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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의 추억

이 시리즈가 제작 중단된다는 믿기지 않는 소식이 확정된 건 2019년 가을의 일이었다. 이후 1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계약 조건에 따라 홀수 시즌이자 마지막 시즌이 된 세 번째 시즌은 CBC 방송국을 통해 캐나다 현지에서 먼저 방영이 됐고 이후 넷플릭스에 올라온 건 모두가 이것이 마지막임을 알게 된 시점 이후였다. 시리즈의 결말은 어릴 적 내가 동화로 읽은 것과 비슷하다. 앤은 어엿한 청소년이 되었고 묘한 긴장을 유지하던 길버트와 화해했으며 원작에서처럼 둘은 로맨틱한 관계로 발전한다.


한국에서 이 '빨간 머리 앤' 이야기는 세대에 따라 친숙한 레퍼런스가 좀 다를 텐데, 내게는 KBS에서 방영한 일본 각색판〈빨강머리 앤〉이 가장 친숙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가 등장하기까지는 아마 이게 가장 유명한 각색이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넷플릭스〈빨간 머리 앤〉각색의 가장 큰 미덕은 그동안 우리에게 친숙했던 빨간 머리의 빼빼 마른 고아, 앤 셜리에게 한결 입체감을 부여하면서도 앤의 괴로운 과거 고아원 생활을 시청자가 애정과 온기를 품고 들여다보고 앤의 삶을 응원하게 해줬다는 데 있다. 커스버트 가족이 서로를 차츰 받아들이고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는 기존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지만, 넷플릭스판〈빨간 머리 앤〉은 1900년대 초반에 출간된 이 까마득한 옛 이야기에 아주 생생한 동시대적 색채를 불어넣는다. 그래서 시즌3에 그치고 만 이 여정에 깊은 아쉬움을 느낀다.


하나 재밌는 일화를 소개하자면, 이 시리즈 덕분에 수십 년만에야 마릴라, 매슈 남매의 서열 관계가 밝혀진 일이 있기도 했다. 마릴라가 매슈를 오빠로 칭하던 시즌1의 자막도 이후 호칭이 수정됐는데, 비교적 나이 서열이 쉽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한국어와, 주로 형제, 자매 같은 성별 정도로만 호칭 정보를 제공하는 영어의 문화적 차이를 비교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지점이다. 물론 자막 번역자의 입장에 이입해보자면 사뭇 괴로운 해프닝이기는 했을 것이다. 매슈가 마릴라의 막내 동생이고 이들 남매 사이에 요절한 형제가 있었다는 설정이 소설 원작에 기반한 것이든 새로이 만들어진 것이든 주로 앤에게 집중되어 있던 기존 서사에 또 다른 재미를 선사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또, 영어 오디오로 만들어지면 무조건 미드로 불리던 시기를 지나 요즘은 넷플릭스를 위시한 여러 플랫폼 덕분에 미드, 영드는 물론이고, 호주, 캐나다 등 언어를 영어로만 한정해도 다양한 문화권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는데, 우리가 그냥 미국 동화 정도로 알고 있던 '빨간 머리 앤'을 쓴 루시 M. 몽고메리는 사실 캐나다 출신 작가이며, 넷플릭스〈빨간 머리 앤〉시리즈에서도 캐나다 풍경과 그곳의 역사를 만나볼 수 있다.


넷플릭스의〈빨간 머리 앤〉을 생애 최초 '앤 셜리' 이야기로 만난, 또 언젠가 만나게 될 세대를 생각해보자면 내 마음이 괜히 뭉클해진다. 내게는 각 시즌을 인천, 청주, 런던 등 각기 다른 도시에서 봤던 탓인지 유독 각별한 기억으로 남아버린 작품이다.


동화 책장을 북 찢고 나온 것처럼 앤 셜리 커스버트의 모습 그 자체로 시청자에게 큰 기쁨과 감동을 전한 배우 에이미베스 맥널티에게 늦게나마 고마움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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