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유년은 배신과 상실로 얼룩진 강화도의 들판에 있었다.
일제 강점기, 돈을 벌어오겠다며 떠난 외할아버지는 큰 외할아버지에게 돈을 보냈지만, 그 돈은 고스란히 큰집의 땅을 사는 데 쓰였다.
그 배신감에 외할아버지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셨고, 부모 잃은 육 남매는 큰집의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남자 형제들은 중학교까지 배움을 이어갔지만, 여자였던 엄마는 국민학교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엄마의 삶은 방직공장의 먼지 속에 있었다. 큰집의 천덕꾸러기로 자라며 버스비를 아끼려 걷고 또 걸었던 엄마는 남동생들의 교과서를 어깨너머로 훔쳐보며 간신히 한글을 뗐다.
악필은 엄마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평생의 낙인 같은 상처였다.
그 상처는 시어머니인 할머니에게로 향했다. 십 년도 채 안 되는 시집살이였지만, 엄마는 할머니에 대한 흉을 도돌이표처럼 반복했다.
할머니가 강원도 평창에서 서울 단칸방 신혼집에 다니러 왔을 때 엄마와 아빠를 사이에 두고 자던밤 다리를 엄마 쪽까지 턱 걸치던 할머니의 질투, 나라에서 준 배급 밀가루 수제비는 맛없다며 옆집 아줌마에게 돈을 줘가며 짜장면을 시켜 먹던 할머니의 철없음.
엄마에게 할머니는 '아들 못 낳은 며느리'를 타박하며 이혼까지 종용하던 가혹한 시어머니이자, 생활력이라곤 없는 무능한 존재였다.
할머니가 강원도 평창 홍수 속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셨을 때도, 훈장 할아버지가 언니의 이름을 촌스러운 ‘O자’로 지어 호적에 올렸을 때도, 엄마의 마음속에는 독기가 쌓였다.
"딸이라고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공부라도 잘해야 한다"는 엄마의 강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배움이 짧았던 부모의 한은 자식들에게 '공부'라는 거대한 숙제가 되어 내려앉았다.
그 서러운 문맹의 밤을 건너온 엄마에게 글자란 곧 권력이자 생존이었다.
엄마가 무당집을 수시로 드나들며 "우리 첫째는 머리가 좋은데 안 해서 그래"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웠던 건, 어쩌면 배움 없는 자신을 무시하던 세상을 향한 마지막 자존심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