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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zart Apr 02. 2021

비투루비우스적 인간

당신은 진보적 가치를 지키려는 보수주의자다.

비투루비우스, 그는 누구인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남긴 수많은 스케치 중에서 ‘비트루비우스적 인간’만큼 유명한 그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빈치가 어떤 목적으로 이 그림을 그렸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그림을 이해하려면 제목에 포함된 ‘비트루비우스’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야 한다.


기원전 27년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으로부터 ‘가장 존엄한 자’라는 의미의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으면서 제정 로마 시대가 열린다. 암살된 양아버지 카이사르의 뜻을 이어 로마 초대 황제 자리에 오른 아우구스투스는 제정 로마 시대를 여는 재건 계획을 추진한다. 이 새로운 로마의 설계를 맡은 인물이 바로 비트루비우스였다. 


그는 인간을 하나의 우주라고 생각했고, 소우주인 인체의 비례를 새로운 로마의 설계에 적용했다. 인간 체액의 흐름을 따라서 로마의 상하수도 시설을 설계하고, 인간의 뼈대를 토대로 도로와 암석을 다듬었다. 로마의 설계를 완수한 비트루비우스는 자신의 건축 철학을 담은 ‘건축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저서 10권을 남긴다. 그의 기념비적 저서는 1500년이 지난 후 필사본의 형태로 피렌체의 한 젊은이의 손에 전해진다. 


그 인물이 바로 30대의 젊은 다빈치였다. 


다빈치의 비투루비우스적 인간

다빈치의 인체 비례도 '비투루비우스적 인간'


다빈치는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에 대하여’ 3권 ‘사원과 인체의 비례에 대하여’에 묘사된 인체 비례에 대한 설명을 그림으로 구현하려 했다. 하지만 그 작업은 수월치 않았다. 비트루비우스가 서술한 인체 비례는 실제 인체의 체형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빈치는 비트루비우스의 내용을 무시하고 인체의 정확한 비례를 실측해 이 수치를 기반으로 인체 비례도를 완성한다. 그 결과물이 우리가 지금 보는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이다. 


혹자는 이런 이유로 제목에서 ‘비트루비우스’를 빼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인체의 비례가 사물의 기본이라는 인간 소우주론의 기본 정신이었다. 다빈치는 스케치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인체에 깊은 관심을 쏟게 되었고 훗날 1000여 점의 인체 해부도를 남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설계하는 구조물과 미술 작품 속에 어김없이 비례와 대칭의 개념을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에 대하여’는 다빈치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르네상스 시대 건축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가 보여준 인간 소우주론은 인본주의라는 르네상스 건축과 예술의 뿌리였던 것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르네상스 건축물들을 보면 비례와 대칭의 원칙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르네상스 건축 예술가들이 추구한 인본주의는 1000년을 지배해온 신본주의를 깨뜨리려는 진보적 행동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로부터 500년의 세월이 흘렀다. 


해체주의 현대 건축


자하하디드가 설계한 DDP


2014년 대한민국에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개관하면서 한국인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라크 태생의 영국 건축가인 자하 하디드가 설계를 맡은 이 기괴한 건축물은 난해했고 세금 낭비와 흉물이라는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하디드 본인은 생전(2016년 사망)에 부인했지만 그녀의 건축물은 해체주의로 분류된다. 


해체주의는 기존의 비례와 대칭을 거부하는 비정형 건축물을 일컫는다. 해체주의는 기존 건물을 해체하는 듯한 외형상의 기괴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해제주의 대표작가 프랭크 게리가 2014년 완성한 파리 근교의 루이비통 재단 건물은 해체주의 건축물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가 2019년 청담동에 개장한 메종 루이비통은 한복의 동적 아름다움을 구현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해체주의자의 눈에 대칭과 비례는 ‘고정’과 ‘죽음’을 의미한다. 


게리는 대칭과 비례에 기반 한 기존 건축물은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그 안에 거주하는 생명체는 숨을 쉴 수가 없다고 비판한다. 해체주의는 건물 안에 거주하는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구성 요소들의 불완전한 결합에서 발생하는 자유로움을 추구한다. 대칭과 비례를 추구한 르네상스 예술가들과 이를 파괴하려는 현대의 해체주의자들. 50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을 사이에 두고 존재한 이들은 상반된 가치를 추구한 것일까, 아니면 동일한 가치를 공유하는 것일까.


르네상스 시대 건축 예술가들은 비트루비우스의 인간 소우주론에 의한 비례와 대칭을 적용함으로써 1000년을 버틴 가톨릭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인본주의를 세우고자 했다. 하지만 500년이 지난 현대에 그들의 비례와 대칭적 르네상스 건축물은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했다. 현재 관점에서 다빈치는 혁신가가 아니라 비례와 대칭을 고집한 꼰대일까. 


아니다. 다빈치는 진보주의자였다. 


현대의 해체주의 건축가들이 진보적인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다빈치를 포함한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진보주의자들이었다.



진정한 진보란 무엇인가?


이제 동대문을 지나면서 보이는 DDP가 낯설지 않다. 


세월이 지나면 DDP가 만들어낸 충격은 희미해질 것이다. 언젠가는 청담동을 지나면서 보는 프랭크 게리의 루이비통 건물이 평범해 보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해체주의는 진보가 아닌 보수적 가치로 전락하고, 이를 깨부수려는 또 다른 진보적 개념이 등장할 것이다. 어쩌면 그 시대의 진보적 건축가들은 또다시 비례와 대칭을 주장할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진보란 시간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 개념일 뿐이다.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은 우리에게 진보에 절대성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루이비통 청담


혼란의 시기다. 


많은 사람들이 진보를 외친다. 그들은 자신이 진보주의자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또 다른 이들은 보수적 가치를 주장한다. 서로 상대를 헐뜯는데 열심이지만 자신들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 하는 진보나 보수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 도대체 진보란 무엇이며, 보수란 무엇인가. 진보는 현재의 가치를 부정하고 깨뜨리는 ‘행위’를 의미한다. 같은 관점에서 보수는 현재의 가치를 지키려는 ‘행위’로 정의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절대적으로 지키고 싶은 진보적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당신의 행위는 현존하는 가치를 지키려는 ‘보수’로 분류되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당신이 그토록 지키고 싶은 그 가치는 이름만 ‘진보’인 보수적 가치일 뿐이다.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현재의 고착된 가치를 깨뜨리려는
진보주의자인가
 
아니면

‘진보’라는 이름표가 붙은 고착된 가치를
지키려는 보수주의자인가.

- Boza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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