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김치

by 온지정원


​그 좁고 어두운 문방구 안채에서 해마다 치러내던 김장 백 포기는 지금 생각해도 경이로운 수준의 대공사였다.

한겨울, 배추를 산더미처럼 실은 트럭이 문방구 앞에 배추를 쏟아내고 가면 비상이 걸렸다.


언니와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직 채 여물지도 않은 고사리손으로 그 무거운 배추를 안아 들고, 방을 지나 동굴 같은 공동 수도까지 나르고 또 날랐다.


그 좁은 공간을 가득 채운 배추 향과 맵싸한 고춧가루 양념 냄새는 온 집안의 공기를 압도했다.

온 가족의 고생 끝에 얻어낸 겨울철 양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김치가 밥상에 오르는 게 지긋지긋했다.

당시엔 정부미와 함께 밀가루가 배급되던 시절이라 수제비가 주식이나 다름없었다.


김치조차 아껴야 했던 것인지, 엄마는 주로 밀가루만 묽게 반죽해 부친 맹맹한 부침개를 자주 내놓았다.

어쩌다 그 귀한 배추김치를 숭숭 썰어 넣어 발갛게 부쳐낸 부침개가 나오면, 나는 오히려 그 생소한 색과 맛이 싫어 먹지 않았다.

​사실은 맛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없는 살림에 먹을 게 김치뿐'이라는 그 가난의 낙인이 싫었던 것도 같다.

반면, 엄마가 양배추를 듬성듬성 썰어 프라이팬에 올리고 소금과 후추만 툭툭 뿌려 볶아주던 것은 참 맛있게 먹었다.


비록 고기 한 점 없는 소박한 채소 볶음이었지만, 김치와 달리 불 앞에서 갓 볶아낸 그 따뜻한 '요리'의 온기가 좋았던 모양이다.

김치 하나만 있어도 머슴밥처럼 밥 한 공기를 산처럼 쌓아 뚝딱 해치우는 언니와 달리, 나는 수십 년간 김치를 멀리하며 살았다.

이제는 김치 없이는 밥 한 술도 뜨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 그 옛날 문방구 안채에서 빨간 부침개를 밀어내던 어린 나를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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