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신성일을 닮은 약장수 아빠와 뺏긴 밭문서

by 온지정원

부모님의 결혼은 시대의 결핍이 낳은 합작품이었다.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형제 중 막내였지만 마을의 글줄을 잡고 있던 훈장 할아버지는 소문난 미인 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두 살 연상인 데다 눈에 띄게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지만, 훈장님 댁 안주인답지 않게 집안일에는 도통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게으른 분이셨다.

그런 할머니에게는 남모를 한(恨)이 있었다. 아빠가 태어나기 전, 위로 둔 형과 누나들이 병으로, 혹은 불의의 사고로 줄줄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자식을 가슴에 묻으며 기력을 다해갈 무렵, 할머니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천일기도에 매달렸다.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해 빌고 빌어 늦은 나이에 기적처럼 얻은 외동아들이 바로 우리 아빠였다.

하늘이 내린 귀한 독자였으니 아빠의 유년이 어떠했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게다가 아빠는 당대 최고의 스타 신성일을 빼닮은 수려한 외모까지 갖추고 태어났다.

오뚝한 콧날에 짙은 눈썹, 평창의 맑은 정기를 받은 아빠는 어딜 가나 귀한 대접을 받는 ‘금지옥엽’ 그 자체였다.

​하지만 6.25 전쟁 직후의 어수선한 시기, 훈장 할아버지는 아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보다 가업을 잇고 집안의 작은 밭이나 일구며 곁에 있기를 바랐다.


뒤늦게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의 넓음을 알아버린 아빠는 중학교에 가고 싶어 몸 달아했다. 배움에 대한 갈증은 천일기도의 정성보다 뜨거웠다.

​결국 아빠는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했다. 집안의 생계가 걸린, 크지도 않은 밭문서를 몰래 훔쳐낸 것이다. 그것만 있으면 남들처럼 교복을 입고 공부를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에게 붙잡힌 아빠는 밭문서를 뺏긴 채 모진 매를 맞아야 했다. 아빠의 교육에 대한 꿈은 그날 할아버지의 회초리 아래에서 산산조각 났다.

​학교 문턱은 영영 넘지 못하게 됐지만, 아빠의 수려한 외모와 끼는 감춰지지 않았다. 아빠는 전국의 장터를 유랑하며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약장수’의 길을 택했다.


화려한 입담으로 사람들을 홀려 약을 팔며 길 위의 주인공으로 살던 아빠가 강화도에서 엄마를 만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신성일급 외모를 가졌던 아빠가 성격 거칠고 못생긴 엄마를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생활력' 때문이었다.
평생 집안일을 등한시하며 밭문서조차 지키지 못했던 미인 할머니 밑에서 자란 아빠에게, 엄마의 억척스러운 생존력은 그 어떤 미모보다 빛나는 가치였던 셈이다.

강화도에서 약을 팔던 아빠를 눈여겨본 큰 이모의 소개로 만난 두 사람.

배움에 굶주렸던 약장수 아빠와 한글을 독학한 방직공녀 엄마는 그렇게 서로의 결핍을 안은 채 딸 셋의 부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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