같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침마다 아이들의 등굣길을 보고 있자면 일하는 엄마와 아닌 엄마는 ‘신발의 종류’로 대략 구분이 가능하다. 전업 주부들은 주로 납작한 굽의 단화나 슬립온을 신는데 반해, 일하는 엄마들은 어느 정도 굽이 있는 구두를 신는다.

이렇게 ‘일하는 여성’의 상징인 하이힐은 영화나 책 속에서도 종종 등장하고는 하는데, 지난 2011년 개봉한 영화,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가 대표적이다. 이 영화는 본래 알리슨 피어스가 쓴 베스트셀러 <I Don't Know How She Does It>을  영화화한 것으로 미드 ‘섹스 앤 더 시티’로 국내에서도 인기 있는 사라 제시가 파커가 주연을 맡아 워킹맘의 애환을 실감 나게 연기했다. 나는‘그녀가 어떻게 그 일을 다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뜻의 원제와는 다소 동떨어진, 이 영화의 제목이 썩 마음에 든다.'하이힐을 신고  달린다'는 말 자체가 아침부터 밤까지 쉴 새 없이 달려야 하는 워킹맘의 모습을 썩 잘 표현하고 있는 듯해서이다.


 

이 영화를 보면, 일하는 여성에 대한 시선과 배려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나을 것 같은 미국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영화의 주인공 케이티(사라 제시카 파커)는 두 아이를 키우며 펀드매니저로 일하는 워킹맘이다. 아내로, 엄마로, 또 사회인으로 1인 3역을 소화해내며 초 단위로 하루를 쪼개어 쓰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늘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안고 사는 그녀의 우리 워킹맘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영화에서는 그녀가 사내 라이벌인 남자 동료와의 경쟁에서 애 엄마라는 이유로 불합리한 차별을 받는 등 워킹맘이 직장 안에서 겪을 법한 사건들도 생생하게 펼쳐진다. 일하는 엄마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에피소드들이 연거푸 이어지는데,  그중 특히 나의 공감을 불러온, 그야말로 '사이다 같은 대사’가 있어 소개한다.


 

“만약 남자가 아이들을 챙기려고 업무 중에 집에 가잖아요? 그럼 그 남자는 부성애가 넘치는 롤 모델이 돼요. 그런데, 여자들이 만일 애가 아프다며 일찍 퇴근하면, 그 여자는 책임감 없고 일에는 신경 안 쓰는 여자라고 욕먹을 걸요!



사회인, 엄마, 아내 1인 3역의 부담감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2015년 1월 기준 56.6%(여성 고용동향, 고용노동부 자료)로 매년 점차 늘어나는 추세이지만, 일하는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비단 직장에서의  차별뿐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조차 엄마, 혹은 아내가 일을 하더라도 본연의 역할에는 충실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 또한 일을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는 동안, 출산 휴가 몇 달을 제외하고는 쉼 없이 사회활동을 해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와 아내로서의 일거리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가장 큰 문제는 아이가 자라면 자랄수록 엄마의 역할과 책임은 더 커진다는 것이다. 아이가 어릴 때에는 단지 먹고 입히는 것이 엄마 역할의 대부분이었으므로 대리 육아를 하는 것에 큰 문제가 없었다(물론 감정적 교류와 같이 고차원적 육아는 논외로 치더라도). 하지만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다른 이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엄마의 역할이 점차 늘어난다. 예를 들면, 학교 행사나 학부모 모임에 참여하는 등의 일은 대리 양육으로 충족이 되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점점 고학력이  되어갈수록, 학습에 대한 부분에서도 엄마의 역할은 무시할 수 없다. 아무리 공부는 제 스스로 하는 것이라지만, 요즘과 같은 교육 환경에서 아이의 능력 하나에만 맡겨두는 것은 엄마로서 ‘직무유기’가 된다. 게다가 만일 아이 성적이 나쁘기라도 한다면 결국 모든 화살은 진작 아이 교육에 관심을 쏟지 않은 엄마에게 돌아올 것이  뻔하다.


 

아내의 역할은 또 어떠한가. 우리나라는 예부터 '아내의 내조'를 중시해왔다. 남편이 바깥에서 일을 하는데 구겨진 와이셔츠를 입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 아내의 흉이 된다. 나는 처음 결혼하고 몇 년 간은 ‘이놈의 와이셔츠’를 다리는데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비했었다. 사실 결혼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다림질해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구겨진 셔츠를 빳빳하게 다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직접 셔츠를 다리는 대신 990원에 세탁과 다리미질을 해주는 곳에 맡기고 있다. 시간이 곧 돈인 요즘, 빨고 말려서 다리는 수고보다 990원의 기회비용 측면에서 훨씬 이익이라는 생각에서다. 요리도 빼놓을 수 없다. 요즘은 ‘아침을 챙겨먹으면 간 큰 남편’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특히 아이들이 있는 집이라면 아침 준비는 필수다. 토스트 한쪽에 계란 프라이나 식은 밥을 볶아내는 것이 전부인 비루한 차림이지만, 바쁜 아침 시간 이 정도를 차려내는 것도  꽤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래도 저녁 식사 준비에 비하면 아침은 쉬운 편. 퇴근하고 지친 몸으로 부랴부랴 집으로 들어와 주섬주섬 집안을 정리하고 나면 곧바로 앞치마를 매고 냉장고부터 살핀다. '오늘은 무슨 반찬을 할까?'에서부터 조리 과정까지 매일 식탁을 차려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특히 일하는 엄마에게는 고역이 따로 없다. 한 번은 점심을 먹기가 무섭게, 저녁거리를 걱정하는 내게, 선배 하나는 반찬가게의 힘을 빌던가, 외식을 하는 게 어떠냐며 충고했다. 사실 나도 그러고 싶을 때가 많지만, 왠지 직접 쌀을 씻고 반찬을 만들어야 아내와 엄마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것 같은 생각에 매일 저녁 앞치마를 질끈 묶는 것이다.


 

슈퍼맘의 부담을 내려놓고, 한계를 인정하자


많은 이들이 ‘슈퍼맘 콤플렉스’를 안고 사는 워킹맘들에게 ‘한계를 인정하라’고 조언한다. 모든지 다 잘하고 싶은 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자. 과연 엄마와 아내의 역할을 다 잘하면서 사회인으로서 성공한 사람이 있기는 한가? 나는 지난 2012부터 2013년까지 1여 년 간 <대한민국 대표 엄마 11인의 자녀교육법>을 집필하면서, 수많은 여성 인사들을 인터뷰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된 사람들이었고, 또 아이들을 훌륭히 키워내기까지 했다. 많은 여성들은 그들을 부러워했고, 뭔가 특별한 비법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나 또한 그들에게는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능력이 있지 않을까, 예상했다. 하지만 그들을 만나면서 알게 된 비법 중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그들은 모두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았다’는 것이었다. 한 창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시기에는 아이를 외국에 있는 친척집에 보내기도 했고, 매일 아침 아이들과 남편의 식사는 요구르트와 시리얼로 대신하기도 했다. 아이가 고등학교에 다니는 3년 내내 학교에 한 번 얼굴을 비추지 않다가 졸업식에 처음 담임선생님을 마주하며 쓴 소리를 듣기도 했고,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어린아이들만 집에 두고 출근하는, 다소 무모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어찌 보면 비정하고 무책임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모든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역할을 완벽히 잘 해 내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현실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직접 저녁을 준비하는 대신, 분식집의 김밥과 편의점의 어묵 탕으로 대신하고 남는 에너지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데 쓰면 어떨까. 그리고 한 가지,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에서 케이티에게는 그녀의 일과 열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고 이해해주는 남편이 있었다. 남편들은 그 누구보다 아내의 노력과 수고를 알아주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 또한 직장 내에 여자 동료, 혹은 후배들이 가정과 일에 치어 혼란스러워할 때, 사랑하는 아내를 떠올리며 조금 더 배려해 줄 수 있는 멋진 남자동료, 선배가 되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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