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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송 익스플로더: 음악 완전 정복〉

누가 음악을 만드는가. 어떻게 해야 음악이란 걸 만들 수 있을까. 이건 아주 오랜 기간 나를 사로잡은 질문이었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어릴적 내가 '음악 만드는 사람' 같은 게 되고 싶었던 건 맞지만, 진짜 음악을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둘 사이에는 근원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책 읽는 사람이 되고는 싶지만 실제로 책을 읽고 싶지는 않은 사람 사이에 놓인 차이 같은 것 말이다.


한때 2000년대 초반에 방영한〈뮤직엔조이〉라는 프로그램을 무척 좋아했는데, 매주 어떤 주제나 아티스트를 정해 대표 곡의 뮤직비디오를 하나씩 틀어주면서 진행자가 해당 음악이나 아티스트에 관한 해설과 비화를 곁들이는 식이었다. 그야말로 음악 만드는 사람 '놀이'에 제격인 방송이었다. 당연하지만 실체가 있는 내 음악을 만드는 데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고 더 정확히는 애초에 그러고 싶은 의지부터도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훌쩍 시간이 지나 암암리에 '코로나19 원년'이라 불리고 있는 2020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집에 갇혀지내면서 거의 20년만에 왜 내가 여태 음악 혹은 음악 엇비슷한 뭐라도 하나 만들지 못했는지를 마침내 깨달았다. 음악, 예술 행위는 기본적으로 내가 가진 뭔가를 뱉어내는 '아웃풋'이다. 반면 내가 '뮤직엔조이'에 심취해 보낸 시절은 계속 뭘 억지로 꾸역꾸역 삼키기만 하는 '인풋' 행위로 점철돼 있었다. 눈앞에 보인다는 이유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착각하며 지냈지만 꽤 오래 그 주변을 위성처럼 맴돈 게 고작이었다.


뭘 바깥으로 내뱉으려면 입안에 뭐라도 머금는 걸로 시작해야 한다. 아주 하찮고 사소한 거라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야 한다.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일기가 기록의 전부인 삶 속에서 예술가 놀이는 할 수 있어도 실체가 있는 예술을 추구하기란 점점 요원해진다. 내 첫 '아웃풋'은 이렇게 아주 오래 꾹꾹 속으로만 삼키던 나날 중 어느 날 불쑥 세상 빛을 보았다. 그덕분에 모든 게 거짓말 같던 2020년 한 해 동안 이 신묘한 마법 같은 변화가 내 삶을 관통했다. 나도 이제 조금은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일단 뭐든 뱉는 법을 깨우치면 삶의 관점이 아예 달라진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송 익스플로더〉는, 음악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주머니에 들어있는 각양각색의 '아웃풋'에 관한 이야기다. 어릴 적 내가 '뮤직엔조이'를 보던 방식으로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만, 살면서 내 이야기를 어떤 형태로든 바깥에 들려주는 '아웃풋'의 행위를 경험해본 이들에게 이 다큐는 좀 더 각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자신의 이야기와 작업 과정을 들려주는 다소 낯선 모습의 아티스트가 한결 친근하게 느껴지고 때론 이들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탓이다.


음악은 참으로 묘한 매개다. 온전히 '청각' 하나에만 의존해야 하므로 어찌 보면 극명한 한계를 가진 예술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반만 들어맞는 진실이다. 들어가는 문이 하나일 뿐, 한계를 모르고 증폭해 뻗어나가는 감정이라는 가능성을 가진 게 바로 음악이니까. 원초적인 감각 하나에 온전히 집중하므로 오히려 더 거대한 폭발로 이어지기도 한다. 영상 매체에서 음악을 활용하는 방식도 다분히 이러한 감각의 전환과 집중, 증폭의 효과를 노렸다 볼 수 있다.


음악의 물리적인 양식은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크게 다를 게 없다. 플레이타임이 얼마가 걸리든 창조한 '아웃풋' 속에 담은 아티스트의 의도는 대체로 비언어적 형태로 숨겨져 있다.〈송 익스플로더〉는 아티스트에게 숨은 이야기를 부연할 기회를 준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만들었는지 구구절절 이야기하도록 깔아둔 멍석이라 할 수 있겠다. 이들의 음악은 어쩌면 사족처럼 느껴질지 모를 이야기의 틈바구니를 약올리듯 도망다니며 보는 이를 감질 나게 한다.〈보헤미안 랩소디〉를 보러 상영관을 찾은 관람객의 마음으로(?) 우리는 아티스트의 이야기를 듣는다. 신기한 건, 이들의 이야기가 재미있게 느껴질수록 그 이야기의 생략된 주어, 음악을 향한 기대감이 고조된다는 거다.


긴 이야기에 비하면 마지막을 장식하는 음악은 짧다. 하지만 케이크 위에 마무리로 올리는 체리 장식처럼 매 회차 마지막에 어떤 방해도 없이 온전히 울려퍼지는 '완곡'은 충만한 완결의 감각을 선사한다. 산 정상에 올라 달콤한 찰나의 바람을 피부로 맞을 때처럼. 이 기분을 맛보기 위해 우리는 긴 이야기를 듣는다. 이는 영화 마지막에 엔딩크레디트를 암시하며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자아내며, 재생 지점을 후반부로 단숨에 넘길 때는 결코 찾아오지 않는 순간이다.

내 삶 속으로 흘러들어온 이야기들의 완결 지점에는 늘 음악이 있었다. 또, 거기에는 그 이야기와 음악이 나를 관통하며 일어난 화학 작용의 산출물 같은 감정이 어김 없이 고여 있었다. 어쩌면 어릴적 내가 매료된 건 음악이라는 특정한 형식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자리한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 자체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 자막 번역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 감정을 자아내는 과정에 좀 더 깊이 연루하게 된 지금의 삶도 어찌 보면 어릴 적 내 열망의 또 다른 실현이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음악은 아니 모든 예술은, 참고 참았다 끝내 뱉고야 마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한번 내 이야기를 해내는 경험을 하고 나면 다시는 멀찍이서 수동적으로 남의 이야기를 받아 적기만 하던 '뮤직엔조이'의 시절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숨차게 혹은 게으르게 달려나간 각자의 이야기는 대미에 다다르며 충만의 감각과 함께 완결된다. 나는 이제 그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연루하는 과정에서 분출되는 이 중독성 강한 감각에 사로잡혀 본 적 있는 이들 모두를 예술가라 부르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의미로는 인류 모두가 예술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송 익스플로더〉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인 셈이다.


거창하고 뜬구름 잡는 소리였지만, 대강 이런 마음가짐으로 접근하면 한결 재미있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어떻게든 나와 연결 짓고 가까워지려는 시도를 해보는 거다. 어릴 적〈뮤직엔조이〉가 내 속에 차마 용기가 없어 뱉지 못한 이야기를 쌓게 했다면, 요즘은 이따금 번역자라는 이름표를 꿰어차고 누군가의 이야기에 슬며시 묻어가며 본래의 의도와 맥락을 훼손하지 않으려 애쓰는 동시에 아주 조금씩 내 이야기를 보태어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나는 번역의 중요한 미덕 하나가 어떤 이야기에 보다 몰두해 감상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하는 행위 자체에 매료되어 번역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와 반대로,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번역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흉내내는 삶을 살았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내내 번역 '놀이'나 하는 데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번역은 누가 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번역이란 걸 할 수 있는 거지? 같은 걸 궁금해 하면서 말이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을 아주 커다란 주머니에 담아 이름을 붙여보자면 '이야기 전달자' 정도가 적당할 것 같다. 그 이야기는 내 이야기이기도 하고,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나는 전달자로서 세상의 이야기가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좀 더 널리 퍼져나가길 바란다. 그리고 딱 그러한 의도의 연장선으로, 지금 이런 구구절절하며 다소 황당무계하기까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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