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독학자의 기쁨
《단단한 영어공부》 머리말에서 저자가 '영어학습 자서전'이라는 걸 언급하는데,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부터 나도 이런 걸 한번 써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침 최근에 다큐 자막 작업을 하다가 나의 여러 소소한 변화를 감지해서 요즘 영어 학습 수준을 기점으로 북엔드를 하나 세운다는 기분으로 정리를 해 보면 좋을 것 같아 끄적여 본다. 이번 주는 내내 감기에 시달려서 지금 내 목소리처럼 좀 맹맹한 글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일단 현재 내 학습 수준(AS-IS)을 말하기/듣기/읽기/쓰기 네 가지 측면으로 살펴보자면,
〈말하기〉
그동안 근원적인 한계에 많이 부딪혔다. 그리고 다분히 어리석게 들리겠지만, 말하기를 전혀 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기를 잘하고 싶어서 고군분투한 시절이 제법 길다. 말하기라는 게 내 시행착오 과정을 고스란히 노출하기 때문에 그 빈틈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는데, 이걸 받아들이고부터는 적어도 말이 편하게 나오는 유창성 면에선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상대를 적극적으로 만드는 중이다. 실수가 많고 매끄럽지 않을 때도 많지만, 그래도 이제 더는 영어로 말하면서 쫄지 않게 된 것 & 틀린 영어라도 내뱉을 수 있게 된 것이 큰 수확이다.
〈듣기〉
아주 편안하지는 않은데, 그래도 요즘은 좀 더 잘 들리기는 한다. 말하기와 비슷하게, 듣는 과정에서 더 잘 들으려고 긴장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고, 작년부터는 최대한 영어 자막만 띄어 놓고 보고 있는데(이건 한국어 번역 자막을 볼 때 나도 모르게 일처럼 느껴지는 직업병 때문이기는 하지만) 요즘은 종종 영어 자막 없이 보기도 한다. 팟캐스트 같은 오디오도 내가 관심 있는 주제라면 그럭저럭 잘 듣는 편인 것 같고, 세세하게 모든 표현을 트랜스크립션(소리를 듣고 원고로 받아 적기)하기에는 시간과 노력이 좀 더 필요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듣기는 말하기와 같이 가는 거라서 말을 더 편안하게 하게 되면 듣기는 훨씬 더 편안해질 것 같다.
〈읽기〉
네 가지 중에는 가장 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가장 지루하기도 하다. 좋은 점은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편안히 읽고 소화할 수 있다는 건데, 때로는 글자가 진짜 눈에 잘 안 들어올 때도 있으니까. 최근에는 글자를 소리와 연관 짓는 연습을 주력으로 하고 있어서 거의 모든 책을 소리 내어 읽는다. 그러면 기존의 고착화되어 있던 발음 대신 좀 더 영어 자체 소리에 가까운 단어로 기억이 점차 업데이트되어서 묵은 습관을 없애기에 좋다. 그리고 정확히 이 이유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단어나 표현을 소리와 연관 짓고부터는 단어가 훨씬 더 잘 외워진다. 한국어로 된 책을 읽다가 새로운 단어를 발견했을 때 그걸 간직하고 싶다면 그냥 '아, 이런 단어가 있었구나.' 하고 유심히 들여다보고 해당 단어가 들어 있는 예시 문장을 다시 읽어 보는 것만으로도 기억이 잘 되는 편인데, 요즘은 영어에서도 이따금 이런 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게 신기한 변화다. 일종의 근육이 생긴 기분이라고 할까? 최근에 해양 다큐 작업하다가 'camouflage'라는 단어를 이런 식으로 외웠다. 이건 명사로도 쓰고 동사로도 쓰는데 주로 동물이 주변 환경에 맞추어 제 피부색을 바꾸는 위장술/보호색 같은 개념이다. 앞으로 읽기가 좀 더 늘려면 아무래도 단어 습득량이 늘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어떤 단어의 뜻을 볼 때도 기본적으로 영영사전을 쓴다. 영어 안에서 그 단어의 뜻을 이해하고 난 다음에야 이걸 한국어로는 뭐라고 쓰면 가장 적절할지 고민하는데, 이러면 성능 좋은 AI 번역기보다 훨씬 더 멋들어진 번역이 가능해진다.
〈쓰기〉
네 가지 중 요즘 제일 안 하는 것 같다. 비슷하게 아웃풋을 내는 활동인 말하기는 적어도 대화 상대가 있어서 때로 이런저런 피드백을 받을 수도 있는데, 아직 쓰기는 남의 피드백을 받을 만큼 본격적으로 쓴 적이 없어서 올해는 내 글도 좀 써 보고, 그동안 낮은 단가를 핑계로 거절했던 한영번역에도 도전해 볼까 싶다.
여기까지가 내가 20대 후반에 본격적으로 (덕질로) 영어 학습을 시작해서 번역 일을 하고 있는 지금까지 약 8년간 일군 성취인데, 다 지나고 보니까 인제야 시간이 이만큼 쌓였구나 하는 거지, 실제로는 그냥 '어제보다 좀 더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매일의 고군분투였다. 다만 그때와 하나 다른 게 있다면, 이젠 뭘 어떻게 하면 잘하게 되는지 그 길을 얼추 알게 됐다는 점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적어도 '어느 길로 가야 하나?' 하는 고민은 던 셈이다. 그냥 내 앞에 뻗은 길로 쭉 나아가기만 하면 되니까.
내가 지금 주업으로 하고 있는 영한 영상 자막 번역 같은 경우는 기본적으로 (영어로 된) 말을 잘 한다든지 글을 잘 쓴다든지 할 필요는 없다. 원본 텍스트를 잘 이해해서 한국어로 잘 풀어 낼 수만 있으면 된다. 그러니까 내 영어 학습은 사실 내 현재 직업과 큰 상관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순서 관계를 보더라도 솔직히 나는 영어가 좋아서 겸사겸사 번역을 하게 된 거지, 번역을 더 잘하고 싶어서 영어 학습을 지속하는 번역가는 아닌 것 같다. 그냥 누가 딱히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잘하고 싶었다. 이상하게 영어에 끌린 어릴 적부터 마음이 그랬다.
다음 번에는 그 이상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를 좀 해 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