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물냉면의 냉기와 분홍빛 여동생

by 온지정원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오후였다. 그날은 엄마의 산부인과 진료일이었다. 평소라면 언니 뒤에 숨어 집 안에서 꼼짝도 안 했을 나였지만, 그날은 엄마의 손을 잡고 빗속을 나섰다.

​엄마는 뱃속에 셋째를 품고 있었다. 위로 딸 둘을 두고도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무거운 의무감이 엄마의 어깨를 짓누르던 시절이었다. 빗길을 걷는 엄마의 발걸음은 유난히 무거워 보였고, 나는 그 옆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걸음을 맞췄다.

​진료를 마친 후, 엄마는 나를 평소 가기 힘든 식당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엄마와 내 사이에 물냉면 한 그릇을 주문했다. 생전 처음 마주한 물냉면. 살얼음이 동동 뜬 육수와 가늘고 질긴 면발은 어린 나에게 충격적인 맛이었다.

​입안 가득 퍼지던 시리도록 차가운 국물 맛. 배고픔보다 앞섰던 건 그 강렬한 '냉기'였다. 아들을 기다리는 초조함을 달래려던 엄마만의 의식이었을까, 아니면 비 오는 날 묵묵히 따라온 순한 둘째 딸에게 주는 작은 보상이었을까. 이유가 무엇이었든, 그날의 물냉면은 내 유년기 가장 화려하고도 서늘한 기억이 되었다.

그 냉면의 냉기가 가시기도 전, 집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찾아왔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엄마가 입버릇처럼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엄마는 좁은 단칸방에서, 부엌이 이어진 벽 너머 네댓 가구의 임차인들이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숨을 죽인 채 동생을 낳았다고 했다. 비명 한 번 크게 지르지 못했던 그 고요한 출산은 당시 엄마가 짊어지고 있던 삶의 고단함을 짐작게 한다.

​네 살 터울의 여동생이 태어난 것이다.
태어난 여동생은 믿기지 않을 만큼 귀여웠다. 수줍음 많은 나는 활발한 언니를 따라 "동생 봤다!" 골목길을 뛰어다니며 동생의 탄생을 동네방네 알렸다. 고요했던 엄마의 방과는 대조적인, 아이들의 요란하고 천진난만한 축제였다.

​수줍음 많고 혼자 놀기를 즐기던 나에게, 작고 부드러운 여동생의 존재는 문방구 단칸방의 눅눅함을 잊게 할 만큼 커다란 기쁨이었다. 동생의 알사탕 같은 눈을 보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소란이 잠시 멈춘 것만 같았다.

하지만 축제의 끝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관리가 서툴렀던 탓일까, 동생의 탯줄이 달린 자리에 염증이 생겼다. 그 여린 배꼽에 기어 다니던 구더기를 본 기억은 어린 나에게 충격으로 남았다. 생명의 신비와 삶의 남루함이 한 공간에서 공존하던 시절이었다.

​동생이 태어나고 집안의 공기가 조금씩 부드러워질 무렵, 16개월 차이밖에 나지 않는 언니와의 갈등은 본격적으로 곪아 터지기 시작했다.

​순하고 조용해서 눈에 띄지 않던 나와 달리, 언니는 늘 폭풍의 눈이었다. 밖에서 맞고 들어와 엄마의 언성을 높이게 하거나, 문방구의 물건들을 몰래 들고나가 학교 친구들에게 뿌리며 환심을 사려했다. 그리고 그 폭풍의 끝에는 항상 나를 기다리는 가혹한 연좌제가 있었다.

​동생을 보며 웃고 놀라던 나의 평온한 날들은, 조금씩 언니의 그림자에 가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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