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화된 현대 사회에 소통의 다리를 세울수 있을까
한강에는 31개의 다리가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다리는 가수 혜은이의 ‘제3한강교’로 알려진 지금의 한남대교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지위를 반포대교에 물려주어야할 것 같다. 2019년 가을, 반포대교를 사이에 두고 온 국민이 광화문과 서초동에 모여 상반된 주장을 펼치는 비극적 상황은 역사에 기록되었으니까.
국민적 갈등의 상징이 된 반포대교를 보면 보스포루스의 다리가 떠오른다.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을 가로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의 왼쪽은 유럽, 오른쪽은 아시아 대륙이다. 따라서 이 해협을 연결하는 보스포루스 다리는 단순한 교통수단을 넘어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의미를 갖는다. 보스포루스의 다리가 갖고 있는 역사적 함의를 이해하려면 500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오스만 제국 술탄의 방문
1502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밀라노 스포르차 가문의 몰락으로 후원자를 잃고 피렌체로 돌아온다. 20년 만에 돌아온 피렌체는 자신이 떠나온 시절과 사뭇 달랐다. 젊은 시절 자신을 후원해준 메디치 가문은 권력 투쟁에서 밀려났다. 그의 활동 무대였던 미술과 건축계에는 미켈란젤로라는 젊은이가 혜성처럼 등장했다.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미켈란젤로와 비교되는 것도 자존심 상하지만, 스폰서가 없어진 그는 당장 화실을 운영할 돈이 필요했다. 피렌체 정부에 제안한 야심찬 군사 프로젝트들이 원로원에 의해 무산되면서 실의에 빠져 있던 다빈치의 귀에 솔깃한 소식이 들렸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2세가 로마를 방문한다는 것이다.
1453년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은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꾸고 이슬람의 중심지로 키우고 있었다. 술탄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지류인 골든 혼 해협을 연결할 다리를 설계할 토목 기사를 구하기 위해 친히 로마를 방문한 것이다. 완성된다면 세상에서 가장 긴 다리로 기록될 다리를 설계하는 것으로 부와 명예를 한 번에 잡을 수 있으니, 다빈치로서는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질 수 없었다.
이 대목에서 다빈치가 남긴 '코덱스 레스터'를 펼쳐보자.
다빈치의 친필 노트를 모은 코덱스 레스터의 주제는 ‘물’이다. 그는 18장의 노트(책으로 묶으면 72페이지)에 빼곡하게 물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관찰한 그림을 기록했다. 그의 물에 대한 집착은 천문학까지 확장되어, 달빛이 태양 빛의 반사라는 생각까지 적어두었다.(그의 이론은 100년 후 케플러에 의해 증명된다.)
그의 노트에서 주목할 부분은 흐르는 물이 장애물을 만나면 어떻게 왜곡되는지 세밀하게 묘사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보스포루스 해협의 빠른 유속에도 견딜 수 있는 다리를 설계하기 위해 물의 흐름을 연구했던 것이다.(다빈치 본인은 몰랐겠지만, 그의 연구는 훗날 유체역학으로 화려하게 꽃피운다.)
다빈치는 물에 대한 고찰을 기반으로 오스만의 술탄에게 혁신적이면서 아름다운 다리의 설계를 제안한다. 그의 설계가 500년이 지난 현재도 혁신적인 이유는 ‘교각’이 없기 때문이다. 다빈치는 보스포루스 해협의 빠른 유속을 견뎌낼 수 있는 다리 설계를 위해 교각을 없애버렸다. 대신 다리를 아치형으로 쌓아올려 통행자들의 하중으로 안정을 유지하도록 고안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설계가 너무 혁신적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술탄은 이 다리가 구현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다빈치의 제안을 거절한다. 결국 술탄의 보스포루스 해협의 다리 프로젝트는 관심에서 멀어졌고, 다빈치의 설계도 역시 역사의 이면으로 사라졌다. 500년 후인 2001년 노르웨이의 건축가가 이 다리를 구현함으로써 다빈치의 설계가 옳았음이 증명된다 (표제사진).
다리: 문명의 교류
다리는 단순한 인적·물적 교류를 넘어 문화와 사상의 교류로 확장된다. 만약 다빈치의 설계대로 골든 혼 해협에 다리가 세워졌다면, 술탄은 다음 프로젝트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보스포루스 해협에 다리를 세우려했을 것이다. 다빈치 시대에 보스포루스 다리가 세워졌다면 중세 유럽의 기독교 문화와 중동의 이슬람 문화가 대립이 아닌 융합하는 관계로 발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술탄이 다빈치에 의뢰했던 골드 혼 해협의 다리는 300년이 지난 1836년 처음으로 세워진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오스만 제국은 전성기를 지나 중환자 신세가 되어 서구 열강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 민족과 종교로 뒤엉킨 발칸 지역은 유럽의 화약고가 되어 1차 대전의 도화선이 된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다시 130여년 후인 1973년에 개통된다. 드디어 유럽과 아시아 대륙이 육로로 연결되었지만, 때는 늦었다.
그 해 10월 유대인 최대 명절인 욤 키푸르 기간에 중동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4차 중동 전쟁이 시작되었다. 2000년에 걸친 뿌리 깊은 종교와 민족적 갈등이 곪아터진 이 전쟁의 나비효과로 전 세계는 1차 석유파동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나는 이따금 보스포루스의 다리가 다빈치 시대에 세워졌다면 세상이 조금은 덜 폭력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한다.
다리: 소통의 상징
다리는 소통을 의미한다.
2019년 8월 조국 문재인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을 지명한 이후 두 달여 동안 대한민국은 이념의 전장(戰場)이었다. 급기야는 ‘조국 수호’와 ‘조국 파면’이라는 정반대의 목소리가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정면으로 충돌했다. 14일 조 장관이 전격 사퇴하면서 이른바 ‘조국 정국’은 일단락됐지만, 정확히 두 동강난 국론 분열의 후유증은 쉽게 치유되기 어려워 보인다. 국민들은 반포대교를 사이에 두고 ‘광화문의 우파’ 또는 ‘서초동의 좌파’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아야했다. 1948년 대한민국을 이념적으로 두동강이낸 반민특위 사태가 70년 후 대한민국에서 다시 재현된으로 역사는 기록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이념 대립은 한국에만 국한 된 현상은 아니다. 미국과 유럽 역시 극심한 이념 대립으로 시끄러운 시대이다. 문제는 새로운 다리를 세우는 것보다 무너진 다리를 복구하는 일은 더욱 어렵다는 사실이다.
1994년 무너진 성수대교는 10년 후 2004년에야 다시 개통했다. 다리 붕괴 당시의 충격과 10년의 복구 과정에서의 고통은 온전히 국민의 몫이었다. 지금 국민들은 현 정권이 무너뜨린 소통의 다리를 목도하며 충격에 빠져 있다. 이런 혼돈의 상황에서 무너진 소통의 다리가 언제 다시 복구될지 감조차 잡을 수 없다.
과연 대한민국은
극심한 이념 대립으로
무너져버린 소통의 다리를
다시 복구할 수 있을까.
- Bozar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